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유성영화(有聲映畵)에 환멸을 느낀 그는 무성영화(無聲映畵)로 전향한다. 이후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스(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을 발표한다. 1972년 아카데미상은 그에게 ‘지난 세기 동안 헤아릴 수 없는 기법들이 후대 영화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공로상을 수여한다. 찰스 스펜서 ‘찰리 채플린’ 경(Sir 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 이야기다. 그의 전향은 소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깨인 사람의 피어린 고행의 하나겠다.
이처럼 유성(有聲)이 아닌 무성(無聲)으로 경지에 이르려는 예는 많다. 불가(佛家)의 선종(禪宗)이 대표적이다. 선가(禪家)에서는 교가(敎家) 사람들이 경론(經論)의 문자와 교설(敎說)만을 우선시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불교의 참 정신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정법(正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以心傳心) 것이니, 문자가 아닌 체험에 방점을 찍은 셈이다.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고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부른다. 이 ‘문자를 넘어선 문자’는 동쪽으로 와서 선종을 중국에 전한 달마(達磨)가 시원이다. 이어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 물질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데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겠는가)’라는 게송(揭頌)으로 중국 당나라 선종 제6조가 된 혜능(慧能)에 이르러 절정을 꽃피운다.
혜능 이후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수행법으로 ‘선오후수(先悟後修)’를 강조한다. 돈오(頓悟) 후 점수(漸修)해야 한다는 것인데,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頓悟點數論)’도 이 영향을 받았다. ‘깨우치지(悟) 못하고 수행(修)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는 말씀 되시겠다. ‘말(馬)처럼 뛰는 말(言)’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대목이다.
말(言)이 넘치는 시대다. 도심 곳곳을 ‘나만 최고’라는 현수막들이 점령하고 있다. 허언(虛言)이 대세가 된 가슴 아픈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말없이 ‘통(通)’하는 사람 하나 그리운 시절이다.
오늘, ‘채플린 경’의 생일을 맞아 묵언수행(默言修行)이나 할까보다.
/최정용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