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창덕궁 후원에서 아름다운 전경 10곳을 뽑아 시를 남겼는데, 7경이 청심정(淸心亭)으로 청심 제월(淸心霽月)을 지었다.
이 마음과 밤기운 중 누가 더 맑은가(心將夜氣較誰淸)/ 동녘 숲에서 달이 나옴을 때마침 만났으니(却會東林霽月生)/ 청심정의 구석도 모두 대낮 같아서(堂奧蔽幽皆似晝)/ 온 천하가 바로 밝음을 같이하노라(一天之下定同明)
청심정의 이름처럼 맑은 마음으로 정조가 느낀 감정을 생각해 본다. 어느 가을밤 공기가 선선한 때 청심정에 앉아서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자, 청심정의 내부까지 밝아지는 것이 마치 성인이 정치를 잘하여 세상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고 정조는 비유하고 있다.
청심정은 ‘궁궐지’에 의하면 ‘펌우사의 북쪽에 위치하고 남쪽에는 태청문(太淸門)이 있으며 숙종 14년(1688)에 천수정(淺愁亭)의 옛터에 건축하였고, 남쪽에는 연못을 파서 빙옥지(氷玉池)라 하였고 동쪽에는 협곡수가 있는데 홍예교를 놓아 통로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현재 청심정의 위치는 존덕정의 뒤편에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주변 시설들은 변화가 많이 보인다.
‘동궐도’와 비교해 보면, 우선 정자 앞에 있는 태청문과 담장 및 대형 괴석 등은 보이지 않으며, 대신 울창해진 나무가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어 존덕정에서 진입할 수 없다. 청심정으로 가는 길은 연경당 뒤편 길만 있을 뿐이며, ‘궁궐지’에서 나오는 동쪽에 있던 홍예교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건축적인 면에서, 크기는 사방 1칸으로 한 변이 8.5자이며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중앙에는 절병통이 놓여 있다. 벽은 창호 없이 모든 면이 개방되어 있고, 정면 출입구만 난간이 없고 나머지는 평난간이 기둥 선에 따라 설치되어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건물 자체는 옛 자료와 비해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아 잘 보존되고 있는 듯하다.
조경적인 면에서는 정자의 앞에는 큰 돌을 파서 만든 작은 연못인 빙옥지가 있고 그 앞에는 동물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동물상은 벽사 시설로 ‘동궐도’에서도 있는데 지금도 청심정을 향해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생김새는 거북이 모양이나 머리는 용(龍)으로 보인다.
이 거북이의 등에는 숙종이 쓴 ‘氷玉池(빙옥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빙자옥질(氷姿玉質)의 줄인 말로, 얼음같이 투명한 모습과 옥과 같이 뛰어난 바탕의 뜻으로 청심정과 어울리는 글이다.
보통 연못은 자연 상태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여기서는 큰 돌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 돌을 캐고 또 운반해야 하는데 이렇게 큰 돌을 운반하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많은 공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왜 이렇게 큰 돌로 연못을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못에 물이 차 있으려면 물이 새어나가지 않게 방수를 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고 또 금방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인지는 작은 연못 자체를 돌확으로 만들어나 본다. 그리고 거북이가 청심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거북이의 모양이 비석의 하부에 있는 귀부(龜趺·하부 받침돌)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귀부는 당나라에서 시작되어 이후 모두 시대에 거쳐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661년에 만들어진 태종무열왕릉비인데 입을 다문 전형적인 거북이나 8세기부터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어 추상적인 형태가 되고 이 형태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거북이의 의미는 장수를 의미하고 물과 육지를 오가므로 신선 및 도사 등을 의미한다. 아마 빙옥지의 거북이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그리고 거북이의 등에 쓴 ‘氷玉池’란 글씨는 인조의 것이라고 주장이 있으나, 청심정은 숙종이 세운 것이고 글씨체를 살펴봐도 인조보다는 숙종의 글씨에 가깝다.
근대기에 만들어진 ‘동궐도형’에는 태청문과 담장 등의 주변 시설은 없어도 존덕정 구역에서 진입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은 존덕정과 연계가 되어 있지 않고 진입 또한 불가능하고 청심정의 출입은 다른 영역에 있는 연경당과 연결되어 있다.
문화재 관리에 있어 건물의 원형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도 이에 못지않기에 청심정을 존덕정과 연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