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캐스린 비글로의 신작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다소 애매한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잘 만든 작품인 건 분명하다. 비글로는 힘 있게 밀어붙이는 연출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얘기를 듣는 여성 감독이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런 면에서 전혀 빠지지 않는다. 상업적인 감각도 탁월하다. 연륜(1951년생)을 무시하지 못한다. ‘허트 로커’로 아카데미 감독상(2010)을 탔던 기세가 여전하다. 그러나 이후 작품 ‘제로 다크 서티’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인 시선이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인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미국적 민족주의는 자칫 트럼프주의자처럼 보이게 한다. 이번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동해상 어딘가(영화에서는 동해가 아닌 일본해, Sea of Japan로 언급된다)에서 핵미사일이 발사되고 18분 후 미국 본토에 떨어진다는 경보가 발생한다는 설정이다. 미국 수뇌부는 대혼란에 빠진다. 이 영화는 미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얘기, 곧 본토 습격에 대해 말한다. 영화의 연출은 매우 치밀하다. 미사일이 떨어지는 과정만 담는다면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을 다 채울 수가 없다. 그런데 그 18분을 다중 시점으로 꾸미면 몇 배의 시간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게다가 그 다중 시점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첨가한다면 이야기 구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마치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의 전설 영화 ‘라쇼몽’처럼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분산시키되 그들이 취하는 대사, 액션은 하나로 묶어내야 한다. 그것을 캐스린 비글로는, 영리하게도, 극 중 인물들의 화상 회의를 통해 구현한다. 제목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 중 마지막 3부의 제목 ‘다이너마이트로 채워진 집(The House is filled with Dynamite)’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국은 핵으로 무장된 정도가 아니다. 핵미사일 수가 5천 개가 넘는다. 핵잠수함에 탑재돼있는 것만 해도 수백 개이다. 지대공미사일, 대륙간탄도미사일 등등 종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미국은 언제든 다른 나라를 공격할 수 있으며 공격받기 전에 초정밀 첨단 정찰 위성을 통해 이를 감지하고 당연히, 선제 타격을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정체불명의 미사일이 발사되고 그걸 감지하지 못한 채 이미 미국 본토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상황을 맞이한다. 날아오는 물론 미사일을 공중에서 제거할 수는 있다. 지대공미사일로 정밀 타격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로 무장된 미군은 그 연습을 수십, 수백 번 해왔다. 그래서 맞춤형으로 요격 미사일을 발사한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타격에 실패한다. 미국방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눈앞에서 뼈저리게 깨닫기 시작한다. 미사일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요격 지점은 시카고이다. 인구만 천만 명이다. 시카고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일리노이주 전체, 그 주변 주, 미국 동부 전체이다. 사망자가 수천만 명은 될 것이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는 다양한 군사 용어가 나온다. 무엇보다 각종 기밀 부서 명칭이 나온다. 그것을 다 따라갈 필요는 없다. 따라갈 수도 없다. 이 영화의 목표는 방대한 군사적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게 다 사실은 필요가 없는 데다 무엇보다 무의미하다는, 군사적 무정부주의의 혼란상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알고 가면 좋은 몇 가지 용어는 있다. 바로 데프콘이다. 영어로는 DEFCON이며 풀어 쓰면 ‘Defense Readiness Condition’, 곧 방어준비태세로 번역된다. 평상시 모든 군부대는 데프콘 5인 상태이다. 한반도는 평시가 데프콘 4이다. 데프콘 1은 전쟁 상황이다. 영화는 미사일이 발사되고 몇 분이 지나 미 전군에 데프콘 1이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긴장감이 극장 안 전체를 채울 만큼 캐스린 비글로의 서스펜스 연출 감각은 탁월하게 전개된다. 1부는 국제 군사전략 분석실 워커 대위(레베카 페르구손)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상관인 밀러 대령(제이슨 클라크)과 이 문제를 최고 전문가답게 차분하게 대응해 나간다. 특히 밀러 대령은 중국 러시아 북한, 특히 북한의 오작동 발사일 수 있다는 등 여러 각도의 가설을 내세우며 지금까지 벌어진 미사일 사태가 해프닝으로 끝난 적이 많았음을 얘기한다. 그는 분석실의 소요를 가라앉히려 애쓴다. 밀러는 지정생존자이다. 만일을 대비해, 그리고 미 정부의 지속성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정부 요직의 인물이다. 밀러 대령은 곧 레이븐 록(레이븐 록 마운틴 콤플렉스. 미국방부가 핵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구축해 놓은 초대형 지하 벙커로 펜실베이니아주와 메릴랜드주 경계에 있는 블루리지산맥 안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으로 옮겨진다. 남겨진 워커 대위는 전 군 수뇌부와 국방부 장관, 대통령과의 화상 회의를 지켜보며 이 사태가 가상의 연습이나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지구 멸망의 수준으로 다가오는 갑작스러운 죽음에 직면하면 거의 대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그래서 상대에게 전화를 건다. 워커 대위도 전화 통화를 한다. 남편에게 한다. 남자는 하루 월차를 냈다. 둘 사이의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워커는 남편에게 가능한 한 서쪽으로, 계속 서쪽으로 달리라고만 말한다. 2부에서 화자의 중심이 되는 국방부 장관 리드 베이커(자레드 해리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시카고에 사는, 아내의 죽음 후 다소 소원해진 딸과 개인 전화를 서두른다. 그는 딸에게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지만, 그녀가 곧 죽을 것을 안다. 베이커 장관은 딸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는다. ‘진지한 관계’냐고 물으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베이커는 레이븐 록으로 가는 헬기를 긴급하게 타는 과정에서, 놀라운 선택을 한다. 베이커의 선택은 이 영화에서 가장 놀랍고 충격적이며 가슴 아프다.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3부의 주인공인 대통령(이드리스 엘바) 역시 케냐에 가 있는 자신의 퍼스트레이디(르네 엘리스 골즈베리)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미국의 상황을 알려 준다. 대통령은 자기 군사 참모나 수행 보좌관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 순간 대응 핵전략을 결정하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대응 핵을 중국과 러시아, 북한 등을 향해 발사할 것인가. 군 수뇌부의 리브스 중장(조나 하워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국을 종이호랑이라고 생각하는 가상의 적국들이 제2, 제3의 미사일을 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것이 대규모 핵전쟁을 유발하게 되고 전 세계의 멸망을 가져오리라 생각한다. 대통령은 동물보호 캠페인을 위해 케냐 초원에 가 있는 아내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단추를 누를 것인가, 아니면 1%라도 오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경고의 영화이다. 시카고가 불타는 장면, 사라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 시카고, 일리노이주, 미국의 동부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미국이 자랑하는 군사력이 결국엔 다이너마이트로 채워진 집에서 살아가는 꼴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만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핵무기의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영화는, 매우 엄격하고 진지한 시선으로 묻고 있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지닌 궁극의 주제이다. 멀티캐스팅이 돋보인다. 미국 본토 공격이라는 설정에 스타와 무명 연기자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는 듯, 다들 자신이 맡은 배역에 잠깐씩 등장한다. 레베카 페르구손('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가브리엘 배소(영국 시리즈 '보디가드'로 유명해졌다), 그레타 리(셀린 송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 나온 한국계 배우로 북한 전문가로 나온다), 제이슨 클라크('터미네이터: 제네시스'에서 존 코너 역) 등은 단박에 알아볼 스타급 배우들이다. 이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10월 24일 공개되지만, 그 2주 전 가량을 앞서 극장에서 개봉 중이다. 이미 베니스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극장 관객들은 그리 많지 않다. 넷플릭스 공개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414호로 들어가. 그러면 거기에 캐비닛들이 죽 있고 딱 하나 이름이 쓰여있어. 그걸 열고 들어가. 통로가 있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끝까지 가. 그러면 방이 나와. 거기에 식칼들이 있고 깨끗한 게 딱 하나야. 세상에서 사용하는 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피야. 알았지? 이건 당신이 얼마나 원하는가에 달려 있어. 정말 원하는 것을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바칠 수가 있어?” 영화 ‘귀시’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이다. 수험생 딸 수연(배수민)의 엄마(서영희)는 딸의 성적을 위해 귀신과 거래한다. 더 정확하게는 필요한 귀신을 산다. 엄마 영화의 다른 부분은 안 무섭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무서워진다. 공포영화가 안 무서우면 오히려 (약간 화가 나서) 무섭다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귀시’는 무서운 영화가 아니라 팬시한 영화이다. 공포로 세상을 느끼고 해석하기보다 놀이공원에 있는 ‘공포 체험’같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 아니면 방 탈출 게임 같은 것이다. 이런 건 돈이 아깝지는 않다. 한번은 제대로 즐겼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시’ 같은 영화를 두고 흔히들 팝콘 영화라 부른다. 작품성 얘기는 노, 옆에서 부스럭부스럭 팝콘을 뒤져 가며 먹어도 예스, 웃고 떠들고 낄낄대도 예스, 제발 심각한 얘기는 노, 하는 영화이다. 한때 유행했던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1999)이나 제니퍼 러브 휴잇이 나왔던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8) 같은 영화가 바로 팝콘형 공포영화들이다. 사람들은 이들 영화를 보면서 제발 어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를 기다렸다. ‘스크림’은 6편까지 나왔으며 심지어 2026년 2월 7편이 공개될 예정일 정도이다. 사람들은 웃는 공포, 즐기는 공포의 맛을 잊지 못한다. 영화 ‘귀시’의 한자 제목은 ‘鬼市’, 곧 귀신 시장이다. 귀신을 사고판다는 얘기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귀신과 무언가를 거래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채원이라는 여성(문채원이 자기 이름 그대로 나왔다)은 성형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조금 깊게 가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이야기로 연결되면 좋겠으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혼을 두고 계약하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얘기까지 얹히면 고급스러워질 수 있겠으나 영화 ‘귀시’는 그러지 않는다. ‘귀시’는 귀신과 영혼을 걸고 거래하는 이야기가 기본값, 기본 설정이지만 정작 이 영화의 감독은 실제로 귀신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채원은 옆집에서 훔쳐 온 택배 상자에서 코와 눈을 바꾼다. 그녀는 예뻐지고 젊어지지만, 당연히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귀시’의 이 에피소드는 마치 코랄리 파르자가 만든 프랑스 영화 ‘서브스턴스’(2024)를 닮아있는 느낌이다. 무섭지는 않지만 끔찍하고 혐오스럽다. 영화에서 채원은 끊임없이 자기 코에 신경을 쓴다. 친구에게 성형을 의논하지만 돈 3백은 들어갈걸?, 이라는 말에 좌절한다. 영화 ‘귀시’의 특징은 분절적이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있다. 유명 작가를 꿈꾸는 여성 미연(솔라)은 시골 마을의 레지던스에 있다가 마을의 수호신 같은 나무가 피를 먹으면 꽃을 피우는 장면을 보고 경악한다. 이 꽃은 결국 그녀의 얼굴, 목 같은 데서도 자라기 시작한다. 그녀는 꽃을 잘라 내려 애쓰지만 결국 자기 얼굴을 도려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리한 수사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 경찰 동식(유재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마를 좇다가 414호로 연결되는 공간에서 사투를 벌인다. 