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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졍윤희의 미술이야기]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예술의 아이러니

 

카타콤의 벽화는 그 전 시대의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에 비하면 단순한 형태이고 때로는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곤 한다. 성경의 한 장면을 담고 있었고, 로마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이전,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시절부터 그려졌다.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프리스킬라 지하 묘지의 벽화에는 불길에 던져진 세 사람이 그려져 있다. 세부묘사가 전혀 없고 몇 번의 붓터치로 완성되었기에 누구든 몇 번 연습을 하고 나면 그릴 수 있을 법하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금으로 만든 신상(神像)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유대인들을 불길 속에 던져버렸지만 이들은 불타지 않았고 상하지도 않은 채 두 손을 벌리고 신을 경배하고 있다. 순교자들이 그토록 많았는데 오래전 행해졌다는 이 기적은 어찌된 영문일까.

카타콤의 벽화를 그린 이들은 로마 예술의 주 무대에서 활동하던 전문 장인들도 아니었거니와 그림을 통해 조형미를 추구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성경 한 구절의 내용과 그 내용이 담고 있는 단편적인 인상을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우리로서는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들은 당시 세기말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 인류가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쳐 오랫동안 성취해온 예술적 업적보다 지금 당장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강렬함이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박해받고 있는 처지에서 신전을 세우는 일도 위대한 예술로 신을 경외하는 일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곧 예수의 재림이 도래할 터였다. 그로부터 유구한 세월이 흐르리라는 것을, 또 단지 몇 세기만 지나면 유럽 대륙이 신의 성전으로 뒤덮이고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예술이 행해지리는 것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카라바조는 17세기 이태리에서 교황과 추기경의 비호를 받으며 활동했다. 1602년 혹은 1603년에 제작된 ‘의심하는 성 도마’는 사실 끔찍해 보일 수도 있는 작품이다. 어두운 화면에서 예수의 몸과 도포는 극명하게 빛나고 있고 제자 도마는 이마에 주름이 잔뜩 지도록 힘주어 예수의 옆구리 환부로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의 몸은 온전히 회복된 듯 깨끗했고 환부에서도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지만 환부는 아직 손가락 두세 개는 족히 깊이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다. 카라바조는 드라마틱한 빛의 대조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극의 절정과 같은 강렬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것은 당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때로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악명 높은 끔찍한 범죄인기도 했던 카라바조였기에 가능한 작품들이었다.

카라바조는 종잡을 수 없이 감정이 격해지곤 했고 항상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니며 언제라도 시비가 붙으면 공격할 태세를 갖춘 이였다. 당연히 싸움을 일삼았고 그의 짧은 인생에서는 감금과 사면, 추방과 탈옥이 반복되었다. 급기야는 살인을 저질렀고 이 역시 사면이 되었지만 결국 도피생활 중 39세에 생을 마감했다. 1605년 혹은 1606년에 완성된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에서 어린 다비드가 들고 있는 목 잘린 골리앗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죽는 순간 뭔가에 애쓰고 있는 듯 이글어진 표정 역시 충격적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살해당한 인물 혹은 누군가를 살해하는 인물로 등장하곤 한다.

참형을 당하고도 족했을 인물이었지만 끊이지 않고 작품의뢰를 받았으며, 생전에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만한 명성을 얻었다. 그랬기 때문에 쉬지 않고 범죄를 저질렀고 심지어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면을 얻었다. 심지어 도피와 추방생활 중에도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교회는 그의 작품이 신도들에게 미치는 파급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교회권력은 이미 절정기를 지나 한풀 꺾여 있었고, 교회와 수도사들이 장악했던 예술과 지식은 이제 대중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공유되었으며, 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신도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을 수 없었다. 이태리인들은 고대의 문화적 명성을 되찾았다는 자부심에 한껏 고취되어 있었던 한편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때 신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성경 속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매우 신중했던 교회는 이제 예술가로 하여금 코앞에 연극의 무대를 마주하는 듯한 생동을 연출하도록 한다. 카라바조의 험난한 인생은 교회권력의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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