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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가짜 약사 없는 사회

 

집 거실에 달린 부엌 한편에는 조그마한 무허가 약국이 하나 있다. 그곳을 관리하는 무면허 약사도 한 명 있다. 다만 여기서 무허가, 무면허는 법률과는 상관없이 나 혼자 규정한 용어다. 부엌 싱크대 옆에는 각종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선반이 있다. 가스레인지를 얻어놓는 선반 위쪽 공간을 빼고 그 아래에 있는 세 칸의 서랍 중 두 칸에는 언제 조제했는지, 무슨 약으로 조제됐는지 알 수도 없는 약봉지로 가득 찼다. 봉투 속 약들의 유효기간은 아예 생각을 안 한 것이 오히려 속 편하다. 그곳이 문제의 무허가 약국이다.

우리 마누라는 4년의 터울 내에 있는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한꺼번에 키웠다. 엄마라는 굴레로 오로지 혼자서 양육을 감당하려면 억척스러움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엄마들과의 차별성을 고안해 내는 것은 필수였을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아이 셋 다 유난히 잔병치레도 많았고, 한 명이라도 감기 걸리면 기침 소리는 금세 3명의 합창으로 전환되기 일쑤였다. 그럴 경우 전에 먹다 남은 감기약은 응급 처방으로는 딱 제격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어져 3명에게 옮겨 붙으면 감당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한번은 약간의 지체로 열 기운이 전염되어 셋 다 동시에 입원한 적이 있다. 6인실 입원실의 절반, 즉 한쪽 면 전체를 우리 집 아이들이 일시에 점령하는 바람에 졸지에 핫 뉴스거리가 됐다.

남은 약이라도 얼른 먹였다면 셋까지는 입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마누라의 그런 후회는 무허가 약국을 개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약국이 번성하면서 무면허 약사의 엉터리 실력도 날로 신장됐다. 남은 약의 신선도(?) 유지 방법, 적정 투약량 등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다. DUR도 무시됐다. 감기약에서 각종 다른 약까지 시장이 다변화하면서 약국 규모도 비례해 커져갔다. 적용 대상자도 남편까지 확대되었다. 그때는 아이들이나 나도 감히 거부할 엄두를 못 냈다. 아무도 그 후환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요즘은 갈수록 우리 집 무허가 약국, 무면허 약사의 필요성이 시들해지고 있다. 엄마의 불호령에 끽소리 못하고 받아먹던 아이들도 성장하면서 절대 수용할 수 없는 부당한 명령이 됐고, 나의 거부 수준도 날로 강경해졌기 때문이다. 남은 약의 재사용은 거의 추억거리로만 존재한다. 그저 남은 약은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습관 때문에 약국 규모만 커질 뿐이다. 조만간 그 약국은 드립 커피 재료 보관 장소로 탈바꿈 할 예정이고, 약사도 가정주부 본연의 역할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올해 12월이면 심평원에 입사한 지 30년이 된다. 근무기간 중 가장 보람찬 일 한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가짜 약사를 색출해 정부 당국에 고발 조치한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의약분업 시행 초기 약사 인력DB 구축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다. 모든 요양기관에서 약사 개인별 인적사항을 제출받아 약사 인력DB 초안을 정말 어렵게 마련한 후, 나는 DB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 협조를 받아 면허DB 대조 작업을 추가했다. 인력DB 초안의 오류 보완은 물론이고, 정부 면허DB 오류 정비에도 상당 부분 기여했다. 결정적으로 약사 면허가 없음에도 오랫동안 약사 행세를 해 온 가짜 약사 1명을 색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제는 적어도 건강보험 영역 내에서 만큼은 면허증을 위·변조하여 활동하는 가짜 약사는 없을 것이다. 심평원은 항상 복지부 면허DB와 연계·조회하여 업무 처리하므로 금방 탄로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평소 먹다 남은 약을 혼자만의 결정으로 복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을 향한 잠재적 가짜 약사라고나 할까? 방송 매체 등을 이용, 약물 오·남용 피해의 심각성을 지속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고 유효기간과 관계없이 오래 묵히는 약들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먹다 남은 약은 일반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들은 또 얼마나 될까? 올바른 폐기 방법에 대한 계몽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적기에 폐기만 잘 해도 집에 쌓아두는 약은 적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잠재적 가짜 약사도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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