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지墨池
/이용헌
벼루의 가운데가 닳아 있다
움푹진 바닥에 먹물이 고여 있다
바람을 가르던 붓끝은 문밖을 향해 누웠고
막 피어난 풍란 한 촉 날숨에도 하늑인다
고요가 묵향을 문틈으로 나른다
문살에 비친 거미가 가부좌를 푼다
격자무늬 창문을 살며시 잦힌다
달을 품은 창문은 한 장의 묵화
어둠 갈아 바른 허공에도 묵향이 퍼진다
지상의 화공이 붓을 들어 꽃을 그릴 때
천상의 화공은 여백만 칠했을 뿐
달을 그린 화공은 어디에 있는가
길 건너 미루나무 먹빛으로 촉촉하고
검푸른 들판 위에 연못이 잠잠하다
갈필(渴筆)로 그리다 만 한 생애만이
마음속 늪지에서 거친 숨 적시고 있다
- 시집‘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밤이었겠다. 달빛 교교했겠다. 체험은 시가 아니고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체험이 시라고 했던가. 감정은 시가 아니고 감정을 바로 그 감정으로 만들어주는 감정이 시라고, 말은 시가 아니고 말을 틀어쥐고 있다가 어느 순간 놓아주는 말이 시라고 했던가. 달빛 교교한 밤 창문이 한 장의 묵지가 될 때 거기에 비치는 온갖 물상은 시적 영감의 대상이 되어 하나 하나 묵지에 드리워진다. 그냥 스쳐 지날 수 있는 풍경을 시인의 감각 속에 가둘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화공들은 밤새 여백을 준비하고 붓을 들어 묵화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내면의 풍경에까지 징검돌을 놓아 갈필로 그리다 만 자신의 생에 주목하게 된다. 거기 늪을 이룬 복잡한 마음의 바닥을 들여다보며 고요한 묵향을 전하고 싶은가 보다. /이정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