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리가 하얀 꽃을 피우고 아침저녁 으스스한 냉기가 스민다. 은행잎은 찬비를 맞아 우수수 떨어져 뜰 안을 노랗게 물들였다. 조금 도타워진 오후 볕을 맞으며 들길로 나섰다. 얼마 전 엔진소리가 요란하더니 들녘은 어느새 텅 비어 하얀 공룡 알들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인기척에 놀라 튀어 오르던, 그 많던 벼메뚜기들은 어디로 떠나갔을까?
지난달 중순쯤 육중한 콤바인 한 대가 들에 나타났다. 며칠 동안 황금빛 벼들을 게걸스럽게 삼켜, 토해낸 알곡들을 큰 자루에 가득가득 채워 떠난 뒤, 논바닥에는 볏짚만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그 다음에는 수상한 트랙터가 들어와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논바닥에 깔린 짚을 걷어, 돌돌 말아 비닐로 칭칭 동여매어 가축의 겨울사료라는 거대한 공룡 알을 만들었다.
벼농사가 시작된 이래로 근래까지 보아왔던 가을걷이와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물색(物色)은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무논은 베어 깔고 건답은 벼 두드려’ 농가월령가에서 이르듯, 들판이 금빛으로 물들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하얗게 들로 나가 벼를 베고, 볏단을 줄가리 친다.
말린 벼는 탈곡기로 낟알을 털어내고 바람개비로 지푸라기 등을 제거한 뒤 알곡을 가마니에 담고서야 끝이 난다. 이일은 언제나 어둑어둑 할 때까지 끝나지 않아 햇불로 마무리를 짓곤 했다.
요즈음은 모내기도 옛날과 달리 정말 간단하다. 벼 모종은 이른 봄 비닐하우스에서 규격화 된 모판위에 자란다. 경운기가 쟁기질한 무논에 모판을 실은 이양기가 한번 지나가기만 하면 모내기가 끝나는 것이다. 우렁이를 뿌려, 김매기 할 필요도 없다. 유기질 거름을 사용하여, 비료나 농약도 치지 않는다. 수리시설이 잘되어 계곡에서 끌어 온 물이 여름 내내 들 가운데로 흘러 물 걱정도 없다. 모내기나 추수 때에도 들판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농기계 한 두 대만 며칠 돌아다닌다.
농가월령가에서 ‘농부의 힘든 일 가래질 첫째로다. 물꼬를 깊이 치고 도랑 밟아 물을 막고 한편에 모판하고....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모 내어 보세’ 하였듯. 뒷산에 종달새가 지저길 때 즈음, 못자리의 모가 다 자라면 묶음을 지어 소(牛)가 쟁기질 해 놓은 무논에 던져 놓는다. 양쪽 두렁에서 못줄을 잡아주면 일꾼들이 엎드려 모를 심는다. 허리가 아프고 힘이 들면 ‘모야모야 노랑모야...후략’ 농요를 부른다. 아낙네가 이고 온 농주와 점심은 꿀맛이 따로 없다. 농가월령가도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坐次)를 정한 후에 점심 그릇 열어놓고 보리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운 후에 청풍에 취포(醉飽)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하였다.
모내기를 하고부터는 논에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가물 때는 물 때문에 이웃과 다투기도 하고, 웅덩이 물을 두레박으로 밤새 퍼서 대기도한다. 여름 볕이 뜨거워도 초벌, 재벌 김매기를 하여야하며 벼멸구 구제를 위하여 논에 석유도 뿌려 준다. 벼농사는 못자리부터 추수 때까지 힘든 노동의 연속으로 품앗이하여 집집마다 수십 명의 일꾼들이 동원되어야 했다.
예전에는 벼농사가 국가산업의 근간이었으나, 지금은 농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벼는 식량주권을 위하여 자급할 수 있어야 하기에 수매 등 보호정책을 펴, 그나마 남아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