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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難讀日記 난독일기] 틈

노화는 마모가 아니라 마침입니다. 마칠 수 없는 삶처럼 고달픈 게 또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노화는 생각의 종결이자 살아내는 일의 마침입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마침이 불쑥 던져질까 걱정되는 건 사실입니다. 준비되지 못한 노후처럼 마침 또한 그러하다면 당혹스러울 일입니다.

 

두 해 전에 처음 통풍을 앓았습니다. 요관을 막은 돌(결석)을 체외충격파로 부수며 통풍의 원인이 신장에 있음도 알게 되었지요. 오른쪽 신장에만 십여 개의 돌이 생겼는데 신장 기능이 떨어져 노폐물(요산)을 걸러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작년에는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낭종 치료를 받았고, 최근에는 참기 힘든 복통에 시달리다 병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위 내시경 시술과 함께 간과 췌장을 초음파로 검사하였습니다. 위가 아니라 간이나 담낭에 결석이 생겨도 복통에 시달릴 수 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돋보기안경을 벗으면 책을 볼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습니다. 치아야 뭐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요. 허우대만 말짱하지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인 셈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예방주사를 맞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병’ 혹은 ‘병원’이라는 단어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두려움의 뿌리에는 병을 앓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그림자가 남아있습니다. 일찍 떠난 아버지처럼 나 또한 그 길을 뒤따르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죽음을 넘어 ‘일찍 떠남’이 내포하고 있는 단절과 상실을 정조준 합니다.

 

취재 수첩에 메모한 내용이 있는데요. 조선소에서 일하다 철판에 깔려죽은 용접공의 사연입니다. 삼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이니만큼 용접공 가족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산재처리도 받지 못한 시신은 서둘러 공동묘지에 묻혔고 서글픈 기억만 동료들의 가슴에 남았다지요.

 

그리고 삼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흐른 지금, 인터뷰에 응해준 늙은 용접공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죽은 동료가 아니라 그가 남긴 어린 딸의 얼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룬 다음날, 다섯 살 먹은 어린 딸은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퇴근해 돌아오는 아버지의 동료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지요.

 

- 삼춘, 울 아부지는 오늘도 잔업한당가?

 

그 아이에게는, 그러니까 죽은 동료가 남긴 딸아이의 세상에는, 아직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존재하지 않은 감정의 세상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이기보다 부재에 가까웠습니다. 죽음을 영원한 작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의 눈망울 앞에서, 조막손에 동전 하나 쥐어주는 것 말고는 해 줄 게 없었노라고 늙은 용접공은 말했습니다.

 

서글픈 것은, 떠난 자의 죽음이 아니라 남겨진 자가 짊어져야 할 단절과 상실입니다. 준비된 노후처럼 죽음에도 준비와 연습이 필요할까요. 소식 끊긴 지 오래된 학창시절 친구의 부고(訃告)를 문자메시지로 받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내고 있는 걸까요, 죽어가고 있는 걸까요. 생각할수록 아끼며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저기, 삶과 죽음의 틈에 끼어있는 우리들의 하루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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