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3. 군사용 토지 둔전동(屯田洞)

 

둔전동은 성남시 수정구에 속한 법정동이고, 행정동인 고등동에서 관할한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대왕면 둔전말 또는 둔전촌이라 하였다.

 

둔전동 일대는 옛날에 군용 토지인 둔전이 있었다. 염제신(1304~1382)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먹는 것은 백성들의 하늘이요, 군사는 농군 사이에 감추어야 하니, 군사들이 일이 생기면 무기를 잡고 아무 일도 없으면 둔전을 한다면 군량을 운반하는 수고가 덜어지고 군량이 넉넉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전쟁이 없는 평상시에 군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한 땅이 둔전이다.  

 

광평대군의 아내인 평산 신씨의 땅이 성종의 선릉(宣陵)에 많이 편입돼 연산군이 신씨에게 둔전 땅 절반을 떼어주려고 했는데, 신하들이 군사용 토지를 떼어주는 것을 반대하여 취소되었다. 광평대군은 19세에 사망했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관상쟁이가 광평대군은 굶어 죽을 관상이라고 세종에게 말했더니 세종은 “내 아들이 굶어 죽을 리가 있겠느냐”면서 광평대군에게 임금이 농사 시범을 보이는 땅 중에 동대문 밖의 넓은 땅을 주었다. 그런데 광평대군이 생선을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실제로 굶어 죽었다. 지금 서울 수서에 광평대군과 그 후손들의 묘역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전쟁 중이던 선조 27년(1594) 6월에는 태종의 헌릉 밑에 도감 둔전관(都監屯田官) 두 사람을 두자 도적이 차츰 사라지고 밭이 개간되었다. 둔전에서 생산된 식량이 남한산성으로 옮겨 가는 중간에 창고가 있어서 창곡동(창말) 지명이 생긴 것이다. 둔전에는 오늘날에도 군부대가 설치된 곳이 많다. 성남 둔전에는 공군비행장이 생겼고, 용인 둔전에는 사단급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둔전리에는 일제 강점기에 광명의숙(光明義塾)이라는 사설 강습소가 있었고, 성남 일대에는 일찍이 기독교가 전래되어 둔전마을의 둔전교회, 세곡동교회, 심곡교회가 모두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갖고 있다. 둔전교회는 1904년에 둔전 윗말에서 창립했고, 해방 후 아랫말로 이전했으며, 1977년 둔전동이 공군비행장 부지로 되면서 수진2동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마을 남쪽에 해발 85.4m인 얕은 산이 있는데, 탄천에서 한강으로 드나들던 배를 매던 곳이라고 해서 배맨산이라고 부른다. 이 산도 비행장 공사로 반 이상 깎이면서 낮아졌다.

 

 

둔전리에 처음 복음을 전한 피득(Pieter)은 러시아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정통 유태인 상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둔전교회에 함태영(1873~1964) 목사가 시무할 때,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성재판소 판사일 때 독립협회 사건으로 사형이 언도된 이승만을 7년 형으로 감형시킨 일화가 유명하다. 아들 함병춘은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는데 아웅산 테러로 순국하였다.

 

둔전교회는 해방 후 창곡동의 일본군 막사를 철거하여 그 자재로 예배당을 신축할 때, 부녀자들까지 모든 주민이 참여했다. 1946년 12월에 헌당식 겸 창립 40주년 예배를 함태영 목사가 인도했다. 이후 6·25사변 때 현석진 목사와 김태수 장로가 순교했다. 다른 교회들이 대형화에 총력을 기울일 때, 둔전교회만은 다른 지방에 작은 교회를 개척해 나간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