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계천 빈민촌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71년 여름부터였다. 그때 내 나이 30세로 빈민선교에 아무런 경험 없이 몸으로 부딪쳐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먼저 실업자로 빈둥빈둥 놀고 있는 마을의 실업청년들을 모아 뚝섬지역 공장지대와 주택가를 돌며, 밤사이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를 뒤져 쓸 만한 물건들을 모아 저녁나절 분류하여 고물상에 넘기는 일이 주업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니 차츰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대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런 대학생들로 교사 팀을 짜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마을 아이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세웠다. 학교 이름이 배달학당(倍達學堂)이었다. 배달학당이란 이름은 배달민족에서 딴 이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정구라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학생이 찾아왔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데모를 주동하다 제적당한 신분이었다. 정직하고 유능하고 지도력이 뛰어나기에, 배달학당의 교감을 맡겼다. 그가 책임을 맡은 뒤로는 조직이 활성화되고 두드러지게 발전하였다.
그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기독교가 제국주의 앞잡이요 민중의 아편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주장하기에, 내가 미소 지으며 일리 있는 주장이라 수긍하고, “그러나 자네도 지식인이니 예수의 가르침 자체와 타락한 인간들이 이끄는 교회의 변질된 행위를 구별하는 분별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정도로 일러 주었다.
그런데 반 년 정도 지난 어느 날 그가 느닷없이 세례 받겠노라 하였다. 내가 웃으며 “왜 제국주의 앞잡이가 되려느냐?” 하였더니 “형님, 그 말을 아직 기억하세요? 내가 세례 받겠다는 건 진심입니다” 하기에, 그의 신앙고백을 확인한 후 세례를 베풀었다. 나로서는 큰 보람이었다. 반기독교도였던 운동권 중심인물이 세례까지 받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제정구가 하늘나라로 옮겨 간지도 여러 해 지났건만 아직도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이 나빠져 가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착잡한 마음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