만약 그가 욕심을 내지 않고 적절한 때 지원 요청을 받았다면 후배 경찰(차선우)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신세진(손주연)은 ‘인싸’가 되고 싶은 욕망에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굳이 갔다가 사고를 당한다. 모든 등장인물은 하지 말아야 할 것,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면서 사고를 당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귀신을 만났을 때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말라 했거늘, 꼭 그 두 눈을 쳐다봐서 변을 당한다. 악마의 눈을 쳐다보거나 그를 만지거나 하지 말라는 것은 서구 공포영화에서도 흔히 나오는 밑자락이다. 서구 신화의 이야기 중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명계(冥界)에서 구해내 오면서 이승으로 나가기 전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를 듣지만 출구 바로 앞에서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왔는지를 확인하고자 뒤를 잠깐 돌아보고 만다. 아내는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다시 끌려간다. 구약에 나오는 롯의 아내 역시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질 때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된다. 수험생 딸의 엄마가 414호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귀신과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엄마가 변을 당한 것은 딸 가방에 붙여둔 부적이 딸 친구들이 밀치고 당기고 하는 과정에서 그만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는 짓, 하지 말아야 할 행동, 곧 금기의 규율에서 벗어나면 안 될 일이다. 드라큘라는 상대가 들어오라고 하기 전에는 결코 문 안쪽으로 들어 오지 못한다.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드라큘라는 상대에게 유혹적인 포즈로 얘기한다. 렛 미 인. 의역하면 내게 들어오라고 얘기해줘. 악마와 귀신은 나 자신이 직접 불러오는 것이다. 내가 부르지 않으면 귀신은 내 안에 들어 오지 못한다. 영화 ‘귀시’는 바로 그 이야기를 12세~17세 아이들을 상대로 쉽게 풀어서 얘기하려 애쓴 영화이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청소년 등장인물이 아이돌 출신인 것은 그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과도한 욕망 때문이다. 사람은 욕망이 지배한다. 예뻐지고 싶고 자식을 의대에 보내고 싶으며 나 혼자 범인을 잡아 출세하고 싶어진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인정욕구와 매명욕(賣名慾), 현시욕은 현대사회가 겪는 병리 현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 고리이다. 인정욕구를 줄이거나 없애면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절대로 이름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귀시’가 어리고 젊은 관객들에게 말해 주는 이야기이다. 영화 ‘귀시’는 안 그런 척 사실은 귀신과 거래를 하긴 한 셈이다. 이 영화가 가장 공들인 부분은 마지막 에피소드이고 베트남 여학교 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결국 ‘귀시’가 노리고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젊은 관객들로 넘쳐나고 있는 베트남 영화시장이다. 베트남과의 공동제작, 협업을 진행한 셈이며 그러기 위해 가장 단순하고 쉬운 서사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인다. 출연 배우들을 베트남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한국 아이돌 출신(솔라, 차선우, 배수민, 서지수, 손주연)으로 채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만든 홍원기는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답게 촬영, 조명 등에는 일가견이 있다. ‘귀시’는 겉모양새가 아주 좋다. 세련된 옷을 입은 양한다. 홍원기는 ‘서울괴담’(2022)으로 속칭 재미를 좀 봤다. 옴니버스 공포영화이다. 이번 ‘귀시’도 옴니버스이다. ‘귀시’는 또, 팝콘 영화답게 유행을 창조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양손의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맞대 여우 모양의 창을 만들면(이게 왜 여우 모양인지는 모르겠으나) 귀신의 문이 열린다. 마치 분신사바처럼. 마치 캔디맨처럼. 거울을 보고 캔디맨을 다섯 번 부르면 안 된다. 과거 목화농장의 흑인 노예가 악마가 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청소년 중 호기심으로 손가락을 이용해 여우 창을 만들어 상대를 들여다볼지 모를 일이다. 아, 그러지 말라니까! 영화 ‘귀시’는 9월 17일에 개봉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임오경은 대한민국 여자핸드볼 국가대표 출신이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 임순례 감독, 2008년)의 실제 모델이다. 2020년 21대 국회에 들어와 이번 22대에도 당선됐다.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친(親)영화파이다. 그런 그녀가 지난 9월 13일 '영화와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핵심적인 내용은 홀드백의 법제화이다. 임오경은 핸드볼을 하듯, 영화계 내의 계륵(鷄肋, 닭의 갈비, 실속은 별로 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인 홀드백 문제에 슛을 던졌다. 홀드백(hold back)이란 쉽게 말해 극장에서의 상영을 일정 기간 독점화하는 것을 말한다. 한 편의 영화가 나오고 그것을 비디오로 출시(한다는 것은 구시대의 얘기이며 요즘 같은 때에는 케이블TV나 VOD, OTT 같은 다른 플랫폼에 노출하는 것) 하기까지 일정 기간을 강제로 못하게 한다는 얘기이다.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는 일정 기간이 지나야만 다른 데서도 볼 수 있게 된다. 임오경 의원 법안의 핵심 내용은 이 기간을 6개월로 한다는 것이다. 이건 친 영화 정책이라기보다는 친 극장 정책이다. 비(非) 극장 측, 그러니까 수직 계열 회사의 배급사(CJ나 롯데처럼 배급사와 극장 체인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회사들)를 제외한 독립 배급사들의 반발과 제작자, 감독, 대다수 영화인의 불만이 이어지는 이유이다. 6개월은 너무 길다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영화의 수익을 최대화하는 데 있어 극장 외의 다른 쪽에서는 큰 장애를 겪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기간이 길게 잡아도 대략 한 달인 현실에서 그것을 6개월간이나 다른 플랫폼으로 넘기지 못하도록 묶어 부가 수익 창출을 어렵게 한다면 영화 비즈니스의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주일 전에 개봉한 공포영화 ‘홈캠’의 경우, 극장 종영이 길어야 한두 주 더 갈 것으로 보인다. 빨리 부가 수익을 내야 제작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 임오경의 법제화는 이걸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박찬욱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나 메이저급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서울의 봄’ ‘야당’ 등)의 신작 ‘보스’의 경우 추석 연휴를 넘어 롱런할 작품들이다. 이런 흥행 영화의 경우 극장 측에서는 6개월까지 손에 쥐고 있고 싶어 할 것이다. 극장은 극장대로 최고 흥행 영화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고 제작자나 감독은 흥행이 안 될 경우를 염두에 둘 것이다. 각자 보수적으로 사안을 바라볼 것이다. 합의점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6개월을 3개월 안쪽으로 줄여 나가는 것이다. 극장 대 비(非) 극장 양측의 주장을 실용적으로 좁혀 나가고 타협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1인 시네마를 표방하며 만든 최극단의 독립영화 ‘더 자연인’을 6개월까지 극장에 묶어 놓는 건 의미가 없다. 최고의 수작 소리를 듣는 ‘3학년 2학기’나 ‘3670’같은 독립영화의 경우 빨리 홀드백을 풀어 줘야 다음 작품을 기획하고 만드는 데 차질을 빚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홀드백 문제는 지금 ‘영화판’의 문제에 있어 메인 코스 요리가 아니다. 사이드 메뉴 중에서도 사이드 메뉴이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시간을 소진하기에는 지금 ‘영화판’의 현안이 쌓이고 쌓여 있다. 홀드백 문제로 영화계가 분열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임오경이 던진 만큼 임오경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홀드백을 현실화하고 한층 더 큰 영화계 이슈로 나가야 한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붙어 다니는 연인들에게 흔히들, 비속어까지는 아니더라도, ‘껌딱지’라는 표현을 쓴다. 껌처럼 붙어 있다는 건데, 다소 양가적(兩價的)인 의미를 지닌다. 그만큼 사랑하는 관계라는 뜻도 있지만 껌이 끈적거리고(sticky) 눌어붙는 것처럼, 다소 지겨운 사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미국의 저예산 상업영화(제작비 1700만 달러, 약 237억 원) ‘투게더’는 좋아 죽지도, 그렇다고 이제는 싫어져서 헤어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권태기 연인의 끔찍한 에피소드를 그린 바디 호러 로맨스다. 바디 호러라는 말은 영화사가 마케팅으로 만든 조어이다. 영화 속 두 연인, 팀(데이브 프랭코)과 밀리(앨리슨 브리)는 몸이 붙는다. 키스하면 입술이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다리 포개고 잠이 들면 다리가 들러붙는다. 섹스하면 서로의 몸에서 나오지 못한다. 둘의 육체는 점점 기형화되고 둘의 정신도 점점 광기에 휩싸인다. 영화 ‘투게더’의 기본 콘셉트는 ‘트랜스 휴먼’이다. 영화는 한때 남녀가 바뀌는 것을 갈망했다. 숱한 트랜스젠더영화들의 존재가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줄곧 인간과 이종 간의 뒤섞임을 꿈꿔 왔다. 캐나다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 ‘비디오드롬’(1983) ‘플라이’(1988) ‘크래쉬’(1996) 에서 시작돼 쥘리아 뒤쿠르노의 ‘티탄’(2021)에 이르기까지의 작품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꿈꾼다.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2025)도 어떻게 보면 인간 간의 기이한 결합, 그 하이브리드를 욕망하는 영화이다. 호주 출신 마이클 생크스의 영화 ‘투게더’는 그 과정의 고통과 자칫 추악할 수 있는 결과를 경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 ‘투게더’의 수위는 ‘서브스턴스’마냥 혐오스럽거나 어둡지 않다. 오히려 귀여운 측면이 있다. ‘투게더’는 한편으로 사랑에 지친 연인들의 얘기를 담고 있고 일부 극단의 장면들을 빼고 생각하면 나름, 고단백의 연애 보고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은 그래서, 동일시의 단면이 많은 작품이다. 보기에 따라 다 달리 보이고, 관객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별도의 해석을 가하며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얘기이다. 의학적으로 몸이 들러붙거나 살과 뼈가 섞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음 두 사례는 가능하다. 우선, 샴쌍둥이가 그렇다. 의학 용어로는 결합쌍생아이다. 목과 얼굴이 두 개이다. 내장 기관을 공유하기 때문에 분리 수술을 통해 한쪽을 제거해야 생존확률이 높을 수 있다. 샴쌍둥이는, 영화에서, 주인공 밀리와 같은 학교 선생인 제이미(데이먼 해리만)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정상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팔과 다리가 각각 넷에, 머리는 하나, 얼굴은 둘이었는데, 인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꺼린 제우스에 의해 둘로 분리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후 늘 자신의 반쪽을 찾아 평생을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얘기이지만 동시에 끔찍한 얘기일 수 있다. 동료 교사 제이미는 자신의 연애담을 고백한다. 결국 자신도 그토록 사랑했던 동성 애인과 헤어졌고, 그래서 비참하고 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같이 있기를 욕망하지만, 막상 365일을 같이 있는 연인들은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한다. 영화 ‘투게더’는, 두 남녀의 몸이 뒤엉키고 섞이는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사실 그 속내로는 앞서 얘기한 연애의 진실, 연인이라면 진심으로 알아채야만 하는 진실, 곧 떨어질 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만큼 가까울수록 떨어져 있으라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몸이 들러붙는 의학상의 경우는 페니스 캡티부스(Penis Captivus) 사례가 있다. 섹스 중 여성 질 근육의 수축으로 질 내부 압력이 일시적으로 지나치게 상승해 남성의 성기가 빠지지 못하게 되는 일이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진단 사례들로 나와 있다. 영화 속에서 밀리와 팀도 이 같은 일을 겪는다. 두 남녀는 갑작스러운 아드레날린의 분출로, 밀리 학교의 남학생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맺다 봉변을 겪는다. 아마도 이 영화 ‘투게더’는 페니스 캡티부스 건의 에피소드에서 착안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여기서 시작해 만약에 남녀 간의 몸이 서로 살 속을 파고들며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사랑일까, 가짜 사랑일까 하는 질문들까지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사랑의 본질 얘기가 나오고 에리히 프롬의 소유 철학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까지도 검토되고 분석됐을 것이다. 밀리는 팀을 10년 전, 그가 25살 때 만났다. 