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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뒤돌아보는 삶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여든여덟 살 때의 일이다. 선생은 이른 아침 <샘터>에서 일하고 있던 정채봉 씨에게 전화를 걸어 ‘정 선생, 나 지금 공항에 나왔어요.’ 하더란다. 정채봉 씨가 ‘선생님 어디 가시려고요?’ 하니, 선생은 ‘독일 좀 다녀오려고요’ 하기에 ‘아니 혼자서요?’하고 되물으며 당황해하니까 선생께서는 껄껄껄 웃으며 오늘이 만우절 아닙니까. 하시더란다. 그때서야 정채봉 씨는 만우절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고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이어서 그는 가족끼리라도 장난이라도 치면서 키들키들 웃으며 살자고 했다.

 

팍팍한 세상 아침 시간 산길을 걷는다. 가을 산의 마지막 이별의 이미지인가. 낙엽이 빗물을 머금고 있다. ‘가을에는 소 발굽에 고인 물도 먹는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하늘이 목마른 가을의 이별 앞에 빗물로 목을 축여주는가 싶기도 했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에 좋은 시절… / 갈 까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무등차(無等茶)라는 시다. 광주광역시가 고향이었던 그는 ‘씀바귀 잎에 바람이 지나가는 남쪽 11월의 긴 밤을, 차를 끓이며 외로움을 달랬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뒤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체면 구기는 일이 많았다. 공중전화 부스에 책을 놓고 온다거나 술집에서 친구와 출판관계로 만난 뒤 코트를 놓고 오기도 했다. 한 번만 뒤돌아보았으면 이렇듯 흘리고 다닌 일이 없었을 것을. 부주의로 자존심에 굴곡진 흔적을 남기곤 했다.

 

며칠 전에는 이웃에 사는 딸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와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드시게 6시 반까지 저희 집으로 오라고 하여 갔다. 정성을 다한 저녁상 차림이었다. 아내가 좋아 하는 게장도 있고 사위는 나를 위해 양주를 내놓았다. 사연을 물으니 오늘이 저희 결혼기념일이라고 했다. 나는 ‘음식 솜씨 좋은 사람이 맘씨도 좋은 것’이라며 딸아이를 칭찬해주고 용돈을 주면서 둘이 오붓한 곳에서 차라도 한잔 마시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아버지로서 딸에게 해준 게 너무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제가 결혼 비용도 마련했었다. 어찌하다 보니 오빠 우선시한 경향도 있었던가 싶었다. 내 인생에 고통의 비가 장마철 같이 주룩주룩 내릴 때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했다. 그래서인지 ‘사랑한다.’는 말도 따뜻하게 못 해준 것 같다. 그런 환경에서 나와의 대화는 물론 인사말도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딸과 아들의 인사말이 없는 편이다. 그렇듯 생겨난 아내의 신조어가 ‘보는 게 인사’란 말이다.

 

가을은 느끼는 계절이라는데 내가 너무 차렷 자세로 경직되어 살아왔다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피천득 선생같이 아이들이나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만우절 같은 농담은 생각도 못할 것 같다. 장난도 삶의 윤활유가 된다는데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라도 아이들과 농담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나이 아직 피천득 선생 같으려면 한동안은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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