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산조각 / 정호승 지음 / 시공사 / 292쪽 / 1만 6000원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정호승 시인이 신작 우화소설집 ‘산산조각’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시인에게 우화는 시의 압축된 묘사 뒤에 숨겨진 서사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보다 친근한 방식이다.
“우화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을 때 시가 소설로 재탄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연과 사물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우화소설의 그릇에 담을 때 보다 자유스러운 창작의 상상력과 구성력이 주어졌다” (‘작가의 말’ 중에서)
수의, 못생긴 불상, 참나무, 걸레, 숫돌, 낡은 해우소의 받침돌 등 책에 등장하는 17편의 이야기 속 화자와 주인공들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미물들이다. 하지만 엄연히 이 세상에 실재하며,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시인은 너무 흔하고, 당연해서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는 미미한 존재들이 현재의 모습에 이른 궤적을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왔을 법한 시간, 경험, 깨달음을 보여주며 우리 삶의 깊은 곳을 성찰한다.
일상의 사건과 화법으로 써내려간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읽힌다. 어느 것 하나 세속의 성공과 영화를 누리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낸다. 다음을 기다리겠다는 단단한 생의 의지를 내보인다.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수 없는 미물들이지만,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를 통해 우리는 의연함을 배운다.
‘나는 목불이 될 꿈을 꾸면서 오만하기 짝이 없었어. 겸손함을 몰랐어. 큰스님께서는 늘 자기를 바로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어. 목불이 되고자 했던 것도, 산사의 대웅전 대들보가 되고자 했던 것도 다 나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헛된 꿈을 꾼 거야. 내가 나를 속인 거야’ (‘참나무 이야기’ 중에서)
‘참나무 이야기’ 속 화자 참나무는 대웅전의 대들보나 목불(木佛)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참나무는 결국 장작이 되고 꿈꾸던 미래와 안락함을 빼앗겨 낙담한다. 하지만 묵묵히 견디며 삶의 더욱 높은 경지에 다다른다. 참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하며 완전함에 이르고자 한다.
‘숫돌’의 칼갈이 ‘숫돌’은 평생 쇠를 버티며 칼날을 날카롭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오다, 어느 날 군데군데 패고 홀쭉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예전 같지 않은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숫돌은 더 이상 칼 갈기를 거부한다.
또한 ‘걸레’의 ‘걸레’는 주인 남자의 팬티였다가 낡아져 걸레로 전락했다. 청결하지 못한 남자의 속옷일 때도 싫었지만, 걸레가 되고 난 뒤에는 더욱 힘든 삶에 놓였다고 느낀다.
하지만 숫돌과 걸레는 긴 세월을 견딘 벼루와 행주의 전언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곧 생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에는 다 이유가 있다. 책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과,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청춘들에게 지금의 나 자신과 내가 머물러 있는 삶을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전한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