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19의 전지구적 전파 이후 시민의 일상은 어찌 변할까. 세 가지 증후군을 골라 본다. 먼저 사회의 풍토 변화다. 교육의 부재 상황에서 대중은 전통적인 학교가 무용해지는 것을 간파했다. 대학의 기능상실이 뒤따를 것이다. 개인들이 지식을 공유하는 열린 시민대학이 는다. 자주적인 개인학습, 직접 현장에 참여하는 실습, 학습공동체와 지식동아리, 동호회가 자조적으로 꾸려가는 습작, 문제의식을 느낀 당사자들의 직간접 체험, 일하면서 배우는 노작, 교수 없는 터득 방법, 조사와 토론으로 직능인이 되는 습득가정 같은 창의적 성장 기술이 자리잡아간다. 다음은 개인의 행동 변화다. 자기계발의 풍습이 극단적으로 바뀌는데, 나는 ‘방목(放牧)’의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학교의 틀에 갇히지 않고 이것저것 내키는 대로 배우고, 몸소 익히고, 스스로 얻고, 알아서 깨닫는다. 취미와 특기, 전공에 있어 유기된 상태에 놓인 사람들 중 적극적인 개인들은 가장 유목적인 존재, 유희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분산적이면서 전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속출하고, 몇 가지 분화된 영역에서 전문적이면서도 여러 분야에 지식을 걸친 융합적 인재들이 드러난다. 이들은 교육현장, 학계와 직업세계보다 재야에서, 특히 개인들의 서재와 침실 책상에서 나온다. 본격적으로 사람이 콘텐츠인 시대가 왔다. 제도의 변화와 관련된 인식 변화도 있다. 위에 이야기한 두 경향에 따라 학교 없이 학습과 연구를 한다든지, 자신이 정한 취미와 특기, 전공을 마음껏 익히는 식으로 우리 의식이 변하면서 소득에 대한 경제관념이 변한다. 행정과 의회에 요구하는 지배적인 요청도 달라져간다. 세금의 사용을 혁신하자는 주장이다. 20세기를 지배한 늙은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국민 기본수당, 약자를 위한 기본소득, 미래세대를 위한 청년배당 논의가 급부상했다. 이것은 좌파 우파의 늙은 이념문제를 냉정하게 넘어서는 현실이다. 보수적인 청년들조차 20세기에 진보적 사상이 주장했던 복지국가, 사회적 보장 개념을 수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복지와 사회안전망에 대한 요청은 기본이고, 생활 속에서 사회적 배당을 연구하고 토론한다. 이런 세대가 부상하면 세금을 걷는 방법도 달라질 것이다. 기본소득을 나누자는 주장을 넘어 기본자본을 분배하자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논의하고 수용하는 시민문명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시민은 코로나 사태가 예방과 방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를 생각하는 개인행동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공공영역에서 함께 답을 찾으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공동체가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사실 시민보다 사회적 경제 조직이 이런 접근을 하기 바란다. 사회적 경제 조직은 사회를 살리고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 노력을 한다. 그러자면 손가락 끝에 걸린 사회문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저곳에 위치한 시민들의 삶을 응시해야 한다. 익명의 대중 같은 시민이 아니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들의 한계와 고달픔,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범상하기 그지없는 생명력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징후는 교육제도나 재택근무시대의 원격직장 문제가 아니다. 성장으로 자기증명을 하면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건강한 현대인의 욕구해소 문제다. 두 번째 징후 역시 평생학습과 사회복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전히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불안한 현대인의 초상 문제다. 세 번째 것을 행정과 국세, 그리고 입법의 문제로 보면 피상적이다. 시민의 생계와 활로 문제, 또 국가의 존립이유 문제다. 사회적 경제를 이뤄가는 시민 소비자의 고민인 것이다. 코로나 위기 이후 개인의 삶에 불어닥친 징후들은, 정작 사회적 과제만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안 보인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 나타나는 필요와 욕구를 지켜보면,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결핍들이 제대로 보인다.