밀리의 친구는 그녀에게 남자가 ‘아직도 록커를 꿈꾸는 철없는 서른다섯 남자’라며 핀잔을 준다. 밀리는 팀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서, 자기가 스파이스 걸스를 좋아한다고 하자 팀이 (록커를 꿈꾸니 그럴 법도 한데) 무시하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만남에 자신을 위해 LP를 사 들고 왔다며 그를 옹호한다. (영화 끝부분에 스파이스 걸스의 노래 '2 비컴 1’이 울려 퍼진다) 밀리는 팀을 사랑한다. 팀도 그렇다. 그러나 여느 연인이 다 그렇지만 둘은 살짝 지쳐 있는 중이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감행한 것이 시골로의 이사이다. 둘은 대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보려 한다. 밀리는 작은 학교로 부임한다. 팀은 도시를 오가며 연주 투어를 다닐 생각이다. 팀은 요리를 잘하지만, 운전은 할 줄 모른다. 밀리는 요리를 잘하는 남자 때문에 자신이 요리를 못 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팀은 밀리 없이는 기차역까지도 갈 수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집에 갇히게 됐다고 생각한다. 둘의 관계는 생각처럼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그런 둘이 주변 숲을 둘러보다가 구멍에 빠져 동굴에 갇히게 됐고 그 안에서의 어떤 것 혹은 무엇 때문에(곰팡이 같은 것, 혹은 정신적 착란?) 둘의 몸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투게더’는 아이디어가 발칙한 ‘새로운’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촬영이 어려운, 고난도의 테크놀로지가 동원돼야 하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만만치 않다. 노출면에서도 과감한 씬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장면들이, 어쩔 수 없이, 가장 돋보인다. 팔뚝이나 종아리가 들러붙는 것이야, 특수분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입술과 혀가 딱 달라붙는 씬은 두 남녀 배우의 노동력이 엄청나게 배어 있는 일이다. 이 퍼포먼스는 배우 사이가 평범해서는 쉽지 않다. 눈치챘겠지만 영화 주인공 역의 남녀는 실제 부부 사이이다. 극 후반부에 서로의 눈, 눈동자, 속쌍꺼풀, 눈알이 들러붙는 장면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찍었다. 이 장면이야말로 바디 호러 로맨스에 걸맞은 압권의 장면이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는, (잘못) 번역된 것처럼 '사랑의 예술(Art of Love)'이 아니다. '사랑하기의 예술(Art of Loving)'이다. 사랑의 본질은 완성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는 얘기이다. 밀리는 같은 학교 선생인 제이미를 만났을 때 자신과 팀의 관계를 부부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글쎄? 파트너일까? 라는 식으로 말한다. 밀리는 아직 팀과의 사랑, 그 콘셉트와 정체성이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한 경우이다. 만들어 나가는 중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사랑의 과정에 있을 때 모든 확신은 착시이다. 다만 서로가 끊임없이 확인하고, 성실하게 임하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뿐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가 아니라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 그 역설에 사랑의 진실이 있다. 영화 속 두 남녀는 몸이 섞이는 변화를 겪는다. 그 결과는 해피 엔딩일까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부모가 방문했을 때 밀리가 문을 여는 장면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마지막 장면도 나름의 의미가 크다. 바디 호러 로맨스 ‘투게더’는 지난 9월 3일 개봉했다. 14일 현재 관객 4만 명이 넘었다. 생각보다 썩 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흥미로운 작품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고 영화가 바뀌고 있으며 남녀 관계가 새로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국 영화사 소니 제작의 한국 영화 ‘살인자 리포트’는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댄디하고 세련된 장르영화처럼 보인다. 그건 순전히 배우들 때문으로 보이는데 정성일, 조여정의 도시적이고 모던한 이미지 덕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 영화가 꽤 지적인 게임이 동원되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어서이기도 하다. ‘살인자 리포트’는 일종의 밀실 살인극이다. 뭐 그렇다고 밀실 안에서 누가 죽고, 그 살인자가 밀실 안에 같이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마구 속출해서 도저히 살인자를 추정할 수 없는 식의 전형적인 밀실 수수께끼는 아니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캐릭터 에르퀼 푸아로 경감은 늘 말했다. “밀실 안의 살인 사건은 밀실 안에 같이 있던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만약 밀실 안에 죽은 사람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살인자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살인자 리포트’는 밀실 안과 밖을 오가려고 한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 ‘살인자 리포트’의 콘셉트이다. 밀실로 시작하지만, 범인은 바깥에 있음을 암시한다. 근데 과연 그럴까. 이것도 속임수의 속임수가 아닐까. 기자인 선주(조여정)는 요즘 코너에 몰려 있다. 한 내부 고발자로부터 국내 굴지 대기업의 산업 폐기물 비리 문제를 파헤치며 사회적 대 특종을 준비하던 중에 그녀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잃는다. 하나는 장부, 또 하나는 증인이다. 특히 이 내부 고발자는 어느 날 밤 교통사고로 위장돼 살해당한다. 게다가 신문사 감사팀은 대기업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약속받고 스스로 장부를 넘겨줬다고 선주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당연히 선주의 이런 사연은 영화 초반부에 구구절절 설명되지 않는다. 처음은 다소 뜬금없이 면도칼 얘기부터 시작한다. 선주는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어딘가로 가는 중이다. 그녀는 운전자에게 말한다. “예린이 때문에 걱정이야. 요즘 도통 말을 안 해. 그래서 슬쩍 걔 가방을 뒤져 봤는데 면도칼이 나왔어. 걱정돼 죽겠어. 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예린이(황시아)는 선주의 딸이다. 남자는 자기가 한번 대화해보겠다고 말한다. 이 짧은 자동차 내부 씬에서 몇 가지의 실마리가 제공된다. 여자는 지금 자신이 연쇄 살인자라고 주장하는 어떤 남자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이고, 운전하며 같이 가주고 있는 남자는 선주와 친구(이상의) 관계인데 형사라는 점이다. 형사 이름은 상우이다. 한상우 형사. 선주는 백선주. 영화는 본격적으로 사건을 전개 시키기 전 주요 인물의 배경을 설명해 낸다. 모든 스릴러 영화는 등장인물과 등장인물 앞에 벌어질 일들이 모두 ‘유관’하다. 그러니까 머리가 밝고 눈이 밝은 스릴러 팬들이라면 이런 사전 정보를 놓치면 안 된다. 선주는 스스로가 연쇄 살인범이라 주장하는 이영훈이란 남자를 만나러 한 고급 호텔의 펜트하우스로 올라간다. 바로 아래층에는 친구이자 내연남인 한 형사가 대기한다. 둘은 형사와 사건기자 출신인 만큼 도청과 도촬의 최신 장비를 다 동원한다. 안전판을 마련할 수 있을 만큼 다 마련해 뒀다. 그런데 한 가지, 선주가 호텔 프론트데스크에서 체크인하는 순간 인부들이 로비의 CCTV를 손보는 장면이 목격된다. 호텔리어가 말한다. “지금 호텔 내부의 보안시설을 점검하고 있어요. 곧 끝날 겁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스릴러 영화에서는 단 하나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선주가 만나는 연쇄 살인범, 지금까지 11명을 죽이고 지문이나 흔적을 일절 남기지 않은 용의주도한 범인은 예상대로 매우 깔끔하고 지식인 분위기가 나는 남자이다. 선주는 호텔 방에서 그를 마주한 후 일성으로 비슷한 얘기를 한다. “예상대로 시군요.” 선주는 살인자 이영훈이 화이트칼라 계층의 전문직 남성이라고 봤다. 살인 수법과 범행 은닉의 과정이 치밀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영훈이 정신과 의사임을 대화 초기에 밝힌다. 백선주와 이영훈의 만남의 조건은 단 하나이다. 영훈이 선주에게 독점 인터뷰를 제공하되 선주가 이를 공개한다는 것이다. 살인자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인터뷰를 거부하거나 중단하면 안 된다. 이영훈은 백선주에게 오늘 밤 누군가가 또 죽게 되는데,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인터뷰라고 한다. 백선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된다. 무엇보다 이영훈의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는가가 고민이다. 연쇄 살인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영훈은 그녀에게 그간 벌였던 살인 행각을 모조리 영상으로 기록해 놨으며 그걸 증거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 밤에 죽을 대상은 누구인가. 그런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한 건가. 혹시 자기 딸 예린은 아닌가. 밀실에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서스펜스는 숨이 턱에 닿을 만큼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맥거핀(눈속임 장치 같은 것)이다. 밀실 자체가 맥거핀이다. 나중에 밀실은 몇 가지의 다른 공간으로 확장된다. ‘밀실 안에서 벌어지는 퍼즐의 모든 답은 밀실에 있다’라는 고전적 미스터리극의 어법을 해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살인자 리포트’는 영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놓치는 것이 생기고 무엇보다 무리한 비약을 하게 된다. ‘살인자 리포트’도 후반 클라이맥스에서 그런 점들이 보이긴 한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느냐, 아니냐는 그렇게 모든 실마리가 제공된 후, 그걸 관객들이 이해할 만한 것이냐, 받아들일 만한 것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 역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살인자 리포트’처럼 소규모의 ‘탐정 놀이’ 같은 작품은 사회적 맥락 같은 것은 주요 키워드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영화의 이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이다. 사람들을 숨 가쁘게 만들어야 하고 집중시키고 몰두시켜야 한다. 순간순간 사람들을 의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설마 이영훈이 죽이려는 또 한 명의 인간이 선주 자신이 아닌가. 아니면 아래층에 있는 그녀의 애인 형사인가. 아니면 설마 선주의 딸 예린이인가. 선주 학교에서 한 피아노 영재의 손가락 사이사이가 예리한 무엇으로 난도질당하는 학폭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자 이때 나온다. 면도칼! ‘살인자 리포트’는 2010년대 스페인어권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소규모 미스터리 영화의 전통을 이어받는 작품이다.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2016)는 ‘자백’(2022)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됐고 콜롬비아 영화 ‘히든 페이스’(2011)는 동명의 제목으로 리메이크(2024)됐다. 반면 이번 ‘살인자 리포트’는 리메이크가 아닌, 순수 창작물이다. ‘살인자 리포트’는 두 가지 면에서 이런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첫째는 이른바 사회 공권력이 지닌 무능함에 너무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스스로가 지켜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시스템을 지키려는 체제이지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처럼 다소 과도한 ‘리벤지 자경단’의 설정은 철저하게 극화된 얘기이지만 전체적인 콘셉트로 잡은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 가는’ 범인(정치인 상류층 포함)들에 대해 사람들은 영화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 점을 극대화한 영화가 바로 이 ‘살인자 리포트’이다. ‘살인자 리포트’는 이 엄혹한 극장의 시대에 제작자와 투자자, 감독과 배우 스태프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얼마나 치열한 머리 싸움을 벌여야 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순 제작비는 55억이다. 총제작비는 약 65억 정도일 것이다. 관객은 티켓값으로 1만 5천 원을 내지만 투자 쪽에서 가져가는 객단가는 4300원에 불과하다. 150만 명이 들어야 얼추 64억 5000만 원을 갈음할 수 있게 된다. 모두에게 다 쉬운 일은 없다. 부가 판권 수익을 예상할 테니 100만 명이 고지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공한 작품이 있다. 故 이선균 주연의 ‘잠’이다. 제작비 50억 원을 썼고 80만이 손익분기점(BEP)이었으며 총 150만 명 정도가 들었다. ‘살인자 리포트’ 역시 그 흥행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한국 영화계에 매우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살아가려면 영리해져야 한다. 폭력을 저질러서도 안 되지만 당해서도 안 된다. 영화를 만들어서 너무 독점적 수익을 가져가서도 안 되지만 망하면 더욱 안 된다. 그 안과 밖을 보여주는 영화가 이번 ‘살인자 리포트’이다. 영리한 미스터리가 세상을 구할 실마리를 준다. 과도한 말일까.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르마는 대중들이 얼마나 재미있어하느냐에 달려있다. 솔직히 말하라고? ‘살인자 리포트’는 재미있다. 재미만 있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에 안 들지만 재미있는 게 요즘 어디인가 싶게 만든다. 현실의 시름과 고민을 잠깐 잊기에는 최고다. 9월 5일 전국 개봉한다.
