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묻지도 않은 말에 먼저 답을 하셨다. 이번 일요일에 아드님이 오셔서 할머니를 모셔갈 것이라고 하셨다. 멀지 않은 곳에 혼자 지내시는 동생이 같이 사시자고 해도 아들에게로 가셔야 한다고 끝내 고집을 세우셔서 어쩔 수 없다고 혀를 차신다. 삼 십여 년을 사시던 집이 팔리고 세입자들이 하나 둘 떠난 빈 집에서 지내셨다. 가끔 동생이 오셔서 며칠 머무시다 가시곤 하셨으나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는 빈자리가 마음에 커다란 흑점처럼 남았다. 할머니께서는 아들이 모시러 올 날을 기다리셨다. 새벽부터 밤이 깊도록 할머니는 낡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시며 빈 박스나 고물을 주워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셨다. 어느 때는 식사를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몇 번을 묻기도 하시고 아무때나 시장하시다는 말씀도 하시며 허전해 하신다. 무슨 우편물이 오면 우리 집으로 가지고 오셔서 내용을 물으시고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고 하시며 돌아서시는 할머니에게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를 본다.
처음부터 할머니는 범상치 않은 분이었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말투에서나 걸음걸이까지도 평범하게 남편 그늘에서 자식 기르며 손끝으로 쪼개며 살림살이를 해오신 분이 아닌 여장부의 기개가 느껴졌다. 무엇하나 거칠 것이 없는 그 할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장군할머니 또는 부자할머니라 불렀다. 누군가 속상한 말이라도 섞이면 그럴 땐 이렇게 해라 저렇게 대처해라 하시며 명쾌한 답을 주시면 막혔던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장부의 모습을 간직한 할머니도 깊은 그늘을 숨기고 계셨다. 양반집이라고 시집을 오니 여우짓으로 낙을 삼는 소실시어머니에 새색시보다 나이가 많은 전실 아들까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기개와 인내로 버티며 시집살이를 견디고 사셨다. 가부장적인 집에서는 그 많은 재산을 전실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시골 장터에 있는 낡은 집 한 채가 할머니 차지였다. 아들딸이 장성하면서 허리를 피나 싶었지만 막내딸이 결혼 실패에 따른 우울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로 먼저 떠났다. 할머니는 몸과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낡은 유모차를 끌기 시작했다. 방안에 계시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무때나 길을 나서게 되셨고 새벽바람은 점점 노쇠해가는 할머니의 건강을 무서운 속도로 갉아먹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할머니의 유모차가 거리를 돌고 우리 집을 찾아오시는 횟수도 늘었다. 아들딸이 통화가 안 되는데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다. 드디어 집이 팔렸다는 소문을 확인하기에 이르렀고 극도의 불안을 보이셨다. 팔린 집 잔금을 받는 날까지 할머니는 빈 집에서 혼자 지내셨다. 일요일이면 찾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다 평일에도 착각을 하시고 성화를 하시는 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었고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새벽에 누가 문을 두드리기에 누구냐고 하니 그대로 가버렸다고 하시며 텅 빈 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신 다음날 오후 할머니의 짐을 싣는 아들과 손자의 모습이 잠시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헌 유모차만 길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떠나시는 할머니께 인사도 못 드려 서운하지만 낯선 곳에서 쓸쓸하지나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