이제는 당황스럽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파장이 어디까지 일지? 이미 경계의 선을 넘은 지는 오래다. 전 세계의 모든 국가와 산업전반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 끝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걱정이다. 종식을 선언하는 국가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국가는 재유행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도권뿐만 아니라 중국의 베이징도 최근 징후에 민감한 이유이다. 재유행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미래준비를 위한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고 있다. 관광 또한 코로나로 인한 트렌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이달 16일 의미 있는 분석자료를 발표했다. 비대면(Untact) 시대의 국내 관광행동 변화이다. 지난 1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21주간 통신사의 빅데이터로 국내 관광객의 이동패턴과 행동변화를 분석했다. 근거리(Short distance), 야외활동(Activity) 가족 단위(Family), 자연 친화(Eco-area), 인기 관광지(Tourist site) 관광 수요회복 조짐은 아직(Yet)이란 키워드를 뽑아내 SAFETY(안전)란 말로 정리했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영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관광도 변화시키고 있다. 수원화성은 한국관광공사에서 분석한 안전(SAFETY)의 대표적인 관광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수원화성 내 대표적인 장소는 행궁동 감성카페이다. 낙후된 원도심이었던 과거에 2013 생태교통 페스티벌을 통한 기반시설 조성, 2016년 수원화성 관광특구 지정에 따른 규제 완화, 루프탑(옥상) 허용 등이 큰 영향요인이었다. 다양한 카페와 특색있는 먹거리가 입점되기 시작했고, 이후 성황을 이루었다. 부정적일 것 같았던 코로나 영향은 특색있는 원도심 감성 콘텐츠와 수원화성이라는 장소적 특성이 시너지로 작용하여 더더욱 주목받고, 독특한 여가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다음 장소는 용연이다. 용연은 수원화성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최근에 큰 변화가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실내보다는 야외활동을 선호하는 관광트렌드 변화와 주변 상권의 절묘한 마케팅전략에서 시작되었다. 화홍문 인근 카페에서 방문 고객들을 위해 바이러스 영향이 덜한 야외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커피, 와인, 돗자리, 꽃 등이 포함된 감성 피크닉 세트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대성공이었다. 주말뿐만 아니라 덜한 주중에도 많은 방문객과 카페 고객이 용연 주변을 수놓고 있다. 푸르름이 더해지고 있는 현재는 용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확장되고 있는 분위기다. 보고 있자면 옛날 추억의 감성 소풍이 재연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즈음 새롭게 유명 SNS의 해시태그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곳이 있다. 창룡문, 연무대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자녀 생일 등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주는 대표적인 장소로 급변모되고 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옷을 입고 고즈넉한 옛것을 간직한 창룡문과 연무대를 배경으로 함께 힐링하고 기념하기 위해 기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수원화성은 코로나19가 만든 관광트렌드, 안전(SAFETY)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참 힘든 시기이다. 수원화성은 삶의 활력 창출을 통해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는 관광지의 역할을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현재 멈춰있기는 하나, 밤이 주는 즐거운 정감 화성행궁 야간 재개장, 2020 한국관광공사의 야간관광 100선으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수원화성 야경과 연계된 성곽길 야간투어, 8월에 예정되어 있는 수원문화재 야행 등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용연에서는 특수조명과 영상이 어우러진 야간 상설 특별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주간의 감성 피크닉과 야간의 성곽길 투어까지 연계할 예정이다. 아직 우리 생활은 코로나와 함께하고 있다. 수원화성의 운영은 코로나19의 확산방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활력을 수원화성에서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제공하고 싶다.
한동안 온 겨레를 기대에 부풀게 했던 한반도 평화 시계가 북한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를 기점으로 거꾸로 돌고 있다. 일부 탈북인들의 대북 전단 살포를 맹비난하던 북한이 이번에는 1천200만 장의 대남전단을 살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북한의 ‘삐라’ 전쟁 선언의 배경에 대내적 목적이 더 짙다는 사실이 허탈감을 부른다. 시대착오적이고도 무의미한 남북의 전단 살포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이런 유치한 소모전은 그저 미래를 망칠 따름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2일 1면에 ‘분노의 격류, 전체 인민의 대적 보복 열기’ 제목으로 “중앙의 각급 출판인쇄기관들에서 1천200만 장의 각종 삐라를 인쇄했다”며 “22일 현재 3천여 개의 각이한 풍선을 비롯해 남조선 깊은 종심(중심)까지 살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살포기재·수단이 준비됐다”고..