일단 시작은 좋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14일 윤제균 감독 등 영화인들과의 간담회를 가진 것은 시장에 긍정적 시그널을 줬다. 최 장관은 한국 영화계의 생태계 복원을 약속했으며 제작을 지원하고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영화계 아젠다를 재설정하고 지원 투자 금액의 규모를 설정하는데 있어서의 당위성, 필요성 등이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논쟁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장관이라는 정무직 인사가 영화계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고쳐 나갈 의지가 있음을 보여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 장관이 임명될 당시 영화계 내 일부에서는 그를 가리켜 플랫폼 사업자 출신이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했다. 현재는 그런 볼멘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계 거버넌스의 최고 책임자와 영화인들이 일치된 행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신호이다. 좋은 일이다. 기획개발비라는 게 있다. 영화 아이템이 시나리오로 나오기까지, 캐스팅과 프리(pre) 프로덕션이 이루어지기까지 돈이 들어간다. 밥도 먹어야 하고 회의도 여러 차례 진행돼야 하며 로케이션 헌팅 (촬영지가 될 곳에 미리 가 보는 것)도 해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 이 돈이 현재 전혀 지급되지 않는다. 굶어 가며 시나리오를 쓴다 한들 투자사나 제작사에서 채택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좋은 작품의 원안이 나오기가 힘들다. 민간 투자자들이 사전 투자를 꺼리고 있다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기획개발펀드를 만들어서 지원해야 한다. 물론 엄정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 펀드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50~100편의 시나리오 혹은 드라마 대본이 나올 수 있다. 기획개발비 지원이 하루가 급한 이유이다.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한국 영화산업이 이렇게까지 ‘고꾸라지게’ 된 것은 작품을 못 만들어서이다. 이른바 퀄리티 컨트롤이 되지 않아서이다. 관객들이 도저히 볼만한 영화가 없다는 불만이 극에 달해 있다. 그러나 사실 퀄리티(품질)는 콴터티(양)를 기반으로 한다. 적어도 한 해 국산 장편 상업영화가 60~80편 정도 만들어져야 좋은 작품, 재밌는 작품, 의미 있는 작품들을 골라낼 수 있다. 흥행 산업을 끌어가는 것은 그중 5~10편이다. 판이 커져야 한다. 판이 쪼그라들었으면(한 해 25편 수준) 그 판을 다시 의도적으로 키워 내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돈이 필요하고 비교적 막대한 예산이 투입돼야 한다. 영화계에서는 신임 정부의 5천억 원 조성에 민간자본의 5천억 원 매칭으로 총 1조 원 구성을 바라고 있다. 여기에 손실 충당을 5대5 구조로만 하더라도 산업은 금세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예컨대 누군가 50억 원 예산의 작품을 만들 때 민간 투자자가 25억 원, 정부가 25억 원을 내는 구조를 만든 후 손해가 날 경우, 민간 자금 25억 원부터 변제해준다는 얘기이다. 이건 적선이나 구호가 아니다. 영화산업은 K팝의 원천이다. 기본이 망가지면 전체가 망가진다. 시급하다. 신임 장관이 그걸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계 안쪽, 인사이더들의 시각으로만 보면 독립영화 ‘THE자연인’은 꼭 봐야 할 작품에 속한다. 데뷔작 ‘낮술’(2009)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감독 노영석의 신작인데다 이 영화의 배급을 독립영화 제작의 베테랑인 조영각 프로듀서가 맡았고 극 중 주연급인 자연인 역을 맡은 신운섭은 유명 노동영화인 ‘휴가’(2021)를 만든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휴가’의 감독 이란희도 주요 배역, ‘소복 여인’으로 나오기도 한다. 신운섭과 이란희는 영화인 부부 사이이고 둘은 최근 ‘3학년 2학기’를 만들고 개봉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영화 ‘THE자연인’은 따라서, 일종의 인디계의 가족 시네마인 셈이다. 대중 관객들에겐 이런 배경 설명이 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관이 없는 얘기이다. 영화가 재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있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독립영화 ‘THE자연인’에 대한 호오를 구분 짓는 가르마가 될 것이다. 영화는 귀식커(鬼seeker)라는 유튜버 인공(변재신)이 10만 구독자 문턱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한 남자의 제보를 받고는 친구이자 또 다른 댄서 유튜버인 병진(정용훈)과 함께 그가 산다는 산골을 찾아가 일종의 자연인 촬영(방송프로그램 ‘자연인’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콘텐츠 중의 하나이다)을 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 이 자연인(신운섭)은 만날 때부터 둘을 기겁하게 만드는데 얼굴에 숯검정을 칠하고 불쑥 나타나기 때문이다. 밥은 소금(과 같은 잼)으로만 먹고 그것도 그냥 손으로 먹는다. 휴지도 없어서 화장실을 가게 되면 저 아래 냇가에서 이른바 ‘자연 비데’로 해결하라는 식이다. 자연인은 말한다. “냇물에 미네랄이 많아서 치질이 싹 나아, 좋아!” 영화 ‘THE자연인’은 이런 식이다. 슬슬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유머긴 유머인데 그 넓이와 깊이가 다르다. 일부 젊은 세대들이 좋아한다는 엇박자 유머이다. 극장 안에서 몇몇이 낄낄거릴 수는 있어도 관객 전체가 박장대소를 할 유머는 아니다. 병진이 소복 여자(이란희)에게 왜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냐고 물어보면 “그럼 발가벗고 다녀요?”라는 식이다. 이 영화 유머의 콘셉트는 짜증 유발이다.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다. 그냥 ‘썩소(썩은 미소, 쓴웃음)’ 유발 유머이다. 주인공 인공은 시작부터 의심하기 시작한다. 첫날 밤 그는 목이 말라 마당에 나갔다가 자연인이 자기 방에서 배달된 짜장면과 군만두를 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연인은 (연습을 많이 한 듯) 여자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집에는 볼링공도 있고 산속에는 여자 마네킹도 있다. 스킨로션을 바르고 치킨(옛날 통닭)을 먹기도 하며 방안 장롱에는 오래된 산삼주가 가득하다. 뭔가 이상하다. 주인공 인공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인공’적이지 않게 날 것 그대로, 내추럴하게 찍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이 모든 게 다 연출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연인은 정말 자연인인가, 아니면 무엇(돈이나 이름)인가를 노리고 자연인 흉내를 내는 사기꾼인가. 자연인은 중간중간 빙의가 왔다며 이상행동을 한다. 그것 역시 인공의 눈에는 살짝 연기를 하는 것으로 비친다. 인공은 계속해서 자연인을 의심하고 친구 병진은 반대로 점점 그에게 빠져든다. 영화는 자연다큐 같은 분위기로 시작해 코미디로 갔다가 미스터리 스릴러로 옮아간다. 나중에는 일종의 추적 스릴러까지로 변신한다. 과연 자연인의 정체는 밝혀질 것인가. 그 비밀은 무엇인가. 영화는 엄청난 재미까지는 주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집중하게 만든다. 적어도 결말은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런 면에서 노영석의 연출 의도는 어느 정도 먹힌 셈이 된다. 영화 ‘THE자연인’이 관심을 모았던 데는 이 작품이 원 맨 시네마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노영석은 이 영화에서 각본과 감독을 맡은 것은 물론이고 프로듀서, 촬영, 조명, 음악, 미술, 동시녹음, 의상, 편집, 컴퓨터 그래픽, 디지털 색 보정, 사운드 믹싱까지 제작의 전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퍼스널 시네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감독 노영석이 노렸던 것은 영화의 재미도 의미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식의 실험이다. 이런 방식으로도 영화를 완성할 수 있다,에 대한 선언이자 도전으로 보인다. 영화가 그다지 촘촘한 에피소드로 채워지지도 않으면서 굳이 러닝타임 2시간을 꽉 채운 것은(124분) 혼자서도 장편 규격을 완성할 수 있음을 고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노영석은 이렇게 묻고 있다. 영화는 꼭 많은 인원이 동원돼야 하는가. 영화는 꼭 자본이 필요한가. 영화는 꼭 이야기가 필요한가. 영화는 형식의 예술인가, 내용의 예술인가. 노영석의 질문은 현대영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식과 다른 문을 열고 새로운 길을 가 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THE자연인’은 1인 미디어 제작자들, 곧 유튜버들의 얘기인 만큼 영화도 1인으로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유튜버들이 만들어 내는 폐해들, 예컨대 자연인이라지만 많은 부분이 연출되거나 가짜로 만들어지는 듯한 위선과 거짓에 대해서도(심지어 모든 것이 몰카였다는) 일침을 가하겠다는 의도도 읽힌다. 주인공 인공과 병진은 오로지 구독자 수에만 열광한다. 어쩔 수 없는 ‘관종(관심 종자, 관심을 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행태가 지금의 한국 사회에 병처럼 만연해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원 맨 시네마는 그간 여기저기서 시도는 되어 왔지만, 이번 노영석의 작품만큼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할리우드의 유명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초기작 ‘엘 마리아치’(1992)에서 각본과 감독 촬영 편집을 담당하며 깃발을 세웠다. 당연히 초저예산 영화였다. 단돈 7천 달러(약 1천만 원)를 썼으며 2백만 달러(약 28억)를 넘게 벌었다. 그래서 유명해졌고 그래서 원 맨 시네마가 유용하다는 인식을 줬다. 국내에서 원 맨 시네마 방식을 추구했던 인물은 사망한 감독 김기덕이다. 김기덕은 불명예스러운 일로 모든 작품이 거의 묻혀 버렸지만, 그가 2000년에 만든 ‘실제상황’은 한국에 최초로 등장한 원 맨 시네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THE자연인’처럼 온전한 형태의 원 맨 시네마의 출현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시네마 예술의 향방을 가늠하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하게 한다. 그럼에도 원 맨 시네마로 만들어지는 작품들 역시 서사가 좋아야 하고, 대중적 재미도 있어야 하며, 주제 역시 뚜렷하고 분명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과연 원 맨 시네마가 거기까지 나아 갈 수 있을까. 상업영화가 지닌 자기 목적성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을까. 대중을 만족시키고 공감케 하는 영화의 기본기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 영화 ‘THE자연인’은 그 질문의 출발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혼자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 만든 영화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물론 그게 쉬운 얘기는 아니다. 노영석은 이번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 노력을 치하하고 싶을 뿐이다.
