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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소] 조병창부터 대우자동차까지…인천 부평의 산업 변화 담은 ‘영단주택’

한옥 형태 특징…지어진 배경 아직 밝혀지지 않아
해방 이후 미군기지·공단 노동자 주거
재개발로 올해 안 철거 예정

우리 동네 문화재를 소개합니다 ‘우문소’

 

2017년 5월, ‘인천 강제동원 평화역사기행’에 참여한 고교생들은 미쓰비시(三菱) 줄사택에 대한 역사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눈을 반짝였다. 그들에게는 일상적인 길이었고, 줄사택은 그냥 낡고 허물어져 가는 건물이었다. 그랬던 곳이 일제 식민지 당시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인천에도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살아 숨 쉰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그들이 역사를 인식한 인천시민으로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문화재는 그런 힘이 있다.

 

경기신문은 2023년 인천시민들의 일상에 녹아 있는 지역 문화재를 소개한다. 관리되는 지정문화재보다 아직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한 비지정문화재에 무게를 둔다.

 

1. 조병창부터 대우자동차까지…인천 부평의 산업변화 담은 ‘영단주택’

 

똑같이 생긴 집들이 빈틈없이 붙어 있다.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은 자로 재서 자른 것처럼 반듯하고 길다.


인천 부평구 산곡동 87번지 일원에 있는 이곳은 부평 산업 구조의 변화를 담고 있는 ‘영단주택’이다. 산곡동 영단주택은 일본육군조병창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주택 단지로 시작했다. 

 

 

영단주택의 역사는 193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을 군수기지로 만들었고 인천은 군수품 생산과 수송을 위한 군수공업단지가 된다.

 

이곳에 노동자들이 몰리면서 일본은 일종의 공공기업인 조선영단주택’(현 LH한국토지주택공사)을 설립해 대규모 집단 주택을 건설했다.

 

인천에서는 미추홀구 용현동과 숭의동 등에도 영단주택이 만들어졌다. 이곳들 역시 산곡동처럼 공장들이 많았다.


산곡동 영단주택은 구사택과 신사택으로 구분된다.

 

1941년부터 1943년에 건설된 한옥식 주택은 구사택, 1944년 건설된 일본식 주택은 신사택으로 불린다.


구사택은 온돌방 2개와 부엌이 기역(ㄱ)자로 연결된 구조로 대문 옆에 화장실이 있었다. 집 내부에는 뒷간과 작은 앞마당도 존재했다.


신사택은 이보다 단순한 구조였다. 부엌과 방이 일자로 이어졌으며, 이곳에 살던 노동자들은 한 동마다 한 개씩 있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말 인천육군조병창양성소 훈련생들이 주로 사용했던 합숙소도 발견됐다. 이곳에는 합숙소 방 당 6명, 총 40실에 240명이 살았다.


산곡동 영단주택은 다른 조선인 노동자 대상 임대주택과 달리 한옥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건설된 노동자 주택은 형태와 생활 양식까지 모두 일본식으로 강제하는 것이 지침이었다.

 

왜 한옥 형태로 지어졌는지에 대한 배경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인 기술자 2명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현재까지 누구인지 찾지 못했다.

 


해방 이후 영단주택에는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과 기지촌 여성들이 주로 살았다.

 

미군기지가 축소되기 시작한 1960년대 중후반부터는 부평수출공단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영단주택을 채웠다. 

 

시대에 따라 영단주택의 주민들은 달라졌다. 공통점은 ‘노동자들의 집’이라는 것. 그들은 부평의 변화와 역사가 담긴 곳에서 생활하며 일터로 나갔다.


이곳은 재개발로 올해 안으로 모두 철거된다. 빈집에는 출입 금지를 알리는 스티커가 붙었고 단지 안에는 이주를 시작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 경기신문 / 인천 = 김샛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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