스마트 기기의 보급과 함께 방송이 가능한 플랫폼들이 생겨나며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다. 그로 인해 콘텐츠의 흡수 속도와 정보 전달의 호흡이 빨라진 지금, 다양해진 주제와 개성 있는 표현 방식으로 만들어진 미디어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되고 있다. 아울러 짧은 길이의 영상 클립과 같이 자신의 창구를 통해 편하게 공유할 수 있는 볼륨의 미디어가 대세를 이룬다. 몇 해간 폭발적으로 증가한 유튜브와 넷플릭스 시장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러한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시청하는 이들에게 맞춤된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며, 더욱 단단한 팬층을 만들어가고 있다. 미디어의 소비 형태가 변화한 것이다. 이에 반해 전통적인 미디어 매체인 지상파 방송국들은 점점 외면받고 있다. 사실 지상파의 위기설은 몇 해 전부터 대두되었다. 기존의 TV 매체들이 뒤늦게 OTT(Over The Top)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도 제작, 편성에 있어 보수적이다. 시스템 특성상 속도 및 개인화 면에서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시청자의 감소세는 비교적 빠르게 느껴진다. 게다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 세대의 트렌드와 광고 시장의 변화는 뉴 미디어와의 경쟁을 더욱 버겁게 만들고 있다. 가끔은 세간에 인기를 끌고 있는 뉴 미디어의 영상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파일럿 방송이 지상파에서도 탄생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대부분 접근 방법도 서툴거니와 우여곡절 끝에 정규 편성이 됐다 하더라도, 이미 그 유행의 유통기한이 끝난 콘텐츠는 시청자에게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새로운 모험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방법으로의 선회와 복제가 이어지고, 젊은 세대보다는 나이 든 세대에 초점을 맞춘 편성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TV 방송국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트로트 붐이 일었다. 작년부터 몰아친 트로트의 열풍은 미스터 트롯을 기점으로 그 기세가 더욱 무서워졌다. 타 장르의 음악에 비해 비교적 소외되었던 장르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반기던 사람들도, 이제는 각 방송국에서 쏟아내는 압도적인 물량에 당황하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요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방송이 트로트로 채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음악 장르의 한정된 가수들이 모든 지상파 프로그램에 걸쳐 이렇게 광범위하게 소비되었던 전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가요대상을 휩쓸었던 슈퍼스타들도 이렇게나 바쁘게 불려 다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 현상은 이전의 관찰 예능, 먹방 또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무한 자가 복제를 하던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에는 프로그램의 포맷 즉 하드웨어를 복제했다면, 지금은 소프트웨어를 기존 하드웨어에 복사해서 넣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보니 단기적으로는 강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에 반해 시청 피로도는 증가한다. 물론 이것은 방송국 측의 선택과 집중의 고민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면 돌아선 2049 세대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기업에게 있어 효율은 중요하다. 다만 현재 미디어 시장에서의 경쟁력으로 본다면 그것이 첫 번째 잣대가 될 수 없다. 안전함을 추구하는 소극적 행보는 현시대의 흐름 속에 자발적 격리를 하는 것과 같다.
