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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 색(色)

 

 

 

새댁은 경찰서 앞마당 우물에 몸을 던졌다. 휴전협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그 해 정월이었다. 형사들의 겁박에 시달리던 새댁은 우물로 도망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건 우물가에 벗겨진 고무신 한 짝 뿐이었다. 딸이 남긴 고무신을 보자 새댁의 어미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새댁의 시신은 두레박에 묶여 우물 밖으로 나왔다. 건져 올린 시신 위로 가마니가 덮일 때, 좌익이었던 새댁 남편은 북으로 가고 없었다.

 

소달구지에 실린 주검이 마을로 돌아왔지만 누구 하나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곡소리조차 담을 넘지 못하고 마당에 붙어 기어 다녔다. 장례랄 것도 절차랄 것도 따로 없었다. 시신은 관도 없이 덕석에 말아 뒷산에 묻었다. 얼어붙은 뽕밭에 시신을 묻을 때, 늙은이와 아낙네들만 구덩이에 코를 박고 울었다. 개중에는 왜 우는 줄도 모르고 따라 우는 어린 것도 있었다. 사내라고 생긴 것들은 죄다 어딘가로 잡혀가고 없었다.

 

잡혀가지 않은 사내들은 똥통 밑에 기어들어가 숨을 참았다. 똥통에서의 은신은 대나무밭에 땅굴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딸을 잃은 어미는 사내들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새벽마다 대나무밭을 들락거리는 것도 어미의 몫이었다. 어미는 사내들이 요강에 싼 똥을 받아 땅에 묻고, 사내들은 어미가 뭉친 주먹밥을 받아먹었다. 똥과 밥의 물물교환은 어미가 피를 토하며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나무밭에 숨은 사내들은 어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마을 아낙들은 화병이 어미를 죽였다고 혀를 찼다.

 

그렇게 내 할머니는 죽었다. 묻힐 수도 있었던 고모와 할머니의 사연을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었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보도연맹과 노근리와 거창과 강화와 함양 등지에서 살아남은 가족들 또한, 한국전쟁이 낳은 아픔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빨갱이와 친했거나 빨갱이를 도왔거나 빨갱이와 일가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다가, 급기야 빨갱이와 아무런 관련 없는 자들까지 빨갱이로 몰아 죽임을 당했던 처참한 순간을 말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지금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칠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빨갱이타령은 여전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휴전’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아, 우리는 아직도 휴전상태였지.’ 어쩌면 그래서 빨갱이타령이 유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도 남북이 전쟁 중이니까. 남과 북의 의지만으로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수 없으니까. 칠십 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남과 북의 민족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해야 하니까. 국가보안법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그래서겠지. 그것이 있어야 빨갱이타령에도 체면이 설 테니까.

 

나와 우리가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고 나면, 우리네 땅 한반도에도 평화가 찾아올까. 빨갱이 파랭이 인종차별 없는 재미 난 세상이 펼쳐질까.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전철을 타고 출근했다가 버스를 타고 퇴근할 수 있을까. 어떨까. 나와 우리가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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