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Sisyphus)의 돌은 영원한 반동 성향을 갖고 있다. 크고 무거운 바위 돌을 애써 언덕바닥에서부터 밀어 정상에 올리면 굴러 떨어지고 다시 밀어 올리면 또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곤 한다. 이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의 반복이었고, 시지포스는 운명처럼 그 바위 돌의 ‘되풀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폭력과 그 피해자의 고통. 예전에는 없던 일이 최근에 와서야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있어 온 일이니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며 미리 포기하거나 절망만 하고 있을 일도 아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학교폭력의 비극이 시지포스의 바위 돌처럼 ‘되풀이’하는 모습을 더 이상 운명처럼 받아들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나라의 미래를 알려면 그 나라의 학교, 교실을 찾아가보라는 말이 있다. 학교는 꿈과 이상을 품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꾸밈없는 청소년들이 모여 학업을 연마하고 심신을 수련하는 곳이다.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사람 되게 성장하도록 이끌어주는 신성한 곳인 것이다.
그런데 2011년 연말 대구에서 동급생의 폭행과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중학생이 자살한 사건을 시작으로 학교폭력 문제가 사회의 거대 담론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많은 기관에서 백가쟁명식 대책을 제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학교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학교 안에서 선생님들의 교육적 철학과 수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형사사법의 잣대로 접근하는 것은 쉽고 강한 처방으로 보이지만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은 학교전담경찰관과 선도심사위원회, 선도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무분별한 전과자 양산, 재범방지에 노력하고 있다.
학생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부드럽다. 마치 찰흙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부딪혀도 모양이 변할 뿐 부서지지는 않는다. 또다시 만져주면 본래 모양으로 되돌아온다. 떨어져서 삐뚤어졌다면 사랑과 관심으로 다시 만져주어야 한다. 그러면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다. 교육당국, 경찰, 가정, 사회 할 것 없이 모두가 국가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그래서 시시포스의 영원한 ‘되풀이’ 고통을 이제는 마무리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