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통더위가 사라졌다. 식을 것 같지 않던 더위가 하늘이 마술이라도 하는 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절기는 못 속인다고 그 덥던 더위도 입추와 처서가 지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새벽녘이면 이불을 끌어 덮어야하고 일찍 일어나기도 살짝 싫어지기 시작했다.
8월 초에 심어야하는 김장배추와 무를 더위를 핑계로 미루다 일이주 미루어 심었는데 날씨가 별안간 싸늘해지니 올 김장이나 제대로 담글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아침저녁으로 시선은 텃밭인 채마밭으로 향하게 된다. 이른 아침에 들에 나서보면 완연한 가을이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백로 절기가 다가오니 논두렁을 결을 때면 바지 깃을 풀잎에 내려앉은 이슬이 촉촉이 적신다. 달포 전 수줍은 파릇한 미소로 얼굴을 내밀던 벼이삭도 어느새 제법 성숙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참 세월 빠르다. 모내기 준비로 바삐 뛰었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 추수를 할 때가 되었다. 가을 명절인 추석이 이달 15일이니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을인 것은 맞는데 왠지 풍성함을 느끼기보단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과 이렇게 올 한해도 다가는 구나 그러고 보면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한사람의 생애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칠팔십 백년에 세월도 별거 아니 구나 하는 허망한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모든 것들이 바삐 돌아가는 이유가 이해 될 듯도 하다. 변할 수 없는 법칙이 생과 멸이니 생과 멸 사이에 존재가 삶이고 삶이 생을 위하여 부단히 엮어감이 우리들의 일상이고 바쁨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난 젊은 시절에는 살생이란 화두를 붙들고 긴 시간을 고뇌한 흔적이 있다. 과연 살생이란 무엇일까? 살생이란 것에서 사람들은, 나는, 세상에 모든 것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살생하지 말라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끊임 없는 의구심은 어떻게 살아야 내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보다도 더 긴 시간을 생각의 늪에서 헤쳐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긴 이야기이지만 짧게 이야기 하면 무시무시한 살생이란 언어에 담겨있는 겸손과 희생을 나는 그때 알았다. 생명이 있는 세상에 모든 것들은 자기의 생명 연장을 위하여 또 다른 생명을 취하여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동물이건 식물이건 사람이라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음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에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물성 식품만이 생명을 내어 놓은 것이 아니라 곡류 채소마저도 자기들의 생명을 송두리째 내어 놓은 것이다. 마치 채식주의자를 자청하며 육식에 관하여 야만적이고 생명 경시 풍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 또한 큰 오류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나 빵도 후손을 남길 수 있는 유전인자를 모두 가지고 있는 생명체이나 타의에 의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 연장을 위하여 음식을 섭취할 때 조금은 겸손해야하고 그들의 희생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계절 탓인지는 모르나 봄내 여름내 돌봐 주었다고 환한 웃음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벼들을 보며 오히려 숙연해지는 마음에 논두렁에 서서 잠시 깊은 생각에 젖어들게 하는 것을 보면 계절이 확실히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