특례시(特例市)는 몇몇 도시에만 특혜를 주자는 제도가 결코 아니다. 자치분권의 상징이다. 자치단체규모에 맞게 자치권한과 재량권을 부여하자는 취지다. 인구5만~10만의 시(市)나 100만이 넘어가는 시나 자치권한이 같다면 그게 올바른 지방자치인가. 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입었던 교복을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그대로 입고 다니란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과거에는 인구 100만 명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광역시 승격을 추진했다. 정부는 1997년 7월 울산광역시 승격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광역시 승격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도시와 시민사회는 변했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 행정, 재정규모 등도 지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특례시는 별도로 광역시에서 떨어져 나가자는 취지가 아니다. 현재대로 지방자치단체 지위를 유지하면서 광역시급의 걸맞은 자치권한을 확보해 행정복지 서비스를 제대로 시민들에게 제공하자는 새로운 지방자치의 유형일 뿐이다. 광역 도에서 별도로 떨어져 나가는 독립 지자체가 아니다. 행정수요는 날로 폭주하는데 시 규모가 크던 작던 동일한 규정을 적용 받아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기에 그렇다. 지난 2018년부터 인구 100만을 넘은 수원, 창원, 고양, 용인시 등 4개 도시가 줄기차게 특례시 추진을 위해 달려왔다. 토론도 하고 국회에 달려가 1인 시위도 하고 여론에 호소하기도 여러 차례 했다. 그 결과 지난 해 3월26일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국회로 옮겨온 법안은 14개월 동안 잠잤다. 20대 국회 파행으로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그마저 폐회를 앞둔 행정위 법안심사소위가 열렸다. 하지만 별다른 진전을 못해 본회의 상정이 무산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국무회의까지 통과된 것이 아닌가. 20대 국회 무능함의 소치이자 직무유기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상정을 미룬 것인가. 자치분권은 문재인 대통령 후보 당시 공약이 아닌가. 지방분권을 열망하는 기초지방정부와 시민사회에 실망을 안겨줬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특례시는 자치분권의 상징이다. 이유가 타당하고 충분하다. 새로 출범한 제21대 국회에 희망을 걸어본다. 지자체장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치단체장을 경험하면서 피부로 느꼈을 이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만큼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이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다시 고삐를 당겨야 한다. 헌데 이제껏 추진해 온 100만 도시의 특례시에 찬물을 붓는 격의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정부가 입법예고 했다. 특례시 기준을 100만이 아니라 50만이 됐다. 정부안이 통과되면 수원, 창원, 고양, 용인 4곳 이외에 12곳이나 늘어난다. 울산광역시에 살면 210명이 공무원 한 명의 지원을 받는다. 100만 도시는 평균 362명이 공무원 한 명의 보호를 받는다. 특례시는 광역시와 현행 기초시에서 오는 차별을 없애자는 거다. 갑자기 50만 명 이상으로 하는 정부 안이 나오자 50만 턱에 걸려있는 시들이 가만히 있질 않는다. 자짓하면 지자체간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 특례시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당초 안과는 달라졌다. 자칫하면 이도 저도 아닌 누더기가 될까 걱정이 앞선다. 특례시 기준을 완화해 달라는 건의, 인구 등 단일기준보다 지역실정을 고려한 다양한 요소가 반영돼야 한다는 논리, 특례시가 수도권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돼 비수도권 50만 이상, 수도권 100만 이상으로 하는 개정안 등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쉽지않을 듯하다. 지방자치 논리를 보면 기준을 인구 100만으로 하는 게 적정할 듯하다. 현행법은 지자체의 종류를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 도, 특별자치도와 시·군자치구로 규정하고 있다. 울산이 광역시 대열에 합류한 이후 23년 간 인구는 늘어 대도시가 되었지만 광역시 추가 지정은 없는 상태다. 기존에 속에 있는 도(道)에서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광역시에 버금가는 혜택을 주자는 취지가 아닌가. 특례시는 특별한 예우를 받는 게 아니다. 행정명칭 부여다. 물론 이름뿐인 특례시는 아니다. 자치행정과 재정분야에 폭넓은 재량권을 나눠주어야 한다. 그게 1988년에 부활한 지방자치의 본질이 아닌가. 이제 인구 100만의 도시는 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때다. 그래야 재정수입이 늘어나고 도시브랜드 상승으로 도시경쟁력과 시민의 품격이 올라간다. 멈추지 않고 특례시를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엄마를 일찍이 여윈 콩쥐에게 계모가 생긴다. 온갖 학대에 시달린다. 급기야 계모의 지시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누구나 아는 우리의 전래동화의 내용이다. 예로부터 의붓자식은 학대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콩쥐 팥쥐 얘기가 실감 나는 요즈음이다. 연일 아동학대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계모가 의붓아들을 여행용 가방 속에 가둬 체벌하다가 질식하여 사망했다. 또 9살 의붓딸을 굶기고 후라이팬으로 지져 지문을 없애고 그것도 모자라 목을 목줄로 묶어 다락방에 가둬놓았다. 그래놓고 아동 양육수당을 신청하기까지 했다. 만약 그 여자아이가 목숨을 걸어 탈출하지 않았다면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엽기적인 학대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아동학대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아동학대가 저질러졌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때마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원인을 진단하고 대책을 세우고 금세 아동학대 문제를 해결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유사한 사건이 저질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의 학대가 저질러지는지 모른다. 