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책을 읽던 중 우연히 생태발자국지표에 관한 내용을 읽고, 관심이 있어 소개해 본다. 생태발자국지표란 개인이나 집단이 소비하는 모든 자원을 생산하고 배출하는데 필요한 폐기물과 생산적인 토지 및 수자원의 양을 측정한 다음, 그 자원을 다시 재생산하고 폐기물을 흡수하는데 이용 가능한 면적의 양을 의미하는 생태용양(biocapacity)과 비교한 수치를 말한다. 1961년 인간의 생태발자국은 지구생태용량인 120억 글로벌 헥타르의 절반정도인 60억 글로벌 헥타르 였으나, 2008년의 세계인구 67억 명의 생태발자국을 측정한 결과는 182억 글로벌 헥타르로, 지구의 기본용량보다 62억 글로벌 헥타르를 더 많이 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은 지구가 재활용되고 충전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지구의 생태용량을 소비하고 있다는 의미다. 인간이 지구의 자원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하는 월드워치연구소(World Watch Institute)의 설립자, 레스터 브라운(Lester R. Broun)은 “각 개인과 인류 전체의 건강과 행복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생태계 자원을 지속적으로 보충할 수 있는 생물권능력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만일 전 세계인들이 미국 사람의 식단(食單)을 기준으로 생활한다면, 미국인들은 1인당 1년에 800㎏의 곡물을 섭취하므로, 연 120억 글로벌 헥타르에 달하는 세계 곡물수확량으로는 25억 명밖에 먹여 살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1인당 1년 곡물섭취량이 400㎏인 이탈리아/지중해식 식단을 기준으로 삼으면, 현재 연 세계 곡물수확량으로 50억 명을 살릴 수 있으며, 연 200㎏의 곡물을 섭취하는 인도식 식단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최대 100억 명까지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생태발자국이라는 개념이 생물권의 수용능력에 미치는 인류의 측정기준을 정확히 제공해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만으로 바로잡기는 매우 어렵다. 즉 현대와 같은 물질주의시대의 광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유물과 서비스란 그 사람의 인격과 정체성을 향상시켜주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존경스럽게 보이도록 한다고 유혹함으로써 인류의 허영심을 무한히 자극하고 있다. 근대 독일의 철학자 헤겔도 자본주의정신의 여명기에 “인간의 인격(人格)은 그 사람의 모든 소유물과 공존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소유물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으로 그 사람의 모든 소유물은 그 사람의 독특한 존재감과 영향력을 확대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는 수단이 된다.”고 함으로써 물질주의속성을 암시하였다. 현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도 극도로 물질주의적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혼합해서 전체를 그 사람이라고 느끼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자아(自我)는 그 사람의 신체나 정신력뿐 아니라 소유물은 물론 가족과 조상, 친구들과 평판 등의 총합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그 사람에게 동일한 감정을 부여한다. 따라서 그런 것들이 번창하면 승리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줄어들거나 쇠퇴하면 의기소침해진다”고 했다. 리차드 레야드(Richard Layard)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 사회의 행복수준은 그 집단의 소득불균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면서, 개인의 행복수준도 연평균 안락수준인 2만 달러 정도가 될 때까지는 커지다가 그 수준을 지나면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수준의 한계효용은 줄어든다고 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만족을 모르는 무한한 물질적 갈망이 아니라 사회성에 대한 추구에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즉 인간이란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어디엔가 관계를 맺고, 사랑과 인간애를 발산해야만 행복하게 된다고 한다. 만연하는 물질주의는 사람들을 무한히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타인을 불신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소외감과 두려움 등을 더욱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비록 빈곤이 절망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부(富)가 달성되고 나면 재산이 늘어나도 절망의 비율은 똑같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져 극단적인 물질주의도 서서히 꼬리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