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상으로 우수, 경칩을 지나 이제는 봄이려니 했는데 다시 겨울이다.
길가에 세워둔 승용차도, 앞집 할머니가 밀고 다니시는 유모차도 눈에 살짝 덮여있다. 떠나가던 겨울이 밤사이 발길을 돌려 아쉬움을 드러낸다. 그 바람에 다른 해보다 빨리 온다던 봄은 주춤거리며 제 자리를 못 찾고 훌쩍 멀어진 느낌이다.
잠시 바깥을 보다 추워져 얼른 집으로 들어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녹차 티백을 우려 천천히 마시고 있으니 휴일 아침이 더 없이 편안하다 싶어 오늘 하루가 좋은 날이 될 것만 같은 행복한 예감이다. 짧은 시간에도 사람은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아 몸을 녹이며 살지만 이제 막 움이 트고 자라는 풀이 갑자기 찾아온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아침잠이 많은 내가 새벽에 운동을 시작했을 때 모두들 며칠 안 가서 그만두겠지 하며 가끔 물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고 하면 의외라는 반응이다. 이른 따뜻한 잠자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새벽길을 나서면 조종천 건너편 산에는 눈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소나무나 잣나무 숲이 보인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소나무의 기상을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배우고 자랐다. 그래서 자연 활엽수보다 침엽수가 월등히 좋은 나무라고 여기게 되었고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자박자박 혼자 걷는 내 발걸음 곁에는 눈이 오기도 전에 말라 죽은 얼굴에 성에를 하얗게 쓰고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먼지가 될 작은 목숨들이 있다.
개망초는 죽은 가지에 매달린 꽃이 예전에 아이들이 몰려가서 주워온 낙하산 천 같이 누렇게 되었고, 부르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 것만 같은 강아지풀 그리고 도꼬마리 쑥부쟁이 그밖에 이름도 모르는 잡초라고 불리며 짓밟히며 살던 하찮은 목숨들이 죽어서 겨울 들길에 서 있다.
그 하찮은 목숨들은 가꾸는 손길보다 뽑아 없애려는 손아귀에 더 익숙해 있을 볼품없는 몰골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머묾이 단순한 정체가 아니라 흔들면 흔들리고 꽃잎을 물어뜯으면 뜯기는 대로 눈보라와 맞서서 봄을 기다린다. 그렇게 혹독하던 겨울이 힘이 빠지고 주춤거리며 물러가는 기색을 누구보다 빨리 알고 먼 지평을 넘어 찾아오는 봄볕을 겨우내 귀를 기울이던 언 땅으로 나른다. 잠 깬 뿌리 샘물 빠는 소리, 햇순 틔우는 소리를 기다리며….
여러해살이풀이 겨울을 지내는 방법은 그다지 늠름하지도, 드러내 보일 것도 없지만 형이 아우의 성장을 돌보며 살던 우리네 옛적 삶을 회상하게 한다. 이 보잘것없는 목숨들이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봄을 부르는 손짓인지도 모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 자리를 이어가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처럼.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작가 신인상 수상 ▲가평문학상 수상 ▲가평문인협회 이사 ▲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