호주 출신의 배우 에릭 바나는 은근히 팬이 많은 세계적 스타이다. 그가 ‘블랙 호크 다운’이나 ‘헐크’ ‘트로이’ ‘뮌헨’에 나왔던 2002년~2006년은 그의 인기의 꼭짓점이었다. 모든 스타의 인기는 5년 안팎이 절정이며 그건 인생의 헤이데이(heyday)가 딱 그 정도인 것과 비교적 정확하게 닮아있다. 에릭 바나는 최근 들어 ‘블루백’ 같은 해양 환경 영화에서 작은 역을 맡는가 하면 ‘드라이’ 같은 호주의 자국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는 68년생이고 57세이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배우’이다. 그런 에릭 바나가 주인공인 넷플릭스 드라마가 ‘언테임드’이다. 6부작이다. 당연히 시청을 주저 없이 선택하게 되는 데다 샘 닐(뉴질랜드 출신)이 나오고 영화광들에게 한때 사랑받았던 로즈마리 드윗(‘레이첼, 결혼하다’, 2008, 조너선 드미 감독)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바로바로 ‘픽’하게 되는 드라마임에도 ‘언테임드’는 제목처럼 종종 길들여지지 않는 요세미티 계곡에서처럼 길을 잃는다. 그냥 잃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잃는다. 대본상의 서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캐릭터의 일관성도 주인공인 카일 터너(에릭 바나)와 후배 수사관 나야(릴리 산티아고) 외에는 그리 탄탄하지 못한다. 왔다 갔다 한다. 스토리는 이야기를 벌리고 좁히는 리듬감에서도 실패해서 전체적 균질감이 그리 두텁지 못하다. 이런 유의 드라마를 두고 비평 쪽에서는 대체로 ‘못 만든 작품’이라는 단정적인 어휘를 쓴다. 최근의 한국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주인공이 영화 속 웹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있다. “작가님. 이번 작품은 정말 최악이에요.” 드라마 ‘언테임드’의 연출가인 마크 L. 스미스, 엘르 스미스 (둘은 아버지와 딸이다)에게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감독님들. 이번 작품은 정말 최악이에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기이한 매력이 담겨 있고 6부를 이어 볼수록 작품 속으로 기이하게 스며들게 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요세미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에릭 바나도 샘 닐도 아닌 바로 캘리포니아의 국립공원 요세미티이다. 서울의 다섯 배 크기에 해당한다는 절벽과 폭포의 천연 지역인 요세미티는 이 드라마의 앞이자 뒤이자, 그리고 전부이다. 모든 사건은 요세미티에서 벌어지며 이 안에서의 인간들, 주인공인 카일 터너과 그의 상관인 폴(샘 닐), 그의 전처인 질(로즈마리 드윗), 그리고 부하 요원인 나야는 대체로 대책이 없다. 사건은 좇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풀리기보다는 어쩌면 이 위대한 자연이 스스로 그 범행의 민낯을 드러나게 하는 면이 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무엇보다 비평적으로 상당히 양보해서 얘기한다면, 그렇기에 대본상에서 ‘구멍이 숭숭 보인다 해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대본이 마치 요세미티가 지닌 자연의 위대함처럼 스스로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다소 나이브한 생각이 감독 둘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면 수긍할 수도 있겠다. 이 드라마는 요세미티에서 가장 유명한 지점을 드라마의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있다. 첫 장면, 곧 두 젊은이가 암벽을 타다가 위에서 추락하는 여인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은 요세미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프 돔’ 절벽에서 찍혔다. 이 씬은 매우 정교하게 찍혔으며(고공에서 여자가 추락하고 두 암벽 등반의 젊은이들이 딸려 추락하도록 동선을 디자인했다) 이 드라마에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요세미티의 또 다른 유명 지역인 글레이셔 포인트(Gracier Point, 전망대)는 영화 중반 살해당한 여자아이 루시(에즈라 프랭키)의 엄마가 시한부로 죽어 가면서 종종 명상하는 지점의 배경이 된다. 주인공 카일 터너가 가끔 심하게 괴롭거나 외로울 때 찾는, 아무런 조건 없이 살을 섞는 여인으로 라나라는 이름의 호텔리어(알렉산드라 카스틸로)는 터너 앞에서 관광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방에서는 요세미티 폭포가 한눈에 들어올 거요.”(상냥하고 가식적인 미소.) 따라서 6부작 드라마 ‘언테임드’는 주인공이 요세미티 국립공원인 작품이다. 대체로 미지의 공간, 위대한 자연이 그 속살을 살짝살짝 보여주는 작품의 경우는 대체로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그 아우라가 드라마에 스며들게 만든다. 그러니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거대한 자연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어차피 다 알아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신비주의가 이 드라마 전체를 휘감고 있다. 나중에 루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첫 장면의 제인 도우(신원 미상의 여성 시체) 모습은 마치 그 옛날의 전설적 드라마로 데이비드 린치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인 ‘트윈 픽스’를 닮아있다. ISB 특수요원 카일은 비닐 백에 누워있는 여자의 처참한 시체를 보면서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과거 ‘트윈 픽스’의 FBI 요원 쿠퍼(카일 맥라클란)가 로라 파머(셰릴 리)의 시체를 봤을 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ISB(Investigative Services Branch)는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의 실제 부서로 국립공원 내 범죄 수사를 담당한다. 드라마 ‘언테임드’는 절벽에서 떨어진 여성 시체의 수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 요세미티 계곡에 많은, 게다가 추악하기까지 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모든 사람이 다 비밀을 갖고 있음을 그리는 내용이다. 각자의 비밀은, 대개가 그렇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은폐한 살인 범행은 또 다른 자의 살해 행위로 이어진다. 어떤 이가 숨겨 놓은 딸은 누구의 범행 대상이었거나 아예 스스로 범죄 행위에 나서기도 한다. 다 연결돼 있다. ‘언테임드’는 결코 풀리지 않는 야생의 매듭 같은 내용이다. 그 이음새의 순간을 눈치채고 궁극의 범인이 누구일 거라고 제5회쯤에 번쩍, 깨달음이 온다면 당신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대가급 독자이거나 관객, 혹은 시청자가 될 것이다. 계곡의 살인자를 좇는 얘기이고 계곡 깊숙이 모여 사는 히피 집단이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그것도 다 맥거핀(눈속임 설정)이다. 드라마 ‘언테임드’의 살인사건 자체가 어쩌면 맥거핀이다. 그보다 이 드라마는 ‘상처’에 대한 얘기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 트라우마를 지닌다. 카일 터너는 케일럽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들을 잃었다. 짐작하건대 어떤 소아성애자에게 유린당하고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역시 그때도 ISB 요원이었던 터너는 그 아동 살해자를 찾지 못한 것으로 수사를 종결한 바 있다. 터너는 여전히 숲속에서 혼자 아이와 대화하며 지낸다. 정상이 아니다. 그의 전처인 질은 재혼해서 살지만, 그녀의 정신상태 역시 온전하지 않다. 자식을 잃은 남녀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터너의 부하인 나야 역시 살얼음판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LA라는 도시 경찰의 삶을 포기한 채 요세미티에 온 인물이다. 터너의 상관인 폴 역시 손녀 한 명을 잃었다. 그의 일상은 늘 자조적이며 관조적이다. 따라서 ‘언테임드’의 등장인물들 모두는 외곽의 범인을 쫓으면서 동시에 자기 내면에 있는 어둠으로부터 쫓기고 있다. ‘언테임드’는 그 이중의 고리를 보여주려 노력한다. ‘언테임드’의 마지막 장면이 좋다. 키 워드는 카일 터너가 남기고 간 그의 애마, 뒤에 남겨진 수사관 나야, 그리고 사슴 떼이다. 이 장면 역시 잘 찍혔다. 요세미티에 가고 싶어지게 만든다. 인생은 때론 매우 비논리적이며 부조리하고 직관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드라마 ‘언테임드’는 못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 기억 속에 이미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언테임드’는 못생겼지만 기이한 매력이 차고 넘치는 여인 같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풀’은 제목이 잘못된 작품이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환경영화, 생태 영화쯤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심의 등급이 청소년관람불가로 나온 것이다. 풀이? 풀 얘기가? 이게 뭐지? 아마도 ‘풀’의 원래 제목은 ‘떨’이었을 것이다. ‘떨’은 은어이다. 대마초를 비하해서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떨을 피다’, ‘떨을 하다’는 한국 대중들 사이에 ‘마약을 하다’로 인식돼 있다. 다큐 ‘풀’은 대마를 키우는 사람들 얘기이다. 대마의 합법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일종의 액티비스트들의 얘기이며 대마라는 실체가 가진 본질, 그 정치경제학에 관한 얘기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에 따라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다. 그건 마치 동성애 문제를 두고 기독교도들 상당수가 극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대마초 문제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만든 이수정 감독의 접근 방식은 다소 쾌활한 우울모드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밝은 표정들이지만 그들 중 몇몇은 본의 아니게 감옥에 갔거나 갔다 왔고 그래서 한국을 아예 떠났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마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현재까지는 여전히 불법임을 의식한 듯 의도적이고 평면적으로 보이게끔 찍었다. 목소리와 주장을 강하게 담아내기보다는 ‘대마의 사람들’을 스케치해 나열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전체 톤앤매너를 상당히 자제시키려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면, 이번은 문제 제기이자 일종의 이슈 파이팅이니 만큼, 그리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식이다. 이 정도로도 청소년관람불가가 나오는 시대 환경 탓을 의식했을 것이다. 지난 쿠데타 정부(윤석열)는 마약과의 전쟁을 정권 연장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대마 역시 양귀비, 히로뽕, 아편과 같은 카테고리로 들어갔다. 그토록 천박했던 정부의 기조는 약화 됐지만, 대마 얘기는 여전히 한국에서 새로운 진영 논리의 화약고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다큐 ‘풀’이 지녀야 할 프로파간다의 수위는 애초부터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 ‘풀’은 대마가 지닌 의약품으로서의 가치, 그 효용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척’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다큐는 상당 부분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지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과거 1960년대 미국의 히피즘과 연결한다. 따라서 사실은 다소 반체제적이고 불온한 내용들이다. 기존 거버넌스, 기성 질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재미있는 것은 그 ‘불온성’을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들, 특히 당국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지도 않다. 지난달 6월 18일에 개봉돼 현재까지 1004명만이 봤다. ‘풀’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철조망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이 금기의 사회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마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 경제학은 영화 속에 나오는 랩퍼 빌 스택스나 아티스트 원 브로, JJ 진 같은 이의 입을 통해 어눌하게나마 이렇게 전달된다. 국가는 인간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필요한 노동력으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에 대해 극히 경계한다. 각 개인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국가가 요구하는 경제단위의 노동 일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마는 신성한 노동에 반하는 물질이기에 금지 약물이 될 수밖에 없어 왔다는 것이다. 대마 금지가 새마을 운동의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이유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독점을 넘어서기 위해 블록체인이 만들어진 것처럼 인간에게 좀 더 자유로운 공동체를 위해 대마의 합법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바로 대마초 합법화 시민연대 멤버 같은 이들이다. 다큐는 그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을 에둘러 보여 주려 애쓴다. 이제서야 일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대마는 인간 신체에 필요한 카나비노이드란 성분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대체로 항우울제와 각종의 진통제로 쓰이며 치료 약재가 되는 약초, 풀이다. 현대적 질병에 최적화된 의약재임에도 불구하고 대마를 재배하고 의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수많은 제재가 가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천호균 같은 사업가(유기농 제품 쌈지 대표)는 당국의 허가 하에 비교적 큰 규모로 대마를 키운다. 그는 지금과 같은 기후 위기 시대에 탄소 흡입량이 그 어느 식물보다 높다는 대마의 재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생태운동가이다. 그래서 그는 대마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관여하는 ‘대마자유연대’가 결국 평화와 통일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마 농장은 휴전선 인근 파주에 있고 여기서 자진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일탈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국가냐 개인이냐, 체제 이데올로기란 과연 무엇과 누구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가를 우회적으로 지적해 나간다. 가이 리치의 2020년 영화 ‘젠틀맨’에서 마피아인 미키 피어슨(매튜 매커너히)은 대마의 대량생산으로 유럽 유통망을 장악해 막대한 자금을 모은다. 브렛 헤일리란 감독이 만든 ‘더 히어로’(2018)에서 주인공 리 헤이든(샘 엘리엇)은 퇴락한 서부영화 전문 배우인데 하루의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옆집 남자와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이 마리화나이다. 이무영 감독의 발칙한 영화 ‘아버지와 마리와 나’(2008)는 속내의 제목이 ‘아버지와 마리화나’였던 작품이다. 기존의 영화들은 지난 45년간 쇠창살 안에 가둬 놨던 약초의 이미지를 순응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 이수정 작 ‘풀’은 그런 관습에 대한, 사상의 전복을 꾀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그 불온성은 다소 취약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문제 제기로서는 효용성이 크다. 적어도 사람들은 대마의 또 다른 이름들, 곧 헴프(새로운 나무), 마리화나 혹은 위드(질긴 생명력을 뜻한다)라는 단어를 알게 된다. 삼베옷의 그 삼이 대마 줄기라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된다. 대마 줄기에 대해서는 허준의 동의보감 때부터 그 존재감이 인정돼 왔다. 그 오랜 세월을 같이해 온 ‘풀’이 왜 지금은 무작정 금지되고 있는지 의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다큐는 법적 금지라는 물리적 측면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자유를 규제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문제의식을 들이대는 쪽이다. 대마는 생명공학에서 중요해지고 있고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주요 제품으로 활용되겠지만 한국은 여전히 ‘간자당’ 사람들(사이에 낀 사람들 모임)이 4월 20일(대마의 날)에 즐기는 파티의 매개체일 뿐이다. 간자당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 티셔츠를 대마을 운동으로 바꿔 입고 다닌다. 그렇게 영화 ‘풀’은 의도적으로 귀엽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끝내 우울해지게 만든다. 대마는 불법이지만 그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한국의 권력들은 더 큰 불법을 저지르는 파시스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잘못된 권력이 만든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큐 ‘풀’이 말 하려고 하는 대목은 바로 그 부분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아직 일부 소수의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작품이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인 이유이다.
