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책-하멜서신
/신덕룡
저녁나절에 봄비가 왔다.
자자하니 비꽃들 피고
온 동네 길바닥들은 혀를 길게 빼물고 쩝쩝거렸다.
대책 없이 누워 있던
새카맣게 속이 타들어가던 어린모들도 겨우 눈을 떴다.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으면
어디든 뿌리를 내리면 같은 하늘과 땅 아니겠냐는
따뜻한 실낱 같은 위로였다.
당분간 묘책이 없어도 좋겠다.
‘하멜’을 기억하시는가.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이래 약 13년 동안 조선 땅에서 살다가 탈출하여 ‘하멜 표류기’를 쓴 네덜란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7년 동안 강진 병영성에 살던 기록을 토대로 한 시집이 최근에 나왔다. 이른바 ‘하멜서신’이다. 이는 당시 이국땅에서 억류 생활하던 하멜의 처지에 시인 자신의 쓸쓸하고 막막한 내면세계를 겹쳐서 보여주는 매우 희귀하고 감동적인 시집이다. 위의 시에도 그러한 처지와 내면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대책 없이 누워 있던’ 대지가 ‘봄비’로 하여 ‘따뜻한 실낱 같은 위로’가 되어 ‘묘책’을 잊게 한다. 특히 ‘자자하니 비꽃들 피고… 혀를 길게 빼물고 쩝쩝거렸다’ 같은 감각적 표현들은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김선태 시인·목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