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인 15일 오후 5시 수원시청 앞 88올림픽 공원에서는 매우 뜻 깊은 행사가 벌어졌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항일독립투사 필동 임면수 선생의 고귀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한 동상제막식이 열린 것이다. 임면수 선생은 수원에서 태어나 삼일학교 설립 등 교육활동과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활동 등을 했으며 나라를 찾기 위해 1912년 2월 엄동설한에 어린자녀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삼일여학교(현 매향중·고)부지와 집터를 기부하기도 했다.
만주에서는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군자금 조달 등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부인 전현석 여사는 만주에서 객줏집을 운영했다. 이 집은 독립군의 중계연락소, 휴식처, 무기보급소, 작전회의장으로 사용됐는데 전여사는 하루에 5~6끼의 밥을 지어 독립군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줬으며 새벽까지 이들의 헤어진 옷을 꿰매고 세탁해줬다. ‘독립군치고 전 여사의 밥을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필동 선생은 1921년 왜경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반신불수가 됐고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장남도 20세에 독립운동에 가담, 1919년 3·1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돌아가던 중 동사했다. 이처럼 조국 독립을 위해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과 그 가족,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어렵게 살고 있는 후손들을 잊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선생의 동상이 건립된 것은 그래서 다행스럽다.
그런데 동상이 건립된 같은 장소에 친일파로 낙인찍힌 홍난파 동상이 있다. 또 이 공원엔 일제강점기 강제 위안부를 기억하기 평화의 소녀상도 지난해 세워졌다. 참 아이러니하다. 일부에선 홍난파의 친일행위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생계형’이고 우리나라 음악사에 남긴 공로가 크다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그의 친일 행적은 뚜렷하다. 친일 관변단체 조선문예회 참여, ‘공군의 노래’ 등을 비롯한 친일가요 발표, 일본 제2국가로 불리는 ‘애국행진곡’을 지휘한 친일파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할 것을 자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란 글도 발표했다. 홍난파 동상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지역이 낳은 천재적 음악가인 것이 틀림없는 만큼 다른 장소로 이전하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