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글을 쓰는가?” “문학하면 배고프다.”
많이 듣는 질문이다. 나도 여러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러나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당연하다. 각기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이 다르고 글을 쓰는 자세 또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세상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느끼고 싶은 충동에 글을 쓴다”라며 행동의 전제조건임을 표했다. 칸트는 “자연적인 미에 예술적인 미를 접근시키기 위한 행위”라고 했고,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지도자인 빅토르 위고는 “진보를 위한 예술을 한다”라고 했다. 누군가는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는가 하면 최고의 고독을 즐기기 위함이라고 상반되게 언급한 사람도 있다.
이렇듯 글쓰기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개성적인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헝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과 동시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하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또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의 가치나 수단도 아니다.
그러나 글만 써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한민국 문인의 한 달 원고료가 기십만 원 정도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도 지명도가 있는 문인에 해당되는 말이다. 밥 빌어서 죽도 못 쑤어 먹는다. 문단의 현실은 굳이 원고료를 제대로 받는 문인이 1%에 머문다는 통계 자료를 인용하지 않겠다. 물론 이름 석 자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 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는 예외다. 하지만 다른 문인들이 가는 길은 거의 비슷하다. 문학이 구원이라 믿고 오랜 시간 습작 기간을 지나 신춘문예 같은 낙타 바늘구멍만한 등단의 기회를 얻었을 때의 기쁨은 잠깐일 뿐이다. 작가가 되었어도 원고 청탁이 들어오질 않는다. 행여 원고 청탁을 받았다 해도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느 문예지에서는 단편소설 한 편에 30만원에서 40만원을 준다.(시나 수필 등은 원고료가 더욱 짜다) 아무리 인정을 받은 작가라 해도 1년에 서너 군데의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이 정도의 작가는 아주 성공한 작가 군단에 속한다. 그럼에도 해마다 문인으로 등록되는 수는 늘어가고 있다. 발표 지면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문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후죽순 문예지가 생긴다. 하지만 어째 수상할 때가 많다. 작품을 발표해도 원고료는커녕, 되레 작품을 실어 주었으니 책을 사라고 은근히 강요를 하기도 한다. 그 수법은 등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긴 하지만. 등단작이 실린 문예지를 100부, 많게는 300부 정도 사 주지 않으면 등단을 취소하겠다고 엄포성 발언을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등단해서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어도 책을 내 주겠다는 출판사가 없다. 그간 간간이 발표한 작품도 있고, 적어도 작품집은 내야만 이 바닥에 얼굴 내밀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떠밀듯이 책을 낸다. 이른바 자비출판이다. 그 비용이 적어도 400만~500만원은 든다.
모든 예술 행위가 그렇듯 솔직히 돈 생각하고 이 길로 들어 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글을 쓰는 그 자체를 숙명처럼 여겼기에 모든 것을 감내하고라도 펜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도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 먹고 자고 결혼하고 자식 낳아 키우는 최소한의 삶 말이다.
작가 선언만 하면 차비와 밥값을 주는 정부는 없을까? 적어도 등단한 지 20년 이상 되는 작가에게 최소한 한 달 50만원의 교통비라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프랑스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작가 지원제도가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도 등단한 작가를 위해 초중고에 작가 파견 사업을 하거나 각종 공모를 통해 지원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소수 작가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어느 작가는 배고파서 굶어죽었다. 작가도 사람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가난하고 배고픈 작가(문인)를 위한 사회복지제도가 하루속히 입법화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