路(로)와 道(도). 둘 다 ‘길’을 뜻한다.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작품은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이다.
‘路(로)’에 부합내지 상통하는 작품이다. ‘路(로)’에는 ‘足’부수가 들어있다. ‘足’는 한자 뜻으로 ‘발’족이다. 즉, 발이 들어있다. 따라서 ‘路(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다. 이 길에서 길 위를 걷는 사람이 지나는 행인(行人)인데,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 어디론가 유유히 떠나가는 사람인 ‘나그네’다.
그 사람은 달관의 경지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해가며 소탈한 인생의 행로를 세상에 맡긴 채 살아간다. 또한 발로 뛰는 인생이므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상의 이치에 부합하는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의 그 길의 최고의 의미는 달관적 지식이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길인 ‘도(道)’가 있다. ‘道(도)’에는 ‘首’가 들어있다.
즉 머리 ‘首’(수)이다. 그 ‘길 도’는 지혜의 길을 함의하고 있다. 지혜는 모든 현상의 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를 인식하는 슬기로움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세상을 방법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의미가 아닌 가장 근원적인 지식이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이유와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온갖 지식의 정점에 있는 것이 ‘지혜’가 아닌가 한다. 아마도 윤동주의 〈서시〉가 이에 잘 부합되는 작품일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한 길이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 길이다. 이 길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요 ‘자기희생’이며 ‘사랑’인 것이다. 이 길이 바로 ‘도(道)’이다. 그래서 윤동주의 〈서시〉는 문득 우리의 가벼운 생각들을 멈추게 한다. 저 멀리 큰 바위산이 우람하게 서있어 비장감이 감돌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길 위의 특이한 현상을 보게 된다. 길가엔 버려진 각종 유인물들이 난무한다. 특히 해질녘이면 ‘대리운전’ 전단지들이 뿌려지다가 빠른 속도로 살포된다. 음주운전을 예방할 수 있는 효과도 일정 부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길바닥에 살포된 그 전단지, 게다가 살짝 길 위에 가랑비라도 뿌리면 그 전단지는 요지부동하여 길 위에서 녹기 시작한다. 이튿날 일찌감치 청소하시는 분들이 부지런히 쓸어 담지만 깨끗하지는 않다. 결국 하늘에 비가 내려야만 깨끗이 닦아진다.
뉴스를 보니 유명 기업가들이 경영일탈로 사법처리 된 바 있었는데, 정부가 국민경제 차원에서 사면(赦免)을 통한 오너의 직접 경영을 원하는 것 같다. 정부가 고심하는 것엔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특혜시비가 일어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결국 국민의 넓은 이해와 아량으로 해결된다. 마치 하늘에 비가 내려야 깨끗해지는 것처럼. 그러나 그 하늘은 공의로움이 있다. 그러므로 진실로 ‘길’ 위에 ‘길’을 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