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국회의원들이 갑의 횡포를 근절하겠다며 앞 다투어 강도 높은 대책을 제시하고 나섰다. 새누리당 전·현직 의원 모임인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은 을이 입은 손해액의 최대 10배까지 갑이 보상토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추진키로 의견을 모았다 한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도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문화한 법률안을 발의했고, 민병두 의원도 불공정 갑을 거래를 광역지자체장이 조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주 배상면주가 대리점주와 CU 편의점주가 잇따라 자살하면서 ‘을의 분노’가 계속 커지고 있는 데 대한 정치권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거면서 지난 임시국회에서는 왜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를 미뤘는지 따져 묻고 싶지만, 그보다는 어떻게든 갑의 횡포에 강력 제동을 거는 일이 먼저이므로, 향후 정치권의 행보를 일단 지켜볼 것이다. 서민들의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미적거리다가 불행한 사태가 연이어 터진 뒤에야 ‘해결사’인 양 나서는 행태에 대한 비판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갑을관계를 떠나 을을 죽음으로 내모는 현저한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에 우선은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 여야 의원들이 중지를 모으면 이번에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 마련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하지만 그동안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처리된 과정을 되돌아보면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예컨대 하도급법 개정안의 경우 불공정행위 전반에 걸쳐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자던 애초의 내용이 심사 과정에서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역시 심의 단계를 거치면서 벌칙조항이 크게 완화됐다. 언제나 슈퍼갑인 대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안긴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식이라면 이번에 여야 정치인이 내놓는 안도 악화된 여론에 대응하는 방책에 그치고, 심의과정에서 크게 변질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마침, 국회의원들의 과시용 ‘묻지마’ 발의가 지나치다는 통계(본보 5월22일자 4면)가 보도됐다.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안 건수는 5천21건에 이르지만 국회를 통과한 비율은 11%에 그쳤다는 것이다. 심의 단계를 거치면서 부결된 경우보다 발의 의원이 중간에 철회하거나 폐기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이 여론에 영합하여 일단 설익은 의안이라도 던지고 보자는 식으로 의안을 남발한다고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갑의 횡포’를 막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그야말로 을을 보호해줄 최소한의 법제화에 불과하다. 을의 편인 척 눈길을 끌고 나서 나 몰라라 해도 좋은 사안이 아니다. 추진을 약속한 정치인들이 이번만큼은 반드시 관철할 것인지 지켜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