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논쟁은 끝이 않보인다. 말 그대로 과거의 일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다 보니 종착역이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사사건건 사실확인을 하고 정해진 잣대에 의해 그물질을 해야 되는데 만만치 않은 것이다. 잣대라는 것도 보는 사람에 따라 또는 의도된 목적의 변화에 따라 다를 수 있어 과거사 논쟁의 결말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과거사 논쟁이 가장 심했던 때는 아무래도 조선조 연산군 집정기다. 19세의 나이로 부왕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 윤씨가 폐비되어 사사된 사건에 의혹을 품어 왔다. 때문에 연산군은 윤씨 폐비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20여년전에 일어났던 과거사를 들춰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정권장악 전략과 맞물려 희생자수가 부지기수였다. 이른바 갑자사화다. 20년전 과거사 규명은 대참살극으로 끝을 맺었다.
500년이 지난 요즈음 의문사위 활동에 이어 친일·유신 등 과거사 규명이 화두가 되고 있다. 친일·유신 규명은 아무래도 오랜동안 햇볕을 쬔 구여권 등 보수권에 부담이 될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여·야 정쟁이 끝이 없고 언론 또한 양분,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고 있다.
친일 등 반민족적 행위 규명은 반듯이 짚고 넘어가야 할 민족적 과제다. 타율에 의해 해방이 되고 신탁통치를 받다 보니 그 시기를 놓친 것이 문제이겠으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걸르지 못한 것은 잘 못이다. 하지만 50여년전의 과거사를 명쾌하게 가르기는 쉽지 않다. 친일도 생계형이 있을 터인데 이를 판단할 기준이 간단치 않고 당시 사회분위기를 유추 감안하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다. 유신규명관계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모두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지만 후유증 등 후폭풍이 우려된다.
滿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