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쉬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재충전에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하여, 또는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쉬는 것이라면, 쉼 그 자체도 여전히 또 다른 형태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 자체가 삶의 목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일은 생존조건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은 생활수단만이 아니라 능력과 계급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은 많고 편하고 높은 소득을 가져올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고도성장과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시장에서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경쟁사회에서 뒤지거나 자신이 무용지물이라는 자격지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 번째 날에 쉬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일만하는 신이 아니라, 쉬기도 하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쉼은 쉼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보다 더 많은 창조를 위해 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왜 쉬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이 쉬셨으니까! 쉼에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숨을 쉬지 않듯이 말입니다. 휴식(休息), 가쁘게 몰아온 숨쉬기를 가다듬는 것이 쉼의 본뜻이듯이 쉼은 숨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창조는 물론 노동입니다. 성서에는 노동을 표현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보다’(aboda)인데 이 단어는 ‘봉사’에서 유래했고, 다른 하나는 ‘멜라카’(melaka)인데 이 단어는 ‘보내심’에서 유래합니다. 성서는 노동을 신적 위임의 성취로서 이해한다는 점에서 노동을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그리스 세계의 노동이해와 다릅니다.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서 이해되는 노동은 강요된 필연적인 자연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교제의 표현인 것입니다.
일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동역자로서 인간이 참여하는 것인데, 이 참여가 개인에게가 아니라 공동체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노동의 소외와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가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실업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첫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약탈당하고, 착취당하고 투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상품화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진술은 근본적으로 땅이 부재지주의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선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인간과 땅의 상호의존관계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땅을 적대시하거나 땅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인간이 끊임없이 땅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부정하거나 지양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인간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발전과 성장을 지향하는 일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공동체적으로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쉬신 것처럼 사람과 자연도 쉬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쉬신 하루 만이라도 온 세상에서 총성과 폭격이 멈추고, 산과 강을 파헤치는 불도저와 기계들이 쉬고, 살인적으로 질주하는 트럭과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메우는 자동차들도 쉬어야 합니다. 본래 인간이 온 곳, 그리고 인간이 마침내 돌아갈 곳, 곧 흙 가까이에서 인간은 쉬어야 합니다.
흙은 생명이자 죽음입니다. 흙 가까이에서 쉬면서 우리가 생명의 뜻을 이해하고 생명을 노래한다면, 세상은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