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과 함께 몰래 훔친 담배를 피우러 숲속에 간 소년은 마피아 변호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마피아 변호사로부터 상원의원의 살해 사실을 우연히 듣게 된 소년은 자신을 죽이려는 마피아 조직과 그 사건을 해결하려는 정치 검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소년이 의지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년은 전 재산인 단돈 1달러에 여성 변호사를 고용한다. 여성 변호사는 의심에 가득 찬 소년을 진심으로 대한다. 결국 소년의 마음을 열게 만든 그녀는 증거를 확보한 다음 정치 검사와 협상하여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가동하게 만든다. 소년은 모든 신분을 위장하고 그녀가 마련해 준 편안한 보호처로 떠난다. 베스트셀러 작가 존 그레샴의 소설을 영화화한 ‘의뢰인(The Client)’의 내용이다. 이 영화는 소년을 지키려는 여자 변호사의 증인보호 프로그램 신청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990년 서울동부지법 건너편 길에서 증언을 마치고 나오던 임모씨가 보복폭행을 당해 그 자리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들을 조직폭력배로 지목한 데 대한 앙심으로 임씨를 살해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선 1980년에는 서울 남부지법에서 구속된 피고가 법정 안에서 증언하던 장인을 살해한 엽기적인 법정 살해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증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정, 일대경종’ 등의 내용으로 증언 기피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20~30여년이 경과된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2012년 3월 서울중앙지법은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 재판에서 증인지원 프로그램을 최초로 실시했다. 이에 따라 성폭력 피해자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민감한 사안에 한해 심리적으로 안정된 공간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하는 증인지원관 제도가 도입됐다. 증인지원관은 재판절차와 증언의 필요성 등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고 증언 이후에는 격려와 함께 치유에 도움이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증인 지원(支援)제도일 뿐 영화 의뢰인에서처럼 증인을 적극적으로 보호(保護)하는 제도는 아니다.
보복범죄는 2008년 158건에서 2012년 308건으로 늘어났다. 경찰은 보복범죄를 피할 수 있도록 ‘원스톱 보호쉼터’를 만들기도 했지만 실효성은 의문이었다. 피해자 보호시설도 10여곳이 있었지만 지난해까지 연 5~6명만 이용했을 뿐 유명무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법무부 내에 증인보호 프로그램 전담부서를 두고 ‘신분세탁’을 통해 증인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피해자나 증인들의 신분이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최근 북한 공작원 출신 탈북자 A씨가 비공개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 등이 고스란히 북한에 전달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비공개 법정에는 간첩 혐의자와 민변 측 변호사 등 10명 안팎만 참석했다. 그런데 증인 A씨가 법정에서 증언한 지 불과 28일 만에 북한의 가족들이 북한 보위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비공개 증언이 어떻게 북한 보위부에 알려졌는지 조사해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대법원은 보복범죄가 우려되는 증인의 신분 노출을 방지하는 ‘익명(匿名) 증언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간첩 혐의자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탈북자의 신분이 노출돼 북한에 거주하는 증인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책이다. 지난 30여년 전 증인을 법정에서 보복 살인했을 때도 대책은 있었다. 또한 20여년 전 증인을 노상에서 보복 살해했을 때도 역시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비공개 재판이라 할지라도 재판과정에서 증인선서나 공판기록을 통해 증인의 신분이 피고인과 그의 변호사에게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 현실이다.
차제에 소극적 증인보호에서 탈피, 영화 의뢰인에 등장하는 증인보호 프로그램과 같은 적극적 보호 제도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