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2일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전문을 보내고 박일우를 직접 베이징에 파견하여 중국의 참전을 요청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간부들은 대부분 신정부 출범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옆집에 불이 났으니, 그 불이 옮겨 붙기 전에 나가 싸워야 한다”며 참전을 강행했다. 중국은 240만 명이 참전하면서 엄청난 전쟁 물자를 지원해야 했고, 자신의 장남 마오안잉을 비롯한 40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전쟁지원은 이후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 큰 손실은 미국을 적으로 해서 싸운 전쟁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전후 중국을 철저히 봉쇄했고, 중국은 ‘죽(竹)의 장막’을 치고 한동안 세계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다. 오진용 교수가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에서 표현한 대로 2차 대전 이후 세계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중국만이 가난한 아웃사이더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북한은 주체사상의 실현을 위해 중국군의 참전을 은폐해야 했다. 평양의 ‘조선전쟁기념관’에는 김일성이 손을 들어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에게 지시하는 듯한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을 뿐, 중국군 활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1983년 ‘조선전쟁 30주년’을 기념해 북한에서 발행한 3권의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선해방전쟁사’에도 중국군의 참전조차 거론하지 않고 있다. 당연히 중국군의 참전과 승리의 기록들이 북한의 현실에는 지워져 있다는 사실에 중국인들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助)라고 불렀다.
1883년 6월, 김정일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덩사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어려움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이는 북한도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라는 일종의 암시였다. 김정일의 관심은 중국의 지원을 받는 문제였다. 김정일은 귀국하여 중국방문에 대한 보고대회를 열었고 강경한 발언들을 마구 쏟아냈다. “이제 중국공산당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존재하는 것은 수정주의뿐이다. 중국이 최대의 목표로 하는 4개 현대화 계획도 자본주의의 길, 수정주의 노선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면서 중국을 맹비난하였다. 바로 중국에 알려진 것은 당연한 일, 중국 수뇌부 특히 덩사오핑은 격노하였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사과를 강권하였고, 9월에 김정일은 중국을 재차 방문하여 정중하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하여 조문을 하고는 이렇게 썼다. “김일성 주석이여, 영원하시라”(金日成主席永垂不朽)라고. 일견 상당히 좋은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죽은 자의 최고 영예는 철저한 사회주의자로 살았다는 평가이다. 국가원로급 인물이거나 혁명원로가 죽었을 경우에는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이며, 국제주의자’라는 존칭을 쓴다. 중국은 김일성의 죽음에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쓴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정전 60주년(7월 27일) 즈음에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는 용어 대신에 조선전쟁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국제정치학자들이 흔히 쓰는 ‘Korean War’를 차용한 것이다.
북한정권은 중국의 새 지도부 출범을 안일하게 생각한 듯하다. 지난 2월의 3차 핵실험이 결정적으로 중국의 비위를 건들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중국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이제 북한은 국제사회의 흐름과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중국이 자신들의 혈맹이며 언제든지 도와주는 후견자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를 명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