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하늘과 바다의 틈을 가르며, 거칠어진 바다에도 흔들림 없이 달리던 쾌속선이 한 시간 남짓하여 숨을 고른다. 뒤이어 가파른 산지(山地)로 된, 대마도가 나타난다.
이곳은 역사이래로 대륙문명이 일본으로 전달되는 디딤돌 역할을 하면서, 엉덩이 밑에 도사린 가시처럼 우리를 괴롭혀왔다. 일찍이 왜구들의 소굴이었으며, 이곳 이즈하라는 일본 공산품의 한국 밀수출 근거지였다. 지금도 4만여명의 도민들이 바다를 건너오는 수많은 한국관광객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 예부터 우리나라에 빌붙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는 곳이다.
대마도 북쪽 히타가츠 항에 닿았다. 이곳에서 부산항까지 49Km, 일본 후고오가까지는 130Km이다. 뱃길 한 시간이면 제주도, 울령도, 흑산도 등의 외딴 섬들보다도 가깝다. 그런데도 일본 땅인가, 안타깝고 억울하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속했으나 토지가 협소, 척박하고 바다 건너에 있어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에서 살 수 없는 부랑한 왜인들의 소굴이 되어 섬 밖으로 나와 약탈, 살인, 방화 등 극악한 짓을 하였다. 고려 우왕 때와 조선 세종 때도 군사를 보내 토벌하였다. 흉년이 들자,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대마도주의 상소에 따라 경상도에 예속시고 도주를 태수로 봉하였다. 삼포(三浦)개항 때도 통상권을 주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의 ‘해동지도’와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에도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조선 후기 대원군 섭정 기, 국내외가 혼란스러울 때 메이지 정부는 일본에 편입시켜 버렸다. 1871년 대마도주는 이즈하라 번지사(藩知事)가 되었고, 그 후 나가사키현에 편입되면서 지방 행정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사료에 의거하여 전격적으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강력하게 반발하였지만, 재차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요청을 받은 맥아더는 대마도 반환 요구를 전후 동아시아의 질서 구축에 방해된다며 제지하였다. 2005년 경남 마산시는 대마도가 신라에 속했었다는 자료에 따라, 대마도의 날 선포식을 가졌다. 이는 일본의 독도 영주권 주장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지난 2월22일, 시네마 현에서 다케시마의 날 기념식을 가졌다. 일본정부의 우경화와 우익단체들의 혐한 시위도 도를 넘었다. 이럴 때, 우리도 대마도를 흔들어 맞불을 지펴보는 것이 어떨까? 역사학자들은 대마도 관련 자료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보다 월등히 많다고 한다. 부산시나 창원시에서 조례를 제정, 분쟁지역화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되겠지만, 그 원인은 전적으로 일본에게 있다.
세종임금이 이곳을 정벌한 이후, 관리와 군대를 주둔시켜 조선의 영토로서 지속적으로 관리하였더라면 지금의 상황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 대마도 여행길에서 아쉽고 답답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월간〔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한국문인협회가평지부장 역임 ▲수필집: ‘남쪽포구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