이제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끝이 났다. 천만 관객 운운은 쥬라기 월드 시대에나 가능한 꼴이 됐다. 물론 세계 영화계를 얘기하는 것, 특히 할리우드 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시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이며 유럽은 여전히 유럽이다. 그들의 극장 문화는 코로나19 이전으로 완벽하게 복귀했다. 한국만 여전히 코로나19 이전 때에 비해 시장을 50~60% 복구 선까지 밖에 회복하지 못했다. 1년 관객 수는 2019년 2억 2667만 명으로 최고점을 찍었으나 코로나 시기를 경유한 현재 올해 상반기는 4492만 명으로 나타났다. 이런 식이라면 올 한 해는 1억 명을 넘지 못하게 된다. 이건 꼭 국산 상업영화가 극심하게 부족해서만도 아니다. 국내 극장가에는 국산 영화로는 현재 ‘여름이 지나가면’ ‘봄밤’ 등 독립영화나 저예산 상업영화들로만 채워져 있다. 모두 5천 명 정도의 관객들을 모았다. 애초 규모의 경제학이 실현될 수 없다. 또 한편으로 흑묘백묘 전술도 안 먹히고 있다. 한국 영화가 안되면 할리우드 영화들이 잘돼 줘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되지 않는다. ‘F1 더 무비’는 국내 관객 143만 명 선에 그치고 있어 주연인 브래드 피트의 이름을 무색하게 하고 있고 ‘쥬라기 월드 : 새로운 시작’도 175만 명 선, ‘슈퍼맨’ 역시 아직 개봉 초기이긴 하지만 60만 명을 못 넘고 있다. 코로나 이전 때 같으면 첫 주 개봉 때 대체로 120~150만 명 선을 유지하던 게 할리우드 여름용 블록버스터들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그런 시절은 끝났다. 이렇게 된 데에는 코로나19가 아무리 치명적이었다 해도 그 모든 걸 차치하고 시장 사이즈가 너무 작기 때문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한방에 시장을 휘청거리게 만든 셈이다. 5200만이라는 적은 인구에 극장 외에도 OTT, 프로야구, 팝스타 공연 등등 관심거리가 최고로 다양해진 시대이다. OTT 가입자 수는 넷플릭스만 대략 1200만으로 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며 월간 이용자 수는 1500만 명 선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야구 관중 수는 지난해 1천만을 넘겼다. 공연 역시 올 초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콜드플레이 콘서트의 경우 6회 공연에 30만 명을 몰아갔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이제 극장을 가지 않는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극장용 영화와 비(非) 극장용 영화의 통합 정책으로 시장을 단일 사이즈로 가져가되 규모는 키우는 쪽으로 해야 한다. 상업영화의 경우 한국 시장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만큼 해외시장을 겨냥한 기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나홍진 감독이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할리우드 스타를 캐스팅해 750억 원짜리 영화를 제작 중인 것은 지나치게 위험해 보이긴 해도 누군가 시도는 해야 하는 일로 평가된다. 그 한편으로 독립영화, 예술영화는 정부 주도하에 꾸준히 그 문화를 지켜 내야 한다. 산업과 문화를 분리하는 것, 극장과 OTT의 매출을 통합하는 것, 거기서부터 문제의 해결을 시작해야 한다.
3천 년쯤 살아온 여자가 500년쯤 전에 헤어진 여자와 애증의 관계에 빠진다. 두 여자 모두 불멸(immortality)이다. 두 여자 이름은 앤디 안드로마케(샤를리즈 테론)와 꾸인(응오 타인 반)이다. 꾸인은 지난 5백 년간 바다 깊은 곳에 갇혀 살았다. 꾸인은 앤디가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갖는다. 앤디는 또 다른 불멸의 인간들을 찾아내고 인류의 적과 싸우는 드림팀을 만든다. 한편 꾸인은 디스코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불멸의 여인(우마 서먼)에 의해 구해진다. 디스코드는 앤디 팀을 없애기 위해 꾸인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레그 루카 원작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로 만든 ‘올드 가드2’는 2020년 작 ‘올드 가드’의 속편이다. 이번에 하는 걸 보니 ‘올드 가드3’도 곧 나올 모양이다. 이번 속편을 보면 ‘올드 가드’는 그냥 1편에서 멈추는 게 좋았을 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올드 가드’ 시리즈는 물경 40년 전인 1986년, 크리스토퍼 램버트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하이랜더’ 시리즈의 21세기판이어서 CG, 특수효과, 근접 액션 촬영 기술 모두가 다 진화했지만 정작 더 좋아지지 않은 것은 스토리이다. 배우들이 대단하다. 샤를리즈 테론이나 우마 서먼 같은 대형 여배우가 저렇게 다소 황당해 보이는 캐릭터 설정을 어떻게 다 따라가고 있을까 싶은 정도이다. 저런 캐릭터에 어떻게 동화했나 싶다. 스타는 스타이다. 돈은 돈이다. 돈이 움직이는 스타는 무조건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뽑아낸다. 샤를리즈 테론은 자신이 출연했던 ‘이온 플럭스’(2005)에서 캐릭터를 자기 복제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우마 서먼은 역시 자신의 전작 ‘킬 빌 1, 2’(2003~2004)에서 나온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올드 가드’ 시리즈에서 제일 특이한 것은 동성애 코드이다. 앤디 안드로마케와 꾸인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잠깐 원수가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침대에 눕게 되는 관계가 된다. 이 영화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두 여자는 같이 싸우기로 한다. 두 여자는 서로를 위해 죽겠다는 심정이다. 앤디 팀의 두 남자도 애틋하다. 조(마르완 켄자리)와 니키(루키 마리넬리)이다. 니키는 조가 자신에게 얘기도 없이 또 다른 불멸의 남자 부커(마티아스 쇼에나에츠 혹은 마티아스 슈나르츠)를 만나러 간 걸 알게 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니키는 조에게 말한다. “우리가 불멸을 잃게 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까지나 불멸로 남을 거야.” 이상하게도 ‘올드 가드2’의 진한 동성애 감성은 비교적 속이 깊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이 분명 판타지이고 허구이지만 이 동성애 코드만큼은 현실성이 꽤 강해 보인다. ‘올드 가드2’는 로케이션이 눈에 삼삼하게 들어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크로아티아 스플리트가 나온다. 고대 황제의 은신처이자 궁정 같은 곳에서 앤디의 팀원들은 총격전과 육탄 난투극을 벌인다. 이탈리아의 리미니 또한 매력적인 풍광으로 나온다. 여기서 앤디와 꾸인은 재회한다. 앤디 팀은 곧 로마로 옮기고 팀원들은 각자 흩어지는데 이 시간에 앤디는 대한민국 서울 재래시장 뒷골목으로 온다. 거기서 한국인 불멸의 남자 투아(헨리 골딩)를 만난다. 앤디 팀이 다시 모이는 곳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이다. 핵시설이 있는 소도시 세르퐁이 최종 승부처이다. 자, 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올드 가드’ 시리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다. 넷플릭스 작품은 크게 오리지널과 라이선스로 구분한다. 오리지널은 순수하게 넷플릭스가 기획 투자 제작을 다 한다는 것, 그래서 IP를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라이선스는 말 그대로 외부의 작품을 계약 기간 동안만 독점 방영한다는 얘기이다. ‘올드 가드2’가 보여주는 로케이션의 면면은 넷플릭스가 최근 가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가장 공들이는 곳들이라는 걸 나타낸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특히 인도네시아가 그렇다. 한국은 넷플릭스가 항상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 한국의 모습을 한국, 일본(일장기가 스쳐 나온다.), 중국의 모습을 혼합시켜 보여준다.(앤디 등이 쓰는 칼, 창 등의 무기, 투아란 인물이 쓰는 서가의 모양 등) 감독의 무지인지, 의도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 제치고, 넷플릭스가 요즘 가장 핫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 여배우 응오 타인 반을 캐스팅하고 그녀의 입에서 베트남어가 튀어나오게 하는 것, 그녀를 주인공 샤를리즈 테론과 연인 관계로 만든 것 등등에는 다 이유가 있다. 베트남은 지난 몇 년간 영화 영상 산업에 있어 새로운 이머징 국가로 주목받는 나라이다. 넷플릭스가 한참 공을 들이고 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중국과 달리 넷플릭스가 들어간다. 다만 극영화만이 전송된다. 넷플릭스는 이걸 확대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이 영화 ‘올드 가드2’는 넷플릭스의 기획 상품이다.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작금의 챗GPT와 AI 시대의 새로운 롤모델이 될 것이다. 관심 지역, 돈이 될 지역, 영화 상품이 팔릴 지역을 찾아다니며 해당 공간을 조금조금씩 보여줌으로써 현지 관객을 모으고 현지 마케팅을 수행한다. 수지타산을 맞춘다. 그걸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현지의 배우에게 주요 배역을 맡긴다. 현지에 맡는 감성 코드를 개발한다. 예컨대 동성애 코드 같은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이 코드가 강세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런 류의 영화에는 스토리,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 앤디 안드로마케가 어떻게 불멸의 존재가 됐는지 그 연원 따위는 중요치가 않다. 디스코드라는 여성 빌런이 사실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명분을 내세우는데 그게 갑자기 돌변하는 것에도 괘념치 않는다. 디스코드는 앤디 등이 더 이상 “인류사에 개입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간에 앤디가 불멸성을 잃었다가 다시 그 능력을 되찾는 과정도 어색하든, 말이 안 되든, 어떻게든 얼렁뚱땅 넘어간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곧 부커가 주요 역할을 한다. 부커는 1편에서 앤디에 의해 팀에서 추방됐는데 언제 또 이렇게 서로 죽고 못 살 만큼 전우애를 불태우게 됐는지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올드 가드2’의 특징은 많은 서사의 생략이자 점프 컷이다. 러닝타임은 1시간 47분이며 많은 것을 포기하면 그런대로 킬링타임용으로 좋다. 다만 3편은 이것보다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 면도 있다. 영원히 사는 영생의 문제, 반대로 유한의 삶이라는 존재 조건은 태도의 문제에 달려 있다는 주제를 갖고 있다. 그 주제가 살아나면 이 시리즈 영화는 조금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우마 서먼이 젊어졌다. 넷플릭스가 시즌 드라마 8~12편 만드는 방식에서 영화를 한 편 또 한 편 만들어 덧붙이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시험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이제 옛날 방식이다. 자, 위기의 한국 영화계가 이런 기획 상품형 작품들을 추구할 것인가. 다소 민망하더라도 글로벌 차원으로 시장을 넓힐 수 있겠다. 남한 5천2백만 시장으로는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고 아우성들이다. 작품은 후져도 시장은 넓혀 가는 전략이 좋을지, 그 가늠자 역할을 하는 것이 ‘올드 가드2’이다. 조금 생각해 볼 문제다. 영화냐 장사냐, 그것이 문제로다.
