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다큐멘터리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노병의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베트남전에 참가하게 되었는가?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은 1964년 8월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부터이다. 당시 미국 존슨 대통령은 즉각 보복을 선언하고 한국에게 참전을 요청한다. 처음에는 태권도 사범과 의료지원 부대를 파견한다. 뒤이어 비둘기부대를 보내어 도로와 항만, 학교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지원에 투입시켰다. 본격적인 파병은 1965년으로 잘 알려진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의 파병이었다. 1973년 전면 철수까지 연 인원 30만 명이 파병되어 전투에 임하여 용맹을 떨쳤다. 여기에서 전사한 한국군은 5천여 명이다. 이들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죽어가야 했을까?
한국은 베트남전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먼저 경제적인 이익이다. 파병된 군인들은 미군에 준하는 월급을 받았다. 이것이 진짜 파병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군인들이 받은 총 금액은 1억 8천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이 돈의 일부만 군인들에게 주고 대부분은 조국근대화라 불리는 경제개발의 종자돈으로 썼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이는 정부에서 착복한 것이다. 베트남전 파병을 용병(傭兵)이라 비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는 이제라도 사과하고 돌려주어야 한다.
기술력의 향상도 적지 않은 이익이다. 비둘기부대는 베트남의 열악한 도로를 건설하면서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비둘기부대와 같이 공사를 담당했던 현대건설은 여기에서 비축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를 상징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중동붐의 한 모퉁이를 담당할 수 있어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건설 기술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이 주도하는 지유민주주의 질서에 충실히 따름으로 미국은 결론적으로 고도성장의 안보적 울타리가 되어 이후 한국경제가 발전하는 좋은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미국은 정글에 고엽제를 무차별 살포하였다. 건조한 베트남에서 비가 오는 것으로 착각한 한국군은 팬티만 입고 고엽제를 맞았다. 당시에는 시원했지만 평생을 괴롭힐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엽제는 현재까지 치료약이 없다. 보훈병원에 입원중인 상당수의 참전용사들은 고엽제에 의한 피부병으로 고통의 나날을 살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이에 대한 적절할 치료와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일부 몰지각한 군인들이 베트남 여성과 몰래 관계를 맺어 태어난 어린이를 ‘라이따이한’이라 부른다. 5천여 명의 라이따이한들은 이제 40을 넘긴 중년이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존재들로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1992년 한국은 베트남과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고 수교하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한국이 베트남에 가한 피해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지극히 당연한 사과이다.
1796년 미국의 초대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을 상기해 본다.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베트남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나 베트남에게 큰 빚을 졌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베트남전의 비극은 참전했던 황석영이 1985년 두 권으로 남긴 『무기의 그늘』에 잘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