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한번 즈음 잡아 본 사람들은 칼에 대한 로망이 있다. 큰 칼을 멋지게 뽑아 시원하게 뭔가를 싹뚝 잘라버리는 환상이다. 옛말에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한번 베어야 한다는 말처럼 칼을 쥐면 멋지게 휘둘러 보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칼에 환상은 딱 거기까지다. 실전에서는 어떠한 고수라도 큰 칼질 한번으로 상대를 두 동강 내버릴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동작이 크면 클수록 공백이 생겨 방어 취약하기에 쉽게 움직임을 만들 수 없다.
역시 다른 맨손 무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자신의 발차기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영화처럼 하늘을 가르는 멋진 상단발질 한번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주먹 역시 한방에 상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크게 휘두르는 형태는 무모한 움직임인 것이다. 작은 주먹, 짧은 주먹, 작은 발질, 짧은 발질을 교묘하게 섞어 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큰 한방을 뻗어 내는 것이다.
검법에서는 크게 한칼을 베는 것을 씻어낸다라고 하여 세법(洗法)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말로는 베기라고 부르며 짚단이나 대나무를 대체물로 활용하여 베기법을 연습하곤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세법 즉 베기는 동작은 크고 멋있지만, 말 그대로 화려한 모양 만들기에 가깝다. 작거나 짧은 움직임을 검법에서는 격법(擊法)이나 타법(打法) 혹은 압법(壓法)이나 접법(接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크게 베기 위해서는 작은 움직임인 격법이나 타법 혹은 접법 등을 적절하게 배치해야만 제대로된 타이밍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시대에도 마찬가지지만 전투에 투입된 군사는 반드시 방호구를 입게 된다. 갑옷이다. 단단한 철을 비롯해서 쉽게 적의 창칼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짐승가죽이나 여려 겹의 옷감을 덧대어 활용하기에 이를 뚫고 단 칼에 적을 두동강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겨울 외투정도를 짚단에 덮어 씌워놓고 아무런 제약없이 움직임 없는 물체를 향하여 크게 한칼을 내려 베도 결코 단번에 두 동강 나지 않는다. 드라마 사극에서처럼 주인공이 상대 적군을 지나가기만 하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뻥이다’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전통시대에 전투현장에서 칼을 쓴다는 것은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일이었다. 내 목숨이 귀한 만큼 상대의 목숨도 귀한 법이라 상대도 실력이 있건 없건 간에 전력을 다하여 공방을 만들기에 단번에 목숨을 내어 주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술 수련에서 크게 베는 기법 뿐만 아니라 작게 치거나 짧게 때리는 기술뿐만 아니라 상대와 밀착한 상태에서 칼을 상대의 몸에 붙이고 눌러 내리거나 긁어내리는 기술 등 다양한 기술들을 섭렵해야만 제대로 된 한칼을 풀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검술 수련에 다양한 움직임의 칼 수련이 병행되는 것이다. 크고 넓은 수련 폭을 가져야만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련은 ‘바다’이기도 하다.
큰 강물만 바다로 가는 것은 아니다. 좁은 논두렁 물도, 시원한 계곡물도 모두 모여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다는 이 물 저 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받아’줄 수 있기에 ‘바다’가 되는 것이다. ‘바다’가 ‘바다’가 된 결정적 이유는 가장 낮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세상 가장 낮은 물이 바닷물인 셈이다. 유학에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사단(四端)의 근본은 낮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곧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낮춤을 한번 더 고민하고 풀어 낼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원칙은 자신의 그릇을 제대로 채워낼 때 빛을 바라는 것이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근본과 원칙에 충실할 때 힘을 받는 것이다. 칼을 잡고 수련하는 마음 역시 이러한 ‘바다’의 마음을 이해하고 풀어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한칼이 만들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