‘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강력한 지도력을 선보였던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87세의 고령에 치매를 앓던 그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0년이 넘는 집권기간 동안 ‘영국병’을 치유한 것으로 각광을 받았다. 타협 없는 소신으로 무장한 채 무기력한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모든 분야에 경쟁체제를 심었다. 국민생활과 밀접한 가스, 상수도, 전기, 석유, 전화, 항공사 등의 정부 독점사업을 민영화했다. 한때 그의 리더십은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이던 그에게 모두가 너그럽지는 않다. 무엇보다 살인적 실업자 양산과 강압적 정책, 그리고 확대된 빈부격차 등은 재임 당시부터 반발을 샀다. 특히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의 단면이라는 광산노조 와해는 긴 그림자를 남겼다. 강성노조와 대립 끝에 타협 없는 승리를 이끌어 냈으나 영국에서 광산업은 사라졌다. 또 빈틈없는 민영화는 수백만 명을 거리로 내몰았다.
10년 권세를 끝장낸 것은 내분이었다. 강성으로만 치닫는 그에게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하자 집권당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죽음이 알려진 날에도 영국 일부에서는 축배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영국민의 애증은 뚜렷하다. 그의 사망소식에 일부 런던시민들은 “사회경제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인물이 떠났다”며 맥주파티를 벌였다고 영국신문이 전한다. 그가 재임시절 밀어붙인 강성정책의 부산물이다.
걱정은 이런 대처 전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롤 모델’이라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과거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대처 전 총리를 꼽았다. 가뜩이나 박 대통령의 리더십과 소신을 두고 불통(不通)이라는 쑥덕공론이 심한 때여서 더욱 우려스럽다.
1990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라고 한다. 당시 대처 총리는 미국의 조시 부시 대통령에게 “줏대 없이 흔들리지 말라”며 강력한 대처를 조언했다. 그는 또 대서양의 조그만 섬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불사, 양국의 젊은이 수백 명이 전사했다. ‘전쟁을 했던’ 지도자인 것이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워커홀릭으로 불릴 정도의 열정적 업무스타일은 지도자들의 전범(典範)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상흔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