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짙어지는 6월은 현충일과 6·25 기념일 등 호국의 달이다. 이때쯤이면, 쿵∼쿵∼ 하며 먼 메아리처럼 들려오던 대포 소리, 신작로에 이어진 피란민 행렬,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영영 돌아오지 못한 막내삼촌의 기억, 삼촌의 실종 통지를 받고 피를 토하듯 통곡하시던 할머니 모습 등 아스라이 꿈같은 유년이 되살아난다.
이곳 가평에도 6·25의 상흔이 깊이 남아있다. 매년 4월이면,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는 가평도서관 영연방참전 기념비 앞에서 이국의 노병들이 모여 엄숙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75번 국도를 따라 북면(北面)에 이르면, 주민 200여명이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집단 학살되어 지금도 귀신이 나온다는 ‘노루목고개’가 있다. 뒤이어 이곡리의 캐나다 전투 기념비, 목동리의 호주-뉴질랜드 전투 기념비가 차례로 있어 이 일대가 6·25 격전지였음을 말해준다.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인 1951년 4월23일, 중공군의 대대적인 1차 춘계 공세로 화천 사창리의 국군 제6사단이 무너진다. 큰 피해를 입고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북면 가평천 일대까지 추격당한다.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제27여단이 이 일대에 방어선을 치고 반격을 시도하였다.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 하에 호주군 대대, 캐나다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 등 3개 대대 병력이 3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국군 대대와 호주 왕실대대는 부대원 40% 이상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사투한다. 캐나다군 대대는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주보급로인 경춘가도를 지켜내었다. 뉴질랜드 포병대대는 막강한 포병화력을 퍼부어 중공군을 차단, 격퇴시킨다. 이들은 무려 5배가 넘는 병력의 중공군을 막아낸 것이다.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1차 춘계공세에서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여 경춘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 노동절에 입성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다. 가평 방어선이 돌파되어 중공군이 계속 남하하였다면 서울이 다시 공산군 치하에 들어가는 치욕을 당하였을 것이다. 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는 6·25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캐나다 부대는 귀국하여 이름을 ‘가평부대’로 바꾸었고, 호주에서는 ‘가평’이란 단어를 희생과 영광이란 말로 기억되며, ‘가평의 날’을 지정하고 왕실 3대대를 ‘가평3대대’라 부른다 한다.
금년 4월24일, 목련 꽃비가 내려앉는 영연방참전 기념비 앞에서는 그날의 노병들과 가족들, 참전 4개국 대사,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평전투 63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이국의 산하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산화한 젊은 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귀중한 생명들을 헤아릴 수도 없이 희생시켰지만 분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휴전중인 이 전쟁마저 잊혀가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뜨거운 6월, 이곡리와 목동리의 전투 기념비 동산에는 키 큰 망초들이 무심하게 꽃을 피우며 젊은 영혼들을 달래고 있었고, 숱한 젊은이들이 피를 뿌렸던 가평천에는 그날을 잊었는지 맑은 물이 천연덕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월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한국문인협회가평지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