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6 (목)

  • 흐림동두천 23.5℃
  • 흐림강릉 30.0℃
  • 서울 24.7℃
  • 대전 24.5℃
  • 대구 28.9℃
  • 흐림울산 27.3℃
  • 광주 26.0℃
  • 부산 23.5℃
  • 흐림고창 25.6℃
  • 흐림제주 29.7℃
  • 흐림강화 22.9℃
  • 흐림보은 24.4℃
  • 흐림금산 25.4℃
  • 흐림강진군 26.3℃
  • 흐림경주시 28.5℃
  • 흐림거제 24.1℃
기상청 제공

[열린광장]장개석을 회고한다

 

장제스(蔣介石)의 손자 장샤오옌(蔣孝巖) 타이완 부주석이 중국을 방문해 “양안(곧 중국과 대만)이 통일을 이루어 강대한 중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그는 7월 24일 “광둥성의 쑨중산(孫中山-쑨원)기념당에서 개막한 제2차 ‘해협양안 중산포럼’ 축사에서 “과거 양안은 단절된 기간이 있었으나 2009년 교류를 재개한 이후 양안 관계는 천지개벽한 것처럼 변했다”고 평가했다고 전한다. 통일에 대한 강한 집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장샤오옌의 조부 장제스는 누구인가. 장제스는 서태후의 전횡이 극에 달하던 1887년, 상하이 부근인 저장성 펑화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귀국하여 혁명에 가담했다. 1925년 쑨원이 죽은 뒤에 후계자로 국민당을 지휘하였는데, 1927년 4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에 대한 공세로 전환하여 이때부터 일관되게 공산당을 공격했다.

장제스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36년의 시안사변(西安事變)이다. 랴오닝성(遼寧省) 출신의 군벌 장쉐량(張學良)은 장개석과 모택동이 협력하여 대일항쟁에 나서지 않고 내전에 몰두하는 정책에 불만을 가졌다. 국내 평정이 선결이며, 외적은 뒤로 미룬다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라는 정책을 취하여 항일운동을 억압하고 있었던 장개석은 직접 대공작전을 독촉하기 위하여 장쉐량의 군대가 포진하고 있는 시안으로 가 화칭디(華淸池)에 머무르고 있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민중의 요구를 배경으로 12월 12일 장개석을 체포하고 내전정지·항일일치·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난징(南京)에서는 친일파인 허잉친(何應欽)이 패권을 노리고 있는 점과, 난징의 친영미파(親英美派)는 일정한 조건 아래 항일에 참가할 수 있는 점 등의 상황판단에 입각해서 평화해결에 나서서 주언라이(周恩來)를 중재사절로 보냈다. 25일 장개석은 석방되어 난징으로 돌아갔으며 내전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의 계기가 되었지만, 장개석은 그의 지도력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었다. 그가 구금당했던 시안 화청지의 뒷산에는 현재 병련정(兵鍊亭)이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1945년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충칭에서 모택동과 국공화평회담을 열었으나, 1946년 미국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다. 1946년 아들 장경국이 상하이에서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받았다.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타락은 장제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어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미국의 국무장관 마샬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40억 달러를 원조하여 중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려 하였지만, 파죽지세로 돌파해오는 공산군의 위세에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당군은 속수무책이었다. 1949년 4월 20일, 120만 병력의 공산당군이 물밀듯이 양쯔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23일 공산군은 장개석의 수도인 난징을 함락하여 중국 본토의 대한 22년에 걸친 국민당 통치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그날 장제스는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 그 후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간 다음, 다시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죽고 1년 뒤인 1976년 9월 9일, 애매모호한 유언을 남기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만나자 무슨 말부터 했을까. “존경하는 나의 친구여,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네”라고 했을까, 아니면 “우리는 결국 같은 운명이 되어 만났군”이라면서 손을 덥석 잡았을까. 여기에 장제스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장제스가 승리하여 중국에 민주정권이 들어섰다면 우리는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분단되었더라도 6·25전쟁은 절대로 없었으며, 통일은 이미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장제스를 보면서 뼈저리게 알 수 있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