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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2. 금광동(金光洞) 이야기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은 금광리(金光里)라는 자연마을의 이름을 살려서 동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금광리는 고려가 망했을 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절개를 지킨 음촌 김약시(陰村 金若時, 1335~1406)가 은거하다가 별세한 곳인데, 후에 그 자손들이 마을을 이루게 되니 사람들이 광산 김씨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금광리’라 부르게 되었다. 옛 사람들의 발음으로는 ‘금괭이’라고 했다.

 

금광동의 입구에 해당하는 단대오거리 부근은 양쪽 산이 마주 접근하여 병목처럼 지형이 이뤄져 광통(光通)머리라 불렀고, 김약시가 자손들에게 자신이 살던 이 마을을 세상에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해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고도 했다.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23년(1799) 8월 22일 유직주(兪直柱)가 임금에게 올린 말에 김약시의 충절에 대한 사연이 자세히 언급됐다.
김약시는 아내와 함께 걸어서 이 마을로 들어와 나무를 얹어서 처마를 삼고 바람과 비를 막았다. 자취를 숨기고 이름을 감추니 시골 노인과 구별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용모를 괴이하게 여겨 종종 찾아가서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술과 음식을 대접해도 받지 않으니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김약시는 태조 이성계와 동갑 친구였을 뿐 아니라, 태종 임금과는 두 번이나 함께 과거에 급제한 동기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숨어 사는 그를 찾아내 원래의 벼슬을 내렸지만, 눈뜬 장님이라고 핑계를 대고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 산골 이름을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 지었다.

 

태조는 특별히 친필로 교서를 써 한양 시내인 성명방(誠明坊)에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태조는 김약시를 개인적 친구 사이로 대우해 교서의 끝에 자신을 임금으로 서명하지 않고, 송헌(松軒)이라는 자신의 호 두 글자로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김약시는 그 집조차 받지 않았고, 집안사람들에게 "나라가 망했는데도 죽지 못하고, 멀리 달아나 숨어 지내지 못하는 것은 조상의 묘역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장사 지내되 봉분을 만들지도 말고 나무를 심지도 말며, 다만 모나지 않은 바위 두 개를 좌우에 세워 그것으로 표지를 삼으라" 하였다.

 

김약시의 행적과 부전어동 지명은 성해응(1760~1830) 문집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 신라와 고려의 유민(遺民)을 소개하는 데에도 수록돼 있다. 

 

 

김약시의 아들 김췌(金萃)는 세종 8년(1426) 지상원군사(知祥原郡事)가 되었다. 이때 경상도 성주 고을은 벼슬아치들이 세력을 부리고 백성들이 사나워서 관청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자 그 고을을 장차 폐기하려 하였다. 옛날에는 인구 숫자보다는 그 고을에 효자 충신이 많느냐 역적이 나왔느냐에 따라 행정구역의 등급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세종 임금의 특명으로 벼슬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그 고을을 맡을 만한 사람을 뽑게 했는데, 김췌가 뽑혔다. 임금이 18세밖에 안 된 그를 보고 걱정을 하니, 생살권(生殺權)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임금의 허락을 받고 부임한 지 7일 만에 포악한 사람 7명 가량을 죽였다. 이때부터 수령을 두려워하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진압되었다. 아전들에게는 흙을 구워 만든 도기로 갓끈을 만들어 매도록 하여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하게 하니 관리들이 엎드려 허리를 굽히고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김췌는 나이 26세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광주시의 문화재 안내문에는 1452년(문종2)에 세상을 뜬 것으로 적혀 있어서 벼슬을 한 시기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김약시의 후손들은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이후로 담배 농사를 지었는데 품질이 뛰어나 ‘금광초(金光草)’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져 다른 지방에서도 금광초라는 이름을 달아 판매하였다. 다른 지방의 담배 중에 우수한 진품은 전북 임실의 상관초(上官草)뿐이었다. 고종임금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금광초의 명성이 기록돼 있다.

 

김약시와 김췌의 묘소는 신구대학 본관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국가적 사업이었던 광주대단지 건설로 광주시 실촌면 삼합리로 이장됐고, 광주시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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