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지하철 안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문구를 등 뒤에 대자보로 매달고 승객 틈바구니를 비집고 돌아다니며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당과 지옥은 피안의 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신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온 것은 나름 약간의 과학적 지식과 이성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하신 구순의 모친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한없이 믿고 계신다. 유럽 중세기에는 국민 대다수가 문맹인 탓에 교회는 그림으로 교리교육을 시켰다. 고딕 노트르담 성당 서쪽 출입문 위의 팀파눔에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최후의 심판 부조를 설치했다. 과학과 철학으로 무장된 현대 고등지식 국민들 대다수는 천당과 지옥이란 개념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신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촌스럽게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믿는다. 천당, 지옥의 실재를 믿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이성적이며 도시적인 고등지식인처럼 보인다.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신다고 하지만 이번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국민들은 분명히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야 할 인간들이 누구인지를 식별하고 있다. 설사 실재하지 않을지라도 꼭 실재해야만 한다고 믿어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심리적 보상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도 300여명이 사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실체는 국민 한 명 한 명이다. 이 국민 가운데 ‘세월호’ 선장과 그 일당들도 들어있다. 청해진이라는 해양회사와 세월호 선장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는 기업과 국민들이 대한민국 구성원 중에 단 0.001%라도 있는 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재사고는 도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한다. 일제 강점과 동란을 치른 직후,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한동안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일단 내 자식부터 챙기자, 일단 나부터 출세하고 봐야 한다’라는 야만적인 개인 가족이기주의가 한동안 팽배하면서 부패와 부정을 행하는 것조차 능력이 있는 행위로 치부했던 한 철이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국민들은 공공성과 질서, 공동선, 의협심과 같은 덕목을 배우고 훈련받을 기회가 충분하지 못했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그저 무능하고 착한 한심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했던 적도 있었다.
최근 교육부의 대학평가로 인해 모든 대학들이 특성화하면서 대부분 제시하고 있는 항목이 사회봉사이다.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에 이제야 겨우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하게 되는 자기만족의 사회봉사일지라도, 또 하기 싫은 사회봉사를 필수 학점으로 지정받아 의무로 행하는 봉사일지라도 아무행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러한 체험들을 통해 기대하지 못했던 보람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본능적인 측은지심으로 인한 것이든 의무 때문이든 사회봉사를 통해 스스로 사회적 책무를 갖게 되고 고양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 참사가 누구 특정한 사람들만의 잘못과 책임만은 아닐 것이지만,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아무런 죄 없이 지금 이 시간에도 지옥의 한가운데 있다. 저주에 가까운 소리로 들릴지언정, 정작 지옥에 가야 할 인간들은 죽어서라도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몇 만 배의 고통을 겪어야 할 지옥에 꼭 갈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느님은 모두에게 자비하시지만 그 자비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베푸신다고 믿는다. 하느님께서 이 나쁜 족속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대다수의 선민들은 어떤 소망도 없이 여생을 살게 될까봐 하는 말이다. 모두 잘 살고 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과 그 일당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해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애비로서 자신들이 솔선하여 자식에게 그렇게 살라고 행동으로 가르친 꼴이 되었다. 지옥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