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라는 이름이 힘이 빠진 지 너무도 오래된 세상에서 계급이 있냐는 물음은 진부하다. 그렇다면 계급이 없을까? 더 이상 계급도, 신분도 없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선언은 그저 선언일 뿐 현실에서는 신분과 계급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에서 신분과 계급의 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진 자들이다.
<상속자들>이라는 드라마의 시청률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선 대한민국 상위 0.1%도 안 될 재벌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드라마를 보면 우리는 상류층이 어떤 논리와 전략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확인한다. <상속자>의 그들은 상대의 약점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의 포인트로 삼는 그들은 반칙도 경기의 일부라고 믿고, 들키지 않는 한 끝까지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친다. 많이 가진 것이 화려하긴 해도 아름답지가 않다. 경쟁만 있고 품위는 없는 그들을 보며 우리 사회를 본다.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왜 그리 팍팍한가. 삶이 ‘생존’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삶이 지옥이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라고, 아빠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었다고, 한 기러기 아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실직을 반복해서 유학비용과 체재비의 대부분은 아내가 식당 일을 하며 충당했었고, 그는 그저 아들의 용돈 정도만 송금했을 뿐이었단다. 그렇지만 그 돈이 얼마나 귀한 돈이었을까? 아마 그는 그 돈을 보내기 위해 덜 먹어야 했고, 많이 추워야 했고, 정말 외로워야 했을 것이다.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어버릴 정도로.
나는 생각한다. 아마 많은 40, 50대 가장들이 남의 문제 같지 않아 그 기러기 아빠 뉴스에 시선을 두고 한마디씩 했을 것이라고. 44살인 친구의 남동생은 올해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구조조정이 소화가 되지 않아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고, 아침이면 출근한다고 나가 식구들이 3달 이상을 몰랐단다. 정규직이 그럴진대 비정규직은 어떨 것인가? 그것이 과연 친구의 남동생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일 뿐이겠는가. 이 땅에서 40, 50대 가장으로 산다는 것은 힘들고도 버거운 일이다. 더구나 반칙도 경기의 일부라고, 어떻게든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로 조직을 일궈온 재벌 회장님 중엔 직원들을 자기 밥 먹는 머슴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과거에 많은 기여를 했어도 아무런 기회를 주지 않고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직원을 내쫓는 리더들이 많다.
경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리더가 소수의 아첨꾼이나 추종자로 블록을 쌓고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욕망만 관철하려고 하면 조직 내 사람들은 모두 하인이 된다. 얼핏 보기에 조직이 갈등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조직 논리만 남고 인간의 논리가 없는 거기서 인간적으로 사는 사람은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그런 세상에서 잘 적응하는 아이들을 만들기 위해 교육에 목숨을 걸고 있다. 슬프다, 함께 밥상을 나누지 않고,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하지 않고, 함께 운동하지 않고, 함께 여행하지 않고, 함께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함께 살지도 않는 가족 행태를 유지하기 위해 돈도 제대로 벌지도 못하면서 돈 버는 기계가 되고 있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그리고 교육에 목숨을 건다고 욕먹어가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한 이 땅의 어머니들이. 사실 우리는 우리가 평가받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강한 사람인데.
내가 하인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함께 느끼고 함께 밥상을 나누고 함께 도란도란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