알렉스 가랜드(맞다. ‘시빌 워 : 분열의 시대’의 그 감독이다)가 쓰고 대니 보일이 만든, 게다가 세계적 스타 킬리언 머피가 영화의 제작비를 댄, 그래서 프로덕션 라인이 거의 드림 팀 수준인 영화 ‘28년 후’는 좀비 영화이다. 아니다. 좀비 영화가 아니다. 그것도 아닌가. 결국 좀비 영화인가. 결론적으로 ‘28년 후’는 좀비가 나오지만 좀비 영화만은 아니다. 아마도 이건 가랜드와 머피, 대니 보일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댄 흔적이 역력한 일종의 인류 멸망보고서이다. 세 사람은, 알려지기로는,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이 비극과 희망의 트리올로지, 3부작을 기획했으며 마지막 3부에는 킬리언 머피가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번 ‘28년 후’는 대니 보일의 전작 ‘28일 후’(2003)와 ‘28주 후’(2007)의 완결판이 아니며 새로운 3부작의 시작이다. 대니 보일의 머릿속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을 것이다. ‘28년 후’의 마지막 시퀀스는 ‘28일 후’라는 중간 제목이 붙는다. 그러니까 영화 속 28년 후는 과거의 28일 후(2003년 작품때처럼)로 갔다가 다시 한번 28주 후로 더 돌아간 후 또다시 지금의 28년 후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타임은 슬립되고 또 슬립된다. 굳이 이성적이고 물리적으로 시간이 주는 개념을 따지고 매몰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번 영화 ‘28년 후’에도 좀비가 가득 나온다. 그 ‘만행’들은 더욱 끔찍해졌다. 감염자 중 돌연변이에 해당하는 ‘알파’급 무리의 우두머리 삼손(치 루이스 페리)은 2미터가 넘는 거구이자 한마디로 짐승이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한 번에 잡아당겨 척수를 통째로 뽑아낸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특수 분장, 특수효과 처리의 진수를 보여 주며 일부 관객들에게는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스웨덴 소속 나토군인 에리크(에드번 뤼딩)는 삼손에 의해 머리가 척추째 뽑혀 죽는다. 영화에서 끔찍하게 죽는 인간 중 1인이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해안가에 있는 홀리아일랜드이다.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와 로우랜드로 나뉜다. 영화에서는 본토인 잉글랜드를 잇는 로우랜드까지 완전히 차단된 상태로 나온다. 오직 하이랜드만이 살아남았고 그것도 일부의 사람들만이 모여 그곳을 ‘성스러운 섬’이라 이름 짓고 중세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간다. 모든 물자의 공급이 끊긴 상태인 만큼 화살과 창을 만들어 자신들을 지키는 식이다. 종종 이들은 본토와 연결된 제방 둑길을 따라 좀비 떼가 득실거리는 본토로 수렵과 사냥을 나간다. 이를 위해 평소 철저히 훈련을 하고 아이들도 일정 나이가 되면 수업의 실습을 경험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좀비들에게 죽은 사람이 그간 부지기수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꼬마 스파이크(알파 윌리엄스)는 아빠인 제이미(애런 테일러존스)의 손에 이끌려 제방 밖으로 나간다. 이 길은 썰물 때에만 열린다. 밀물이 되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시간을 제때 맞춰야 한다. 스파이크는 활을 잘 쏜다. 아빠에게 그렇게 배웠다. 그는 좀비의 목과 심장을 맞춰줄 안다. 엄마인 아일린(조디 코머)은 왠지 모를 병으로 끙끙 앓는다. 발작이 잦다. 그녀는 죽어가는 중이고 이 설정이 영화의 중반 이후 반을 채운다. 왜냐하면 아빠의 거짓말(제이미는 아들 스파이크가 본토 수렵을 나가 좀비 여럿을 해치웠다는 식의 영웅담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아픈 엄마를 두고 마을의 유부녀 로즈와 섹스를 한다)에 실망한 스파이크가 엄마 아일린을 데리고 제방 둑길을 건너 좀비 소굴인 본토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 본토에는 뜻밖에도 인간이 한 명 있는데 군 의무관 출신이라는 이안 켈슨 박사(랄프 파인즈)이다. 어린 스파이크 생각에는 이 의사야말로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는 앞단과 뒷단이 다르다. 전반부는 좀비 떼로 인한 인류 멸망 직전의 아수라장을 보여 주는 데 주력한다. 달려들고 물어뜯고 인육을 찢어발기며 악다구니로 먹어 치우는 좀비의 모습이 끔찍하다. 이들 존재는 다소 정치적인데, 바이러스의 정체가 바로 분노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아니면 생화학무기연구소에서 누출된) 바이러스로 세상은 붕괴했는데 그게 꼭 지금 전 지구상에 떠도는 극우 파시즘의 광기를 연상케 한다. 대니 보일은 인간의 이념적 광기가 언젠가 세상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 경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나리오를 쓴 알렉스 가랜드는 그런 정치적 서사의 은유에 능한 인물이다. 전반부가 인류 최후의 모습을 극단화해 표현해낸 장면들이라면 후반부는 마치 신인류 생존보고서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엄마의 존재(세상을 잉태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준다는 의미로)가 중요하고 그 존재의 철학적 당위를 뒷받침하는 박사가 있다. 켈슨 박사는 어린 스파이크에게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인생철학을 가르친다. 하나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이고 또 하나는 메멘토 아모리스(사랑하며 살라)이다. 알렉스 가랜드 & 대니 보일은 지금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죽음(의 방식, 그 과정, 그것이 남기는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 따른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전쟁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반목과 갈등, 테러의 악순환을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사람이 사람을 계급과 자본으로 억누르고 위협하며, 그럼으로써 극우 정치인과 자본가가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앞세워 광기의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식인의 정치사회학’적 사태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좀비의 대장 삼손은 마치 괴물로 변해버린 이 시대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파이크의 엄마 아일린은 좀비가 된 어떤 여인에게서 아이를 받는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감염되지 않았다. 이 설정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으나 이 아이가 성장하는 향후 2, 3부의 에피소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켈슨 박사의 얘기대로 메멘토 아모리스, 곧 서로서로 사랑하게 하는 존재, 인간과 좀비 사이를 잇는 긍정의 돌연변이, 신인류이자 궁극으로는 성스러운 그 무엇의 여인이 될 것이다. 1부의 주인공 아이 스파이크는 이 어린 여자아이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여자아이는 점차 생존자들의 희망, 구원자 같은 존재로 변해 갈 것이다. 대니 보일 스스로 인생 역작으로 만들어 내는 디스토피아 3부작이지만 멕시코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의 일부를 차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27년이 배경인 내용이었고 전 세계가 핵으로 인해 박살 난 상태인 데다 전 세계 여성 모두가 원인 모를(아마도 환경오염 탓으로) 불임을 겪어 18년 동안 신생아가 태어난 적이 없는데, 마침내 18살 흑인 소녀가 런던에서 임신한 상태로 발견된다는 설정이다. 이 소녀를 ‘확보’하려는 정부군과 이를 막으려는 저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새로운 인류, 새로운 출산, 새로운 메시아의 출현을 통한 새로운 구원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이번 ‘28년 후’는 메시아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좀비와의 싸움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수위를 갖는 영화인 셈이다. 윌 스미스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도 연상케 한다. 이 영화에서 좀비의 대장 격 인물은 자신의 좀비 여인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좀비에게도 사랑의 DNA가 있음을 보여 준다. ‘28년 후’에서 좀비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괴물 좀비인 삼손의 자식인 것 같은 느낌의 밑자락이 느껴진다. 이 관계가 향후의 에피소드를 규정해 갈 것이다. 메멘토 아모리스. 좀비에게도 부성애와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얘기로 이어갈 공산이 크다. 그렇게 인류와 좀비는 공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좀비 엄마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 이름은 스파이크 엄마의 이름과 같은 아일린이다. 이 아일린이 인류의 희망이 될 것이다. 영화 ‘28년 후’는 아일린 같은 신인류의 출현을 기원하는 영화이다. 그 기원이 현실적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영화의 전반부가 보여 준 것처럼 지금 세상이 극도의 아수라라는 점은 철저하게 동의하게 되는 영화이다. 영화는 주변을 잘 보라고 권하고 있다. 영화 ‘28년 후’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좀비, 이념의 좀비, 권력의 좀비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한국영화가 위기 소리를 듣고 있지만 해외에서의 관심과 시장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영화의 진짜 위기는 이 불일치의 간격을 빨리 좁히지 못하는 것에 있다. 12일(상파울루 현지시간) 시작돼 19일에 끝나는 제14회 브라질 한국영화제는 지난 해와 달리 유료 티켓으로 진행돼 관객 수는 약간의 경감이 있긴 하지만 비교적 여전히 뜨거운 관심 속에 열리고 있다. 현지 영화제 매니저인 이동현 브라질 한국문화원(원장 김철홍) 주무관은 젠더 문제를 다룬 작품들, 곧 '딸에 대하여' '대도시의 사랑법'은 만석 매진이어서 "한국이나 브라질 모두 젊은 관객들의 관심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전선영 감독의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페막작으로 초청됐으나 상파울루 예술대학의 ESPM(광고홍보학과) 영화관에서 16일에 먼저 상영돼 깊은 관심을 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작품이 갖고 있는 여성 서사에 대해 영화 고관여층인 대학생 관객들은 깊이 있는 질문들을 쏟아 냈다. '폭로 : 눈을 감은 아이'는 국내 미개봉작이며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만 공개된 상태다. 이번 제14회 브라질 한국영화제에는 22편의 장단편 영화들이 초청됐다. 영화제 기간 중 이틀을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관련 행사를 순회로 열기까지 했다. 개막작으로는 김지운 감독의 2016년작 '밀정'이 선정됐는데 이는 대한민국 광복 80주년 기념 섹션의 일환으로 상영된 것이다. 한국문화원의 김철홍 원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의 지난한 역사를 브라질의 젊은 관객들에게 넓고 깊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섹션에는 '밀정'을 비롯해 '암살' '영웅' 등 5편의 한국 근현대사 영화들이 상영됐다. 특히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 상영 후 열린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대다수 관객들은 1980년 쿠테타가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 최근의 쿠테타 정국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냈다. 브라질 한국문화원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 다양한 문화 컨텐츠가 '제약없이' 브라질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번 영화제 외에도 작가 편혜영과의 화상 대담이 기획돼 있고 17일 현재 소설 '불편한 편의점'의 김호연 작가가 상파울루에 들어 와 북토크와 팬사인회를 진행중이다. 브라질은 중요 교류국이지만 한국과 워낙 멀어서인지 문화원의 성취가 잘 알려지지 않아 왔다. 게다가 지난 정부 3년간 문화 예산의 상당수가 깎이는 등 그 노력이 평가절하된 측면이 없지 않다. 브라질 한국문화원은 한국어에 능틍한 현지 직원들을 다수 채용해 양국 문화 교류의 업무에 있어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어 내고 있다. 2억의 브라질을 포함, 6억 3000의 중남미와 6억 5000의 ASEAN 국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한국 영화와 드라마 제목을 한국 말로 줄줄히 꿰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은 꽤나 흥미롭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게 해야 한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K문화강국위원회 같은 것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이번엔 좀 제대로 문화 정책, K컨텐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했으면 싶다.