물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웃의 투철한 신고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미성숙한 아이를 대상으로 저질러지고 있어 학대를 당하는지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설령 발견하더라도 조치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 창녕 아동학대가 그렇듯이 이런저런 법률과 제도에 얽매여 있다. 재발 방지대책을 세우거나 조치하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방법을 만들더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야말로 뾰족한 대책이 있을 수가 없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그러려니 넘겨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엽기적인 아동학대에는 공통점이 있다. 계모나 계부가 주도하고 친모나 친부는 묵인 방조하고 있다. 어쩌면 재혼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요즘 가정이나 결혼에 관한 생각이 달라져 있다.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인내하지 않는다. 재혼가정이 많아지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인기리에 방영되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중년 남녀 연예인이 출연하여 자신들의 신변잡기를 얘기하고 함께 모여 이런저런 게임도 한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대부분 ‘갔다 온 사람’들이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프로그램이 있다. 그 프로그램도 결혼 적령기를 넘긴 남녀가 주인공이다. 또 초대되는 출연자들 대부분도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이다. 두 프로그램 출연자에게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나름으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그런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어 웃음을 주고 응원을 보내게 하며 감동을 자아낸다. 또 그 출연자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지점이 되기도 한다. 한데 그들에게서 결혼이라는 중요한 명제가 가볍게 여겨지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하다. 물론 방송의 의도를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필자의 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것이다. 그냥 예능을 예능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각자의 방식대로 사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방송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하루아침에 무명인사가 유명인사가 되기도 한다. 시청자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각도가 다를 수 있다. 또 그 파장도 예측할 수가 없다. 자신의 혀도 가끔 깨물기도 한다. 하물며 성인이 되어서 남남이 만났다. 서로에 대해 만족할 수가 없다. 인내하고 양보해야만 가정이 바로 설 수가 있다. 물론 아동학대와 그 어떤 인과관계가 없다. 아무런 단서나 근거도 없다. 분명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더라도 왠지 두 장면이 겹쳐지는 이유는 뭘까.
문재인 정부 출범 37개월 만에 21번째를 기록한 ‘6·17 부동산대책’을 놓고 말이 많다. 투기꾼 뒤만 쫓아다니는 듯한 거듭된 대책을 놓고 ‘땜질’, ‘무리수’, ‘규제의 악순환’, ‘반시장 정책’ 등의 비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정권에서만 스무 차례를 넘게 내놓고 있는 ‘두더지 잡기’식 정책을 보면서 규제 만능주의를 뛰어넘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투기가 일어나는 요인을 분산하는 방향도 모색해볼 만하다. 정부의 21번째 부동산대책의 초점은 수요억제에 맞춰졌다. 풍선효과를 막기 위해 수도권 서쪽과 대전·청주 등을 조정대상지역과 투기과열지구에 포함했다. 대책의 또 한 줄기는 서울 강남과 목동 등 수요집중지역에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를 막는 방안이 집중됐다. 잠실 MICE 개발사업 등의 영향권에 있는..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남북관계가 중대 위기에 처했다. 코로나19의 2차 대유행 우려, 경제난 심화에 안보위기까지 문자 그대로 나라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국회는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이건 고통받고 있는 주권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선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일방독주의 과속을 멈추고 제1야당에 보이콧을 접을 명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통합당 또한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5일 단독으로 법제사법위원회 등 6개 상임위 위원장을 선출한 뒤로도 강경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에선 19일까지 통합당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예산결산특위 등 12개 상임위 위원장까지 민주당 의원들로 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집권당의 조급한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안산시가 ‘우리 밀 익는 국수마을’을 조성하기로 한 가운데 16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대부 우리밀·콩 영농조합법인, ㈜우리밀과 업무협약을 맺었다. 대부도에서 생산되는 밀의 생산·유통·소비 활성화를 위한 것이다. 앞으로 안산시는 대부도 밀의 안정적 생산과 소비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aT는 국산 밀가루 판로 확대를 위한 프로모션 등을 지원한다. ㈜우리밀은 대부도 밀을 전량 수매하며, 대부우리밀·콩 영농조합은 양질의 밀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울러 상인회와 힘을 합쳐 대부도 방아머리 음식 거리를 ‘우리 밀 칼국수 거리’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현재 경기도내에서 소문난 특화 음식거리는 수원의 통닭거리와 순대 타운, 의정부 부대찌개거리, 성남 남한산성 닭죽촌, 가평 운악산우리콩 두부마을, 화성 제부도 모세거..
