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武藝)는 글자 그대로 몸으로 말하는 예술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는 신체언어적인 특성을 갖는다. 만약 자신의 신체 어딘가가 불편하다면 자세가 바를 수 없고, 역시 마음 어딘가가 아프다면 그 또한 원하는 움직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무예 수련시 핵심에는 몸과 마음의 조화를 근본으로 삼는다.
몸과 마음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풀어나가기 위해 만들어가야 할 것이 바로 ‘평상심(平常心)’이다. 평상심에는 평온한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평온한 몸을 갖춰야만 이뤄내는 일종의 경지에 해당한다. 상대가 무력을 사용하여 도발하거나 헛된 입담으로 마음을 공격하려 할 때 찾아야 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평상심인 것이다.
유학에서는 그런 조화로움을 중용(中庸)이라고도 표현한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유학자들이 입이 닳도록 읽고 외웠던 전통시대의 유교 경전 중 사서(四書) 중 하나가 바로 중용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무관이 되려면 반드시 이 사서를 통달해야만 무과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으니, 전통시대 무예를 익히는 사람들에게도 필수인 공부이기도 했다. 특히 사서를 공부할 때 마지막으로 읽는 것이 중용이었다. 먼저 대학(大學)을 읽으면서 유학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인지하고, 다음으로 논어(論語)를 읽어 그 근본이 무엇인지 고민함을 배우고, 다음으로 맹자(孟子)를 읽어 논어에서 말하는 고민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배운다.
사서 중 마지막으로 읽는 것이 중용인데, 비로소 여기서부터 자신의 학문 안에서 옛사람들의 미묘한 사유의 세계를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용은 시작부터 이해하기 힘든 구절로 시작한다. 그 첫 장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을 일러 ‘성(性-인간 됨됨이)’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인간의 도리)’이며, 그 도를 닦는 것 즉, 인간이 추구해야할 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교(敎)’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문장에는 성인의 삶을 표방하는 유학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용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고 수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멀리 돌아 온 것처럼 보이지만, 무예의 중용, 평상심도 그러하다. 무예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깨우치고 수련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머리 공부뿐만 아니라 몸 공부를 통해서 중용을 찾는 행위가 무예인 것이다.
그런데 중용을 생각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물리적인 중간을 연상하게 된다. 마치 1부터 10중에 어느 것이 중용인가라는 물음에 ‘5’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또한 왼쪽 길(좌파)도 아니고 오른쪽 길(우파)도 아닌 가운데 길(중도)을 중용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용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바탕으로 가는 것이기에 기계적으로 절반을 가를 수가 없다. 인간의 본성 안에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라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슬픔이나 고통을 살피지 않고 기계적으로 중도를 취하거나 자신의 이익여부에 따라 기준을 정한다면 그것은 중용이 아니라, 중용을 빙자한 방관자인 것이다. 세상의 고통과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그 안에서 스스로 치우침 없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용인 것이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다.
무예에서도 그 중용의 덕을 찾기 위해 쉼 없이 피땀 흘리며 수련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해 수련을 쌓는 것은 어찌 보면 미련한 짓일 수 있다. 아무리 수련의 고수일지라도 생물학적 나이를 넘을 수 없기에 팔십의 노인이 이십대의 젊은 혈기를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로지 내 몸과 내 마음 속의 조화를 찾아 스스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수련하는 하는 것이 무예의 중용이다. 세상의 가장 큰 적은 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