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년 정조는 자휼전칙(字恤典則)이라는 구휼법(救恤法)을 선포했다. 흉년을 당해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걸식하거나 버림받아 굶주리는 사례가 많아지자 이들이 부모 및 친척 등 의지할 곳을 찾을 때까지 구호하고, 자녀나 심부름꾼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양(收養), 즉 남의 자식을 기르게 하기 위해 특별히 내린 법령이다.
특히 이 법은 국한문으로 인쇄, 한양을 을 비롯한 전국에 반포해 모든 백성들이 영구히 시행하도록 했다. 법에 구호대상자인 어린이 걸식자는 부모 및 친척, 또는 주인이 없어 의탁할 수 없는 4세부터 10세까지의 어린이로 규정했다. 특히 버려진 아이는 3세 이하의 유아로 못 박아 특별 관리하기도 했다.
또 걸식아이는 진휼청(賑恤廳)이라는 전문관청에서 구호해 옷을 주고 병을 고쳐주도록 했고 날마다 1인당 정해진 분량의 쌀·간장·미역을 지급하게 했다. 유기아는 유모를 정해 젖을 먹이고, 유모나 거두어 기른 사람에게도 정해진 분량의 쌀·간장·미역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들을 기르고자 원하는 자는 아무나 할 수 없고 진휼청의 입안(立案)을 받도록 했다. 지금의 입양제처럼 심사를 거치게 한 셈이다. 정조는 이러한 제도를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34세의 젊은 정약용을 어사로 임명해 전국을 돌며 구휼법이 제대로 지켜지는가를 감시토록 맡길 정도 였다.
오늘날에도 입양은 친부모와 친자와 사이와 같은 관계를 만드는 신분행위를 말한다. 또 입양자는 양부모나 그 가족, 친인척과의 관계에서 친 자식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양자의 배우자나 자식들 역시 친족관계를 가지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런 입양이 해외에서 더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아직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고아 수출 1위국이라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갖고 있다.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20만명 이상의 아동이 해외에 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매년 600명을 웃돈다. 그러나 국내 입양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 2011년만 하더라도 405명으로 미국 입양보다 적다.
입양에 관한한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지원책이 있다. 아이를 입양하면 월 15만원에서 많게는 65만원까지 지원해 주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에는 없는 규정이다. 최근 2세 입양아 폭행사망 사건을 일으킨 부모가 이를 악용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인면수심, 그 정도면 살인죄 적용도 오히려 약하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