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의외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금각사>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로 예상하였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품 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왜 죽음을 미화해야 할까! 작품 속에서 요오코라는 처녀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불 속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정서이다. 가와바타는 이 말을 몸소 실천했다. 1972년 4월 미시마 유키오처럼 할복한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젊은 학생들과 ‘방패회’라는 극우단체를 조직하였다. 헌법 개정과 자위대의 황군화를 위한 궐기에 앞장서기 위한 단체였다. 미시마는 이를 행동으로 드러내려 하였다. 1970년 11월 25일 도쿄의 육상자위대 동부지부 건물에 대원들과 난입하였다. 사령관을 인질로 잡아 1천여 명의 자위대원들에게 천황의 신격화를 위한 쿠데타를 호소하였다. 자위대원들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준비한 칼로 모리타 마사카쓰라는 와세다대학 학생과 할복하였다.
남산 리라초등학교 교정 부근에는 1934년 9월 건립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신사(神社)가 있었다. 노기는 일본 조슈번 출신의 군인으로, 메이지유신 와중에 일어났던 내전에서 황군으로 출전하여 유신을 반대하는 사무라이를 진압한 전공을 세웠다. 1886년 독일에 유학하여 군제와 전술을 연구하였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점령한 타이완의 총독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는 제3군 사령관으로 뤼순(旅順), 펑티엔(奉天) 전투를 지휘했는데 특히 뤼순전투에서 금성탕지 같던 203고지를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는 두 아들도 출병시켰는데 모두 전사함으로써 전쟁의 승리와 함께 일약 일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12월 7월 문제의 메이지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알리는 조포가 울리자 그는 부인 시즈코(靜子)를 베어죽인 후 할복하였다. 신하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는 조선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는 극단적인 행동이다. 일본에서는 노기를 충신의 전형으로 받든다. 당시 게이한(京阪) 전기철도회사의 사장 무라노 야마토(村野山人)는 노기의 행동이 매우 존경스러웠던 모양이다. 1915년 사재를 털어 메이지 묘역 옆에 노기신사를 세웠다. 노기 스토리는 일본 역사교과서에 충군의 귀감으로 기술되어 있다.
소설에서도 등장한다. 나쓰메 소세키(夏目金之助)의 <마음(こころ)>이라는 단편이 있다. 주인공 센세이(先生)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다. 노기 마레스케가 할복한 소식을 접한 순간이다. 편지의 하이라이트는 이러하다. “내게는 메이지시대의 정신이 천황과 함께 시작되었고, 천황과 함께 끝난 것으로 여긴다네.” 곧 노기 마레스케나 소설 속 센세이나 메이지천황만이 일본의 전부였던 것이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노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被虜人)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국인이었지만 400년이나 지났으니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고, 완벽한 일본정신으로 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남산에 노기의 신사를 세움으로써 식민치하 당시 한국인들을 노기와 같은 일본정신으로 전환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미국의 사회학자 쿡의 표현대로 일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블랙홀을 들여야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정답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