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창덕궁 후원에서 아름다운 열 곳을 뽑아 시를 남겼는데, 그 중 8경은 관덕정(觀德亭)에 관한 것으로, 관덕 풍림(觀德楓林)을 지었다.
과녁판이 울릴 때면 화살이 정곡을 맞히는데(畵鵠鳴時箭中心)/ 구름과 안개로 장막이 선경 숲을 에워쌌네(雲霞步障擁仙林)/ 삼청동(신선이 사는 곳)의 물색은 원래부터 이러하기에(三淸物色元如許)/ 제군과 함께 즐기고 취하기를 금치 않노라(樂與諸君醉不禁)
관덕(觀德)이란 유교 경전 ‘예기(禮記)’ 사의(射義)편에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유래하였듯이 이곳은 활을 쏘는 장소와 관계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옛날 사람들은 활을 쏘는 것을 단순히 무술로만 생각하지 않고, 인(仁)을 행하는 수행으로 생각하였다. 무인뿐 아니라 문인들도 활을 쏘는 것을 즐거이 하였기에 여러 지역에도 관덕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많았다.
관덕 풍림에서 정조는 단풍나무 숲에 있는 관덕정에서 활 쏘는 연습을 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는데, 마침 안개가 피어오르고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 색과 어울러 신선이 사는 삼청동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조는 훈련하던 군인에게 오늘 같은 날에는 함께 술을 먹고 즐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노래하였다.
‘궁궐지’에 의하면 ‘관덕정은 영화당의 동쪽 장원봉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잠단(蠶壇)이 있는데 바로 성종 3년(1472)에 채상단(採桑壇)을 옛터에 짓고 공혜왕후는 항상 이곳에서 잠례를 행했다. 인조 20년(1642)에 세워졌는데 이름은 취미정(翠微亭)이었다. 현종 5년(1664)에 개수하고 이름을 관덕정으로 고쳤다’라고 적고 있다.
장소의 역사
조선전기는 누에를 처음으로 치기 시작한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잠단의 자리로 성종도 이곳에 채상단을 중건하고 공혜왕후(한명회의 막내딸)가 이곳에서 잠례를 치렀던 곳으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궁궐과 같이 소실되었다고 본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광해군은 동궐의 많은 부분을 복원했으나, 경제적 여건으로 이곳까지는 복원을 하지 못하고 인조시기에 이르러 ‘청록빛 산의 색’이라는 뜻의 ‘취미정’을 이곳에 중건하게 되었다.
인조가 채상단 터에 잠단과 관계없는 ‘취미정’이란 정자를 지은 것은 이곳이 뽕나무와 잠단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관덕정은 활을 쏘는 장소인가
현종이 관덕정으로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인 취미정(청록빛의 색)은 당시 그 곳이 활터라기보다는 경관을 즐기는 장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 편에 ‘관덕정은 춘당대 동북쪽에 있으며 곧 사정(射亭)이다’라 하여 이곳이 휴게공간에서 군사훈련 공간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변하게 된 이유는 언덕 아래에 있는 춘당대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춘당대는 과거시험의 초시, 복시, 전시 중 마지막 단계인 대과인 전시를 치루는 장소로 네모형태의 넓은 마당(60m×60m) 이였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의하면 무과시험에서 과녁의 거리는 100보(약 120m)가 되어 시험장은 춘당대만으로는 좁아 그 옆의 연못을 넘는 곳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대과의 문과시험은 춘당대 영역만으로 충분하여 영화당을 주관하는 건물로 사용하였지만, 무과시험은 영역이 넓어져서 이곳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여 영화당의 건너편 언덕에 있던 취미정을 고쳐 사용하였다고 본다.
관덕정은 사정(射亭)은 맞지만 위치상 높은 곳에 있어 활을 쏘는 장소라기보다는 무과시험을 관장하거나, 궁궐 수비군의 훈련을 사열하는 장소였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