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이 촛불로 뒤덮인다. 사상 최초로 청와대 100m 앞인 효자치안센터까지 집회행진이 허용되었다. ‘어디까지 집회행진이 허용되는가’라는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효자동 주민센터와 효자치안센터는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다. 이 두 곳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일대는 우리에게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겨울의 추위도 날려버릴 촛불집회의 현장인 서촌으로 기행을 떠나보자. 서촌에는 조선시대부터 많은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서촌기행은 경복궁역에서 마을버스 9번을 타고 종점까지 이동해 수성동계곡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종점에 다다르면 커피와 생수를 하나 사들고 수성동 계곡을 오른다. 수성동계곡은 조선시대에도 여름에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선비들은 이곳에서 탁족회(濯足會)를 하면서 휴양을 즐겼다. 그렇지만 수성동계곡은 무엇보다도 겸재 정선의 산수화 ‘수성동’에 등장해 더 유명하다. 시대가 변하고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면서 정선의 그림 속 풍경과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장대석을 두 개 맞댄 돌다리는 정선의 그림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매일같이 백악과 인왕, 사직단을 거쳐 일터로 향한다. 강의실에서는 인왕과 백악, 사직단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백악에 기대어 앉은 청와대까지 들어오니 세상사 돌아가는 일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셈이다. 가장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 사직단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사직공원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오늘은 종묘와 함께 500년 조선왕조의 근간을 이루었던 서울 사직단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사직단은 땅의 신인 사신(社神)과 곡식신인 직신(稷神), 두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두 신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종묘가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뜻한다면 사직은 국토와 민생을 상징한다. 사직단이 종묘와 다른 점은 일반백성의 참여가 허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묘가 서울에만 있다면, 사직단은 전국 곳곳에 위치해 있다. 수원화성의 축조과정을 담아낸 ‘화성성역의궤’에도 사직단이 나타나 있다. 서울의 사직단은 태조 4년에 세워졌으나 사직에 재실이 세워진 것은 태종임금 시기이다. 또한 임금이 친히 행차하여 제례를 행한 것도 태종임금 때이다. 태종임금이 이 곳에서 친히 행한 제례는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우제였다. 태종임금은 사직단의 제도도 정비했
가을바람이 차가운 날, 태강릉을 다녀왔다. 태강릉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의 태릉과 그녀의 아들인 조선의 13대 임금 명종의 강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태강릉은 왕릉과 더불어 넓은 자연녹지, 그리고 조선왕릉 전시관이 잘 갖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승하하면 국장을 치러 최고의 예를 갖추었다. 이를 위해 3개의 임시관청을 두었는데 빈전도감과 국장도감, 산릉도감이 그것이다. 빈전도감은 빈전을 설치하고 국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한다. 산릉도감은 왕릉조성과 관련된 일을 맡으며, 국장도감은 발인절차에 필요한 업무를 처리한다. 또한 왕이 살아생전 그의 공덕과 업적 등을 평가하여 시호를 올리게 되는데 본래 시호는 죽은 이의 살아생전 행적의 선과 악을 평가하여 후대에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포폄의 의미가 담겨있다. 매표소를 통과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조선왕릉 전시관이 우리를 맞는다. 조선왕릉 전시관에는 조선의 국장에 대한 내용이 모형과 사진, 글, 유물 등을 통해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빈전에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내용을 포함해 왕릉을 조성하고, 조성된 왕릉에 왕을 모시는 일까지 자세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정조의 국장
불국사와 더불어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은 석굴암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다녀왔을 곳이다. 올해는 지진여파로 인해 경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 수학여행을 추억하며 경주 석굴암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석굴암은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감탄해마지 않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일치감치 이 석굴암의 가치를 알아본 서양의 황태자가 있었다. 바로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이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신혼여행을 일본으로 왔다가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경주로 오게 되었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석굴암의 안부를 조선 땅에 도착해 가장 먼저 묻기도 했으며, 석굴암에 와서는 부처님 무릎에 명주 천을 놓고 만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석굴암에 대한 가치를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구스타프 황태자가 귀히 여겼던 석굴암은 경주 동쪽에 있는 토함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토함산은 신라인들이 동악이라 부르며 신성시 하던 산이었다. 창건할 당시에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 석굴암으로 불리기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굴암에 가기 위해서는 석굴암 바로 앞까지 나 있는
단풍여행을 떠나는 등산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시즌이다. 그 인파속에 묻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일어난다. 단풍을 보기에 좋은 곳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경주의 불국사가 떠올랐다. 단풍이 어우러진 불국사는 누가보아도 멋진 장면을 연출한다. 오늘은 단풍이 멋지게 어우러진 불국사로 가을여행을 떠나보자. 불국사는 ‘부처님의 나라’다.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인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럼 부처님의 나라로 출발해보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일주문을 통과해 해탈교를 건너면 불국사 입구에 다다른다. 불국사 입구에서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들어가면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즉, 부처님의 나라에 들어서는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에 들어서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마주하고 있다. 이 두 개의 탑은 우리나라 최고의 탑으로 손꼽히는 것으로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그 생김새가 확연히 다르다. 다보탑은 화려하고 석가탑은 밋밋할 정도로 간결하다. 화려한 다보탑보다 석가탑에 더 시선이 머무는 것은 심플한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던진 석가탑의 매력 때문이리라. 