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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통신] 디아스포라가 미래다

 

21세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나는 ‘이동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이동하고, 언어와 문화가 마치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예전처럼 ‘한 나라, 한 민족, 한 정체성’이 당연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 시기에, 오히려 타국에서 뿌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 디아스포라 ― 는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카자흐스탄에 산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 설렘과 함께 광활한 초원과 많은 민족, 다양한 언어가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여기에는 이미 ‘한국의 또 다른 얼굴’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려인 사회였다.

 

1937년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 17만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결의안에서 이주의 목적을 “극동지역으로 일본 스파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라고 밝혔다.

 

강제 이주의 배경을 보는 다양한 견해 중, 일본과 대립하기 싫었던 소련의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혁명과 내전으로 피폐화된 자국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대외 갈등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소련의 속내였다. 소련은 극동의 한인을 일본이 분쟁의 씨앗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주가 시작되자 일본은 재빨리 외교라인을 통해 소련에 항의했다. 소련은 한인의 이주는 자국 시민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선을 그었지만, 일본은 한인들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식민지 조선에 대대적으로 알려서 일반 민중들에게 반소 정서를 퍼뜨리는 데 활용했다. 

 

퇴거는 즉시 시작되었고, 한인들은 1938년 1월 1일에 끝낼 것을 명령받았다. 1937년 12월 29일, 이주 결과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시베리아와 극동 러시아 국가 기록 보관소, f. 2413, op. 2, d. 804, l. 33.32).

 

그에 따르면, 2만 789가족, 9만 8454명의 한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송되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중앙문서보관소, f. 1490, op. 1, d. 7, l. 25). 도착하자마자 맞이한 첫 번째 겨울에 한인들은 기차에서 내린 지역의 클럽, 창고, 버려진 사원, 마구간 또는 토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덮어 지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938년 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주 카라탈 지역의 15개, 크즐오르다 지역의 22개 쌀 재배 농장을 포함하여 70개의 독립적인 집단농장이 형성되어(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중앙문서보관소, f. 1481, op. 10, d. 13, l. 76-97), 2만 1000 347.3 헥타르의 땅에 쌀, 곡물, 채소, 사료 작물 등을 재배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중앙문서보관소 f. 1208, op. 1, d. 2, p. 30). 

 

고려인들은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했지만, 연해주에서와는 달리 학교에서 모국어로 교육을 할 수 없었고 대신 러시아어로만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초원 위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웠다. 그 혹독한 환경에서도 그들은 ‘우리말’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어를 잃으면 곧 존재가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재발행했다.

 

'선봉' 신문은 '레닌기치'라는 이름으로 중앙아시아에서도 발행을 이어갔다. 특히, 문예면에는 고려인 작가들의 작품이 꾸준히 발표되어 한글문학과 민족정체성을 이어갔다. 이 신문은 훗날 '고려일보'가 되었고, 나는 1995년 알마티국립대학교 조선어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동시에 신문의 편집국에서 기자로 일을 해야 했다. 우리말로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들이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통역으로 빠져나가 버려서 한글 기사를 작성할 수 있는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고려일보 100주년을 맞아 레닌기치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동시에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뀐 뒤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 온 생존 원로 기자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성조 전 고려일보 부 편집국장은 “비록 고려인들이 모국어를 상실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글판 지면을 늘려나가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모국어를 지키고 민족정체성을 강화시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던 말이 귓가에 생생하다.

 

현재,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서 정치·경제, 사회·문화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수준 높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는 카자흐스탄 정부의 관대한 소수민족정책과 최근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카자흐스탄 거주 고려인의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즉, 강제이주의 와중에도 살아남아 재소 고려인의 말과 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던 고려일보 신문사와 고려극장이 바로 카자흐스탄에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카자흐스탄 고려인은 구소련의 다른 지역 고려인들보다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재생산할 수 있었다. 고려인들은 높은 교육열로 유명하다. 이주 후 한 세대가 흐른 뒤에는 사회 전반에 다수의 고려인 인텔리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지금 카자흐스탄 사회 문화계 전반에 여느 민족 못지않게 고려인 인텔리와 학자, 작가들이 풍부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1999년 현재 민족별 교육수준 통계를 보아도 고려인 대졸자 비율이 1000명당 262명(알마티시는 1000명당 400명)으로 130여 민족 중 유대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 민족 정체성 상실을 가속화시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주류사회에 편입하려는 열망은 당시 주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던 러시아 문화에 대한 예속 정도를 높여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는 곳곳에서 민족성 상실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육열은 개인적 성공을 보장해 준 반면에 민족공동체를 어느 정도 약화시켰다.

 

누군가는 디아스포라를 정의하기를 근원으로부터 새로운 물이 유입되지 않으면 정체되어 없어져 버리고 마는 고인 물과 같다고 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정체성은 한국인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유지, 재구성되는 측면이 있으며 사실 최근 30여 년 동안의 고려인 역사는 한국과 한국인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과 카자흐스탄 거주 한국인은 100여 년의 단절을 넘어 벌써 30여 년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어쩌면 뒤섞이면서 서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카자흐스탄 정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한국인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고려인의 일부로 편입되고 또 많은 고려인들이 한국문화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더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문화적·경제적·심리적 차이에서 오는 초기의 외인적 관계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필요로 하는 진정한 내인적 관계로 진입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는 약 7백만 명의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해외동포’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세계 속의 한국’이며, 한국의 또 다른 미래다.

 

나는 가끔 고려인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당신에게 조국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역사적 조국이고, 카자흐스탄은 삶의 조국입니다.”

 

그 한마디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들에게 조국은 장소가 아니라 감정의 기억, 문화의 유전, 그리고 삶의 방향이다. 두 조국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두 세계를 잇는 다리로서의 자의식이다.

 

이것이 바로 21세기형 정체성의 모델이자, 디아스포라의 지혜다. 디아스포라는 우리에게 묻는다. “뿌리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대답은 이렇다. “뿌리를 지키는 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추수가 끝나고 겨우살이에 들어간 카자흐스탄의 벌판을 지날 때마다 그 말을 되새긴다. 얼어붙은 땅 아래에서도 씨앗은 언젠가 싹을 틔운다. 그 씨앗처럼, 디아스포라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키워왔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이제, 모국의 미래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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