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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천천히는 천천히

 

“허허, 뛰지 마세요.”

“이곳에서는 뛰는 거 아니에요. 그냥 천천히 오세요.”

순환버스 기사 아저씨의 묵직한 목소리에 달려오던 아저씨도 겸연쩍게 웃으시며 천천히 걸어오신다. 슬로우시티라는 닉네임을 달고 있는 섬 청산도. 섬에 도착하자마자 순환버스 티켓을 구입한 나는 버스가 멈춰서는 곳곳에 내려 천천히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처음 섬이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한 그 ‘천천히’의 의미를 음미해보고 싶었다.

도청항 뒤로 하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오르자 애잔한 진도아리랑이 출렁거린다.

‘사람이 살면은 몇 백 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 서린 목청을 돋을 수는 없었지만 걷는 내내 어깨춤을 들썩이며 진도아리랑에 취하고 말았다. 저만큼 바다에서 한 발 한 발 걸어 나왔을 게 몇 마리조차 풀숲 그늘에 숨어 덩달아 기우뚱거리니 바람 더불어 이보다 더 멋진 춤판이 있을까 했다.

온갖 서러움 다 풀어냈을 그 옛날 노랫가락을 거쳐 소나무 한 그루 곁에 세우고 8월 찌는 더위에 숙명인 듯 땀 흘리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 봉분 하나를 발견했다. 초분이라고 했다. 이곳에만 있는 독특한 장례문화로 상주가 다녀가면 그 표시로 소나무 가지를 꺾어 놓았었다는 내가 본 초분은 모형이 아니라 2년 쯤 된 실제 초분이라고 했다. 일종의 풀 무덤으로 시신이나 관을 땅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두었다가 3~5년 후 남은 뼈를 씻어 땅에 묻는 무덤이라고 했다. 상주가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갑자기 상을 당하면 돌아온 상주 얼마나 서러울까, 아들 못보고 떠나는 그 부모 또 얼마나 서러울까 행해진 가묘. 고즈넉이 침묵 중에 엎드려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무덤으로 가기 전의 초분이라니. 이 섬에서는 죽음조차 급하지 않았다 생각하니 아등바등 촌각을 다투며 살아온 내가 또 한 번 작아지는 듯 했다.

“빵빵- , 빵 빵 빵 빵- ”

순환버스 냉기에 더위 한 번 식히고 쉬엄쉬엄 범바위 오르는 길, 느닷없이 울려대는 요란한 산 중 자동차 경적소리에 어린 손자 앞세우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꽃이 난무하던 노부부가 고함을 지르셨다.

“뭐하노? 이런 산에 차갖고 온 것도 무례한데 그거 하나 양보 몬하나?”

“웬만하면 걸어오지. 뭐가 그리 급해서 저래 난리고?”

좁은 산길 서로 양보 못하겠다며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몇 대 자동차, 한 사람이 내려 양쪽 오가며 중재를 한 끝에야 엉킨 실 풀리듯 풀어져 갔다. 무엇이 그들의 여유를 다 가져갔는지, 마치 내 모습 보는 것 같아 붉어진 양 볼을 범바위는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돌담마을 지나 먹어본 까만 군소 점점이 박힌 파전, 주인아주머니 참외밭에서 직접 따준 꿀맛 같은 못난이 참외, 동네아낙들과 평상마루에서 들어본 버릇없는 요즘 것들 이야기까지. 그 모두가 나에겐 아름다운 청산도로 남았다 ‘천천히’와 더불어. 언제부터인가 ‘천천히’의 여유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내안의 나’를 각인시켜준 소박한 섬. 마음이 바빠지고 ‘빨리빨리’가 나를 쿡, 쿡 찌를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그런 그림 같은 섬, 청산도에서는 천천히라고 했다.

천천히는 진심으로 ‘천천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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