석가탑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갖고 있어 가을 남자로 대표되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을 만나러 예산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예산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향이다. 김정희 선생이 나고 자란 추사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그리고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증조모 화순옹주의 열녀문 등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오늘은 김정희 선생이 나고 자란 추사고택으로 출발해보자.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뒤로는 높지 않은 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누가 봐도 명당에 앉은 듯 편안하다. 추사 김정희의 명성에 비하면 지금 추사고택의 외모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추사고택은 원래 53칸의 집으로, 이 집을 지을 때 한양에서 나라의 건축을 맡아 지었던 경공장을 불러다 지어 반가주택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추사 고택은 출사 후 서울에서 머물렀던 김정희 선생이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1968년까지 그의 후손들이 살았다. 그러나 직계손이 끊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것을 도에서 다시 사들여 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현재는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와 사당채가 남아 있
양동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명소로, 가을이면 단풍과 어우러진 한옥의 모습이 더욱 멋을 풍긴다. 양동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리는 곳은 지난 여행에서 만났던 관가정과 향단, 그리고 오늘 여행을 떠나게 될 무첨당과 서백당이다. 양동마을에서는 여행하는 방법으로 6개의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관가정과 향단은 향단코스에, 무첨당은 물봉골 코스, 서백당은 내곡 코스에 속해있다. 하지만 꼭 소개하는 코스대로 양동마을을 여행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길 닿는 데로, 발길 닿는 데로 거닐다보면 다 만나게 된다. 먼저 서백당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서백당은 조금은 찾기 어려운 안쪽 안골에 자리하고 있다. 집으로 들어서면 마당 한 켠에 500년 넘은 향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 향나무는 양민공 손소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집을 지은 이도 손소이다. 양민공 손소는 세조 때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처가를 따라 양동마을에 정착했으며, 손소가 이 집을 지은 시기는 성종 15년이다. 서백당은 사람이 계속 살고 있는 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 가운데 하나다. 사람이 계속 살고
문화유산여행을 떠날 때면 문화유산여행지에서 커피 한잔을 하려고 애쓴다. 분위기 좋은 현대식 카페보다는 그 지역의 주민들이 운영하는 소박한 곳을 주로 찾는다.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나만의 여유시간을 만끽한다. 여행지의 바람과 햇살, 그리고 하늘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느껴보는 시간이다. 오늘은 그러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중 하나인 500년 전통의 양동마을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양동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이가 바로 점방이다. ‘점방’이라는 단어가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양동점방은 ‘100년이 넘은 양동점방’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나무 푯말이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열 평이 조금 넘는 작은 건물의 양동점방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낡고 초라한 듯 하지만 150년 된 웅장한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통마을임을 실감케 한다. 산비탈의 고즈넉한 풍경과는 달리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을 드나들며 소주 한잔을 기울이시기도 하고, 우리 같은 여행객들의 쉼터이자 안내소 역할도 하고 있어 마을 사랑방 역할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이 곳은 ‘양동Buck
영화 ‘덕혜옹주’가 연일 화제다. 역사왜곡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영화로 인해 문화유산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오늘은 덕혜옹주의 흔적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덕혜옹주는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황제의 나이가 회갑이 되던 해에 태어났으니 고종황제의 늦둥이 딸인 셈이다. ‘덕혜’라는 이름 뒤에 옹주가 붙은 이유는 덕혜옹주가 고종황제와 후궁 복녕당 양씨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덕혜옹주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고종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아무리 예쁜 딸이지만 엄연히 궁중의 예법이 있을 진데,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는 덕혜옹주가 아버지 고종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덕혜옹주는 함녕전 온돌방과 대청마루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행복한 유아기를 보냈을 것이다. 고종황제는 늦둥이 딸, 덕혜옹주를 위해 궁궐 안에 유치원을 만들었다. 준명당이 바로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이다.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위해 선생님도 초빙하고, 혼자는 외로울까봐 함께 공부할 친구들도 초대했다. 그리고 유치원 입학식에도 친히 참석해 자리를 빛내기도 했다. 또한 어
본격적인 휴가시즌이 끝나고 입추가 지났지만 더위는 가시질 않는다. 이 더위를 피해 떠나는 제2의 휴가시즌은 광복절 연휴가 아닐까한다. 하지만 광복절은 휴가를 떠나기에 좋은 날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을 찾은 날로써 본연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따라서 오늘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서대문형무소로 여행을 떠나보자. 서대문형무소는 입구에서부터 가슴이 먹먹해진다. 높게 쌓아올린 담도 담이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 안에서 목숨을 빼앗긴 독립투사들이 한 두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관과 중앙사, 옥사, 공작사, 사형장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역사관은 서대문형무소가 만들어지던 때부터 시작해 1987년 서대문형무소로서의 기능을 다할 때까지의 역사를 전시해놓았다. 역사관은 1909년 일제가 사법 및 감옥 업무를 장악하기 위해 강제로 맺었던 기유각서로부터 시작해보자.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작은 문서이지만 기유각서로 인해 일제는 조선에 대한 합법적인 탄압과 명분이 가능해졌다. 기유각서를 지나면 서대문형무소의 조감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조감도를 통해 현재의 서대문형무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