용서란 무엇인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준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부당한 해를 입힌 사람에게 분개, 부정적 판단, 무관심함을 포기하고 그를 향해 연민, 관대함,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파울 뵈세는 ‘용서는 과거를 변화 시킬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푼푼하게(옹졸하지 아니하고 시원스러우며 너그럽게) 한다’고 했고, 셰익스피어는 ‘용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보슬비처럼 온다. 이는 용서를 하는 자 뿐만 아니라 받는 자에게도 축복이다’라고 했다. 톨스토이는 ‘그대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고 용서하라. 그때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상처를 주기도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는 기억하지 못해도 남들이 자신에게 준 상처는 오래간다. 상처의 깊이가 크면 원한이나 미움, 증오, 복수심 등과 같은 이름으로 상흔(傷痕)이 남아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혹자는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라고 하지만 타인이 나에게 한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누군가에게, 그리고 과거 역사적 큰 사건으로 상처를 받았을 경우 용서는 더욱 어렵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는 비밀을 지키고, 용서하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그만큼 더 숭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를 배우고 실천해야하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용서는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며,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나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변화를 위한 나의 적극적인 ‘의지’에 달려있다. 부처님 말씀에 ‘원한을 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숯덩이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 화상을 입는 것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라고 했다. 용서는 잘못을 한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실천해야한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심리적으로 자신이 먼저 치유되어 내 마음에서 용서 받아야할 사람, 그리고 그 과오를 놓아줌으로써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남을 위해 베푸는 이타적 마음인 동시에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용서란 잘못을 잊어버리는 망각이 결코 아니며 타인에게 베푸는 자선도 아니다. 어찌 보면 타인의 잘못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 지고자하는 정신적 날갯짓이자 비상(飛上)인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스스로가 홀가분하게 정신적, 평화와 발전 할 수 있는 것, ‘정신적 구원’이다. 데미언 부카이는 용서하는 사람들이 얻는 혜택에 대해 ‘상처받은 후에, 평화를 얻고 자유와 심리적 균형을 얻는 방법은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를 마비시키는 증오와 분노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분노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며 자생력이 있다. 분노가 강렬하고 우리의 삶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 끝내는 우리를 마비시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곧 우리의 정서적 삶을 제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만, 용서는 내 마음속에 가득 담긴 화가 녹아내리고 상처와 모욕이 씻겨 내려 우리를 자유롭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용서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하며. 그리고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고귀함, 관대함, 타인의 약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생활의 지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에 용서가 주는 혜택을 누리기 위한 ‘주저 없는 실행, 실천’이 필요하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삶의 지혜 중 가장 위대한 ‘사과’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용서받아야 할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한 반성과 사과는 커녕 미안한 마음조차도 없이 합리화하고 궤변을 늘어놓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 본인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다.’고 일관되게 부르짖는 뻔뻔함의 극치를 보이는 데도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용서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 대답은 각자의 판단과 결정에 맡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