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해서 연탄을 ‘구멍탄’이고도 했다.
초창기에는 구멍이 없었다. 그러다 화력을 키우기 위해 하나씩 구멍을 뚫게 됐고 구멍 수에 따라 구공탄, 십구공탄, 이십이공탄, 삼십이공탄 등의 이름을 붙였다.
연탄은 1960년대부터는 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생활필수품으로 여겼다. 식당, 사무실, 학교 등의 난로용으로도 인기였다. 연탄은 장점이 많았다. 우선 가벼워 운반하기 좋았다. 또 보관하기도 편했다. 불이 꺼져도 다시 빠르게 붙일 수 있는데다 탄을 갈기도 쉬웠다. 서민물가 비표에 속해 가격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어서 사기도 편했다.
1970년에 18원이던 연탄값도 70년대 말 85원까지 올랐으나 라면 한 봉지 가격을 넘지 않았다. 요즘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500~600원에 묶여 있다. 대신 정부가 한 해 2천억원 안팎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도시연료이자 국민연료가 된 가장 큰 이유는 가격보다 적은 비용으로 취사는 물론 난방에 목욕물까지 제공하는 에너지 효율성이었다.
연탄은 겨울을 따뜻하게 나게 도와주는 친구만은 아니었다. 온기를 주는 대신 ‘소리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 가스사고가 피크를 이룬 70년대에 한해 3천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하니 지금으로선 상상이 가질 않는다.
연탄소비량은 1980년대 중반까지 급격하게 늘어 해마다 품귀와 사재기 파동을 빚을 정도였다. 83년 전국 830만 가구 중 연탄을 때는 집은 550만 가구였으니 파동의 정도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국민 연료’로 인기를 끌었던 연탄은 1988년 이후 가스·석유에 밀려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아직도 연탄이 필요한 곳이 많다. 특히 혼자 사는 노인 등 형편 어려운 가구가 여전히 연탄에 기대어 겨울을 난다. 광해관리공단이 무료로 지원하는 ‘연탄쿠폰’ 대상만 8만가구 이상이다. 자원봉사단체인 연탄은행전국협의회가 해마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기부를 받아 어려운 이들에게 전달하는 연탄도 300여만 장에 이른다.
그러나 홀몸노인 등 소외계층에 연탄을 공급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집은 16만 8천여 가구, 3년 전에 비해 오히려 6% 늘었으나 연탄은행에 지금까지 들어온 후원은 지난해에 비해 50% 이상 줄었다고 한다. 더 추워지기 전 연탄 보내기 운동이라도 벌였으면 좋겠다.
/정준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