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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7. 성남 판교(板橋)의 역사와 문화

 

성남 판교는 예로부터 도로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고려 말에는 높은 벼슬까지 지낸 조운흘이 인부들과 함께 노동을 하며 판교원을 중건했다.

조선 건국 후 한양성을 쌓는 데 동원된 전라도 사람이 병이 났는데, 효녀 도리장이 아버지를 판교에서 만나 간병해서 감동을 준 효행의 마을이기도 하다.

판교는 한양에서 지방으로 가는 영남대로였고, 지금도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이 첨단산업과 문화의 현장으로 발전하고 있다.

 

 

길이 뚫리고 사람의 왕래가 많아지면 마을도 형성되고 문화도 발전하기 마련이다.

병자호란 후 북벌운동의 주역이었던 백헌 이경석은 판교에서 친지들과 수동계(修洞契)를 열었고, 해방 후에는 ‘판교기로회’라는 한시 창작동호인 단체가 활동했다. 판교기로회는 판교지역 노인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한강 남쪽 일대로 참여자들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한남기로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회원들은 판교의 음식점, 회원 생일잔치, 용인의 충렬서원이나 수원의 방화수류정 같은 명승고적을 탐방하여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65년 3월 20일에 첫 모임 이후 1974년까지 매 달 1회씩 총 112회의 모임을 가졌고, 2238수의 한시를 남겼다. 이 모임은 이억녕을 중심으로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뜻을 본받아 보태고자 하는 뜻’에서 이뤄졌다. 판교기로회 시집에는 윤치장(1876~1971) 의병장이 90세에 지은 시가 첫 번째로 소개되어 있다. 이 시집은 우리 고장의 집성촌 역사와 문화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현대 역사의 증언이면서 문화의 보물창고이다.

 

판교에는 영남길 노선에서 첫 밤을 묵어가는 판교원과 판교역(또는 낙생역)이 있었다. 판교라는 지명은 냇물을 건너는 ‘널다리’가 있어서이고 한문으로 판교(板橋)라 쓴 것이다. ‘너더리’라고도 불렀다. 조선 중기의 시인 이달(李達)은 새벽에 판교에서, ‘초가지붕 객점에선 사람 소리 가끔 들리고, 널다리를 오르는 말굽 소리 줄을 이었네’라고 하였다. 번화한 말발굽 소리를 보여주듯 삼거리가 있었고, 그곳이 지금은 판교IC가 되었다.


판교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사신들이 거쳐 간 곳이었고, 성종 14년에 세조 왕비인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온양행궁에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할 때도 이용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됐던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부산에서 석방되어 올라올 때도 묵어간 곳이다. 특히 왜란 후 일본에 파견된 평화사절단인 통신사(通信使) 행차도 영남길이 주된 도로였으며, 1811년의 마지막 통신사 일행 350여 명의 왕래에 필요한 각종 물자 조달을 담당한 곳이 판교였다. 음식 메뉴와 문서작성에 필요한 문구는 물론 요강까지도 꼼꼼히 준비한 문서가 전해오고 있다.

 

 

판교지역은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 까지 문화의 꽃을 피운 유서 깊은 고장이다. 판교박물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고분이 전시되어 있고 판교 신도시 개발 때 서낭당 유적에서는 무쇠로 만든 말 12점이 발굴되어 교통의 요지라는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
판교에는 전통민속놀이인 쌍용거줄다리기가 전승되어 오고 판교공원의 마당바위는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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