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했다. 울컥했다. 2016년 11월12일. 광화문에 섰다. 경찰 추정 26만명, 주최 측 추산 100만명 참가. 더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남녀노소, 이념을 초월해 수많은 시민이 하나의 주제로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물결이 되어 거리를 휘돌았다. 광화문광장에서 숭례문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종각으로 인파가 흘러넘쳤다. 표출된 민심은 명쾌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것이다.
부끄러웠다. 한편 기뻤다. 청소년들이 나와서 “이게 나라냐!”라고 외칠 때, 이런 아이들에게 우리 기성세대가 무슨 짓을 했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유라 사건’을 통해 아이들에게 공정함이 살아있는 건강한 사회가 아닌 특권과 부패가 넘치는 사회의 민낯을 보여줬다. 학교에서 배운 헌법 정신을 얘기하는 청소년, 민주주의와 권리를 당당하게 표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느끼는 동시에 희망의 불꽃을 엿볼 수 있었다.
충격이다. 전대미문의 사건. 아무런 직책이 없는 개인이 국가 운영에 개입한 국정농단 사건의 정점에 현직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헌법과 헌정이 심각하게 파괴됐다. 국민 마음속에는 이미 대통령의 자리는 비어있다.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이끌 자격과 신뢰를 상실했다는 방증이다.
안이하다. 대통령의 상황인식은 너무나 안이하다. 청와대는 촛불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면서도 헌법 틀 안에서 해결책을 논의해야 한다는 태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한다. 시간을 최대한 끌면서 민심 추이를 지켜보려는 의도로 비친다. 퇴진을 요구하는 거대한 촛불 민심의 분출을 보고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한 듯하다. 다수의 국민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나홀로 국정’과 ‘나홀로 대통령’ 노릇을 하는 모습이다. 여전히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걷어내기 힘든 벽이 느껴진다. 오만과 독선의 늪에 빠지기 쉽다. 민심이 이를 용인할 리 만무하다.
제대로 해야 한다.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전국 곳곳으로 이어지는 분노는 대통령 하나 바꾸자는 게 아니다. 침몰한 대한민국의 권위와 신뢰를 어떻게 바로 세우고, 어떻게 하면 새로운 헌정질서를 최단시간 내에 재건하고 복구하느냐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기폭제가 됐지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분노는 이를 바꾸자는 외침과 같다.
이제 시작이다. 아니, 붕괴는 이미 시작되었다. 블랙홀인 줄 알았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알고 보니 빅뱅이다. 모든 이슈가 빨려 들어가는 듯하더니 이젠 반대로 이와 연결된 모든 비리가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거대한 부정부패 고리 속에 숨어있는 권력형 범죄의 뿌리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의 삶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 쌓인 대한민국의 적폐, 반칙과 특권, 그리고 부패에 대해 ‘대청소’를 해야 한다. 변죽만 울리면 역사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남겨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의 교훈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 그것이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을 통해 4가지 교훈을 남겨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대통령이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반칙과 편법을 저질렀거나 저지르려고 했던 사람을 찾아내 정당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 대개조의 길로 나서야 한다.
2016년 11월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돼야 한다. 민주주의 복원을 바라는 민심의 말뚝을 박아야 한다. 그 길의 핵심은 지방분권형 개헌이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력을 지방정부와 나눠 국가혁신이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지방분권형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선례를 만들고,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