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워도 너무 덥다. 여름은 더워야 맛이라지만 고통의 연속이다. 무지근하니 냉방에 따른 두통도 가실 날이 없다. 그래도 에어컨 빵빵 트는 카페를 찾는 사정들이 있다. 혼자 에어컨 켜는 것은 전력 낭비고 지구에게도 좀 미안하다. 하지만 치솟는 불쾌지수는 좀 다스려야 살겠으니 시원한 카페를 찾는 것이다.
그런저런 까닭으로 요즘 카페는 무척 북적댄다. 젊은이들이 몰리는 카페일수록 일찌감치 나와 자리 잡은 손님으로 오붓이 빈자리 찾기가 어렵다. 노트북 펴고 본격적으로 공부에 돌입하거나 몇 시간쯤 죽치고 갈 요량으로 책 펴드는 피서족이 늘기 때문이다. 공부며 회의용 탁자까지 갖춰놓아 모임 장소로 진화한 요즘 카페의 사용법을 잘 활용하는 셈이다. 그렇게 덥다는 핑계는 없던 모임도 엮어 나오게 만드는 판이니 카페에 마냥 앉아 즐기는 피서족이 붐빌 수밖에 없다.
시집 하나 들고 조명 밝은 자리에 앉는다. 아직 익숙지 않아 신경이 자꾸 흩어지며 몰입이 늦다. 실은 커피 갈아대는 소리에 주문 주고받는 소리, 사람들 오가는 발소리 등 카페 자체의 소리도 소음 수준이다. 물론 큰소리로 얘기하거나 간혹 데리고 나온 아이들 떠드는 소리까지 합하면 손님들이 내는 소음은 천장이 울릴 만큼 왕왕거린다. 그럼에도 카페의 소음은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나왔으니 날로 새로워지는 풍속에 나름 적응 중이다. 마음만 잘 가라앉히면 어디든 다 고요한 절간 아니냐고 자신을 쥐어박으며 말이다.
그렇게 푸릇푸릇한 청춘들 속에 혼자 오래 앉아 있기에 신경이 조금씩 쓰일 때도 있다. 그래서 좀 더 아담한 동네 카페로 옮겨 편안한 구석에 자리를 잡아본다. 그런데 호젓하리라는 짐작으로 찾아든 곳이 또 다른 소음에 휩싸일 적이 왕왕 있다. 일전에는 아이스커피를 놓고 주섬주섬 떠드는 중년 남자 둘을 견뎌야 했다. 주변 개의치 않는 말소리쯤은 대화법이거니 참는데, 너무 큰 소리인 데다 빨대로 커피 빨아들이는 소리까지 겹쳐 걷잡을 수 없는 소음이 되는 것이다. 그들 역시 시원한 데 찾아 쉬러 왔을 테니 내 귀를 막자고 뾰족해지는 마음을 다스리지만 얼음이 녹을 때마다 강도를 높여가는 빨대 빠는 소리는 고역이다. 그들이 나간 뒤에야 간신히 책에 코를 박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웬 공치는 얘기가 시골 장터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노년에 접어든 부부 두 쌍이 어느새 가운데 자리를 잡고는 ‘꼴프, 꼴프’로 겨우 되찾은 고요를 마구 쳐대는 것이다. 아, 조금만 작게 얘기해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이건 순전히 소심한 손님의 속말에 불과하이니 인내가 살길이라고 꾹꾹 누른다. 다 같은 손님인데 목소리 크기를 조금만 줄여달라고 어떻게 감히 청할 것인가. 손님이 왕인데 다른 손님의 청이라고 주인은 또 그 말을 어찌 전할 것인가. 벼락이 쳐도 몰입하는 경지에 못 이른 수양 부족을 탓하며 한숨이나 푹푹 쉴 뿐이다. 결국 피서 독서를 접고 뜨거운 태양 속으로 퍽퍽 행군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큰 목소리의 안하무인은 카페건 식당이건 도처에서 마주치는 무례의 소음이다. 배려라곤 기른 바 없는 큰 목소리들이 높이는 공공장소의 소음 불쾌지수. 남녀노소가 있을까 싶지만 대부분의 큰 소리 소음은 묵직해진 뱃살들에서 더 많이 우렁차게 나온다. 젊은이들 몰리는 카페의 소음은 ‘하얀 거짓말’처럼 해롭지 않아 하얀 소음이라는데, 그럼 중년 이상의 무차별 폭격 같은 큰 목소리 소음은 무엇이라 부를까.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다 듣게 만드는 큰 소리 통화 역시 갈수록 괴로운 소음이라 더러 싸움까지 부르지만 쉬 사라지지 않는다.
소음에도 세대 차이 운운하면 좀 씁쓸하다. 하지만 젊은 카페의 하얀 소음과 다른 무신경과 무례에서 비롯된 소음은 더 괴롭다. 그래서 눈치 좀 보여도 하얀 소음을 찾아 나선다. 찜통 여름 나기 좋은 게 카페 독서 피서려니 하얀 소음과도 더 친해져야겠다. 하얀 소음과의 한 철이 한 권의 책이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