물이 반 잔이나 남았다, 반 잔밖에 안 남았다는 식의 얘기거나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것이라거나 아니면 세상은 이미 망했다 식의 얘기처럼 영화란 인간의 삶과 일상에 의미를 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영화는 아무리 그래도 재미가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대체로 영화를 코미디 장르로 만들거나 코미디 요소를 강하게 집어넣는 경향성을 보인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 영화의 재미와 의미의 비율은 6대4거나 7대3이다.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그랬고(‘인생은 아름다워’) 작금의 한국 영화계는 바로 감독 강형철이 그렇다. 강형철은 ‘과속 스캔들’과 ‘써니’에서 보여 준 자신의 ‘내추럴 본 코미디’의 자질을 새로 소개된(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유아인 스캔들로 지난 2년간 공개가 미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에서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강형철을 코미디 전문 감독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겠다. 그가 만든 ‘타짜 : 신의 손’(2014) ‘스윙 키즈’(2018) 등의 필모그래피는 강형철의 재능이 코미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이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는 일단 설정이 발칙하다. 국내에 슈퍼 히어로가 암약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살을 했는데(너무나 강한 책임감 때문에?) 그의 장기가 총 6명에게 이식이 됐고 그 6명 모두에게 초능력이 전이됐다는 설정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6명 중에 악당이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신입 초능력자와 슈퍼 파워로 영생을 얻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싶어 하는 악당과 선악의 대결이라는 이야기 구조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악당의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도 강형철의 스토리는 너무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 역시 특이한 부분이다. 아마도 영화 제작의 시작이 윤석열 시대 시작쯤에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빌런은 정치권이나 재벌 같은 부류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이 악당은 이단 종교의 지도자이다. 새신교의 교주 영춘(신구)은 자신이 거짓으로 이뤄 놓은 종교 제국을 ‘즐기기’ 위해 영생과 초능력을 얻으려 한다. 그는 슈퍼맨의 췌장을 이식받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나며 후계자인 딸 춘희(진희경)의 음모로 다른 초능력자 5명에게서 그들이 이식받은 장기를 뺏어와 1인의 슈퍼 파워맨이 되려 한다. 다른 5명은 이 슈퍼맨 악당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친다. 다른 5명으로는 심장을 이식받아 강력한 파워와 속도를 지니게 된 태권 소녀 완서(이재민)와, 폐를 이식받고 엄청난 폐활량으로 강풍을 일으킬 수 있는 지성(안재홍)이 있다. 안구를 이식받아 인간 해커가 된 ‘양아치’과 남자 기동(유아인)도 있다. 간을 이식받고 치유 능력이 생긴 허약선(김희원)이라는 새신교 신자,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흡수하고 연결시키는 능력의 김선녀(라미란)가 합세한다. 이들은 각각 나인 걸(구하는 소녀에서 구걸이라고 했다가 나인 걸이 된다.), 탱크 보이, 블루투스 맨, 밧데리 맨, 후레쉬 걸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갖게 된다. 자신들 팀 이름도 하이파이브로 짓는다. 그러나 곧 하이파이브 멤버들은 사이비 교주 영춘 조직에 납치돼 장기가 적출된다. 영춘은 밧데리 맨 허약선의 간을 탈취해 급속도로 젊은 교주(박진영)로 변신한다. 하이파이브 초능력자 팀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하이파이브’는 기본적으로는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판타스틱 포’에서 이야기 구성을 가져오고(이들은 우주 비행사로 우주탐사에 나갔다가 초능력을 얻고 돌아오게 된다.) 여기에 잭 스나이더가 만든 ‘저스티스 리그’를 합치되, 소위 ‘빠다 맛’ 그러니까 할리우드 느낌을 완전히 빼버리고 순 한국식의 토종 느낌으로 만든 작품인 셈이다. 이 정도면 모방이 아니라 창작의 수준이다. 특이함이 유별나면 보편적이 된다. ‘하이파이브’는 해외 시장에서도 그리 이상하거나 촌스럽다는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독특하고 재미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을 공산이 크다. ‘저스티스 리그’ 같은 영화는 3억 달러(3563억 원)를 쓰지만 이번 ‘하이파이브’는 150억을 쓴 영화이다. ‘하이파이브’의 손익분기점은 국내 기준으로 290만 관객 선이다. 초능력의 현란한 신세계가 펼쳐지지만 이 영화 ‘하이파이브’의 진짜 미덕은 부성애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연대의 가치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나인 걸 완서의 아버지(오정세)는 태권도장 관장이다. 아이들에게 댄스에 가까운 태권 품새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고 저녁에는 대리기사를 하면서 돈을 보충해서 번다. 실로 열심히 산다. 오직 딸 완서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이의 병원비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아내도 심장병으로 잃었고 아버지도 심장마비로 돌아갔다. 완서의 아버지는 오직 완서만 바라보며 사는 팔불출이다. 그는 자주 찔찔 짠다. (이때의 오정세 연기는 발군이다.) 그는 아이가 초능력의 소유자가 된 걸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발차기만이 완서에게 몰려오는 악당의 수하들을 무찌른 줄 착각한다. 사실은 뒤에서 완서가 도운 것이다. 완서 아버지는 늘 이렇게 호언장담한다. “완서야. 아빠 뒤에 딱 붙어 있어. 아냐 아냐 저기 구석에 가 있어. 거기 가만히 있어. 이놈들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 푼수끼가 농후한 아빠지만, 그래서 만화 캐릭터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위기에 처한 하이파이브 팀을 최후의 순간에 구해내는 것은 결국 완서의 아빠, 곧 부성애이다. 세상의 아빠는 늘 말한다. 무슨 일 있으면 아빠를 찾아. 아빠를 불러. 그래서 이 영화의 완서도 결국에는 이렇게 외친다. “아빠!” 그 순정의 마음이 가슴을 울린다. 좋다. 하이파이브 팀은 마음이 잘 맞는 팀이 아니다. 늘 말들이 많고 티격태격하기 일쑤이다. 특히 탱크 보이 지성과 블루투스 맨 기동이 그렇다. 그들은 한 살 차이, 혹은 몇 개월 차이를 가지고도 내가 형이네, 네가 동생이네를 놓고 싸운다. 그들은 서로 팀의 주도권을 쥐려고 애쓴다. 그러나 각자의 능력만 가지고는 새신교 교주의 교활한 조직을 일소해 낼 수 없다. 그들은 결국 힘을 합쳐야 하며 프레쉬 걸 선녀를 통해 서로 연결돼야 한다. 연대가 힘이다. 각자 스스로의 잘난 맛을 내려놓고 모자란 것을 서로 보충할 때만이 진정한 슈퍼 파워가 태어날 수 있다. 대중의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하이파이브’가 재미를 넘어 추구하는 의미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하이파이브’는 유쾌하고 따뜻하며 그래도 이 사회와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아직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다. 물이 반 밖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하이파이브’의 주제이다.
‘논나’와 같은 뻔한 드라마를, 뻔한 줄 알면서도, 뻔하게 보게 되는 이유는 어쨌든 새출발의 꿈을 가진 사람들,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신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종된 단어 혹은 상실된 어휘인 희망과 우정, 화해, 그리고 가족의 화합, 이웃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논나’는 우리가 뭘 잃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코미디의 어법으로, 신파의 논리로 가르쳐 준다. 꽤나 가슴을 적신다. 제목 ‘논나’의 논나는 이탈리아어로 할머니란 뜻이다. 이 영화를 보면 논나는 결국 한 집안에서 내려오는 특유의 음식을 만드는 할머니란 의미이고 이른바 ‘엄마손(맛)’ 할머니들을 말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개성 만두집, 보쌈 김치집, 통배김치 한정식집 등의 원조 할머니(엄마)를 생각하면 된다. 영화 ‘논나’는 결국 음식 영화이고, 할머니들의 여성영화이며, 가족영화인 데다, 궁극의 휴먼 드라마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CJ ENM 컴패니가 투자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조 스카라벨라(빈스 본)는 뉴욕에서 살아가는 엔지니어 노동자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 뉴욕 이탈리아계 논나 들을 셰프로 데려와 스태이튼 아일랜드에서 ‘에노테카 마리아’란 이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 계획을 세운다. 맨하탄이 아니고 스테이튼 아일랜드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서울 시내 광화문이나 경복궁 혹은 강남의 어디가 아니라 강화도나 영종도에다 식당을 내는 꼴이다. 요리 전문가나 음식 평론가들이 관심을 가질 동네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에노테카 마리아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조에게 보험금 유산으로 20만 달러를 남긴다. 식당을 연다는 건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세계 그 어디에서나 표준율을 공유하는 나라에서라면 각종 규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방법도 있고 식품위생법도 있으며 각종의 법을 준수하고 자격 요건을 얻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대출 모기지 이자를 내야 하며 매력적인 공간으로 보일 만큼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 등 투자할 대목이 많다. 식당을 한다는 건 속된 말로 앞으로 남고 뒤로 손해를 보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주인공 조는 그 엄청난 장애를 타고 넘어가 어머니의 레시피, 할머니 논나의 레시피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막무가내 모험을 시도한다. 조의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류의 드라마는 실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조가 성공하기까지 무수하게 좌초의 위기를 겪어 가는 에피소드를 이어 나가며 사람들을 쫄깃쫄깃하게 만든다. 사람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며 안달하게 한다는 얘기이다. 그 과정에서 조는 불알친구 브루노(조 맹갈리에노)와 크게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며 스테이튼 아일랜드 동네사람들의 텃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주인공 조가 새로 열겠다는 식당 ‘에노테카 마리아’ 자리는 원래 ‘도미니크 스피리토’란 또 다른 이민자가 50년 넘게 식당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라 스태이튼 아일랜드 사람들은 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텃세’ 때문에 조의 식당은 조기에 폐업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논나’가 불굴의 의지 ’따위’를 그려 나가는 드라마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일상으로부터 얻는 작은 생활의 지혜를 통해 비교적 ‘통 큰’ 성찰을 이어 나가게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생활의 지혜 급에 해당하는 이탈리안 격언들이 많이 나온다. ‘밥상에서는 늙지 않는다’라든가 ‘슬플 땐 배를 채워야 한다’같은 말이 나온다. ‘음식은 사랑’이며 ‘나이는 병이 아니고’ ‘비밀이니까 특별한 것인데’ ‘위대한 것은 늘 세월을 이기는 법’이다 같은 말이 줄줄 이어진다. 그런 대사들, 그와 같은 에피소드들을 보고 있으면 슬쩍 미소가 지어지게 된다. 영화 ‘논나’가 추구하는 것은 폭소가 아니라 잔 웃음이다. 영화 ‘논나’는 ‘미소의 교환’ 같은 작품이다. 논나 셰프들 역으로 네 명의 노년 배우들이 필요했다. 미용실을 하던 지아 역으로 수잔 서랜든이 나오고 실버타운에서 좌충우돌 살아가던 로베르타 역으로는 로레인 브라코가, 나중에 주인공 조의 연인이 되는 올리비아(린다 카델리니)와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할머니 안토넬라 역으로는 브랜다 바카로가 나온다. 수녀 출신의 논나, 테레사 역으로는 탈리아 샤이어가 캐스팅돼 있다. 모두가 다 전설의 명배우들이다. 수잔 서랜든의 영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명작들이 많고 로레인 브라코는 마틴 스콜세이지의 ‘좋은 친구들’에서 돈과 마약에 찌들어 가는 갱단의 여자로 나왔었으며 탈리아 샤이어는 '록키'와 '대부' 시리즈의 그 여인이다. 브랜다 바카로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잘만 킹의 그 유명한 에로 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의 배우였다. 모두들 대단한 배우들이고 나이들이 로레인 브라코를 제외하고 다 80대 들이다. 브랜다 바카로는 86세, 탈리아 샤이어와 수잔 서랜든 공히 79, 로레인 브라코는 71세이다. 영화 ‘논나’는 이처럼 한편으로는 여성 고령화 사회를 겨냥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시장성이 크지 않은 관계로 극장용으로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작품이다. 넷플릭스의 유용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 작품인 셈이다. 네 할머니들의 티격태격 싸움도 잔잔한 재미를 준다. 안토넬라는 시칠리 출신이고 로베르타는 볼로냐 출신인데 이 두 지역은 우리의 영남과 호남만큼 적대적이다. 지아는 할머니치고 가슴 볼륨이 커서 안토넬라, 특히 로베르타는 그녀를 천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나중에 지아의 가슴이 할머니치고 풍만한 이유가 유방암 제거 수술 탓이라는 걸 알게 된다. 테레사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그 안에서 젊은 수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음도 알려진다. 네 할머니들이 화해를 이루어 나가는 모습도 이 영화를 보는 잔잔한 재미 중의 하나이다. 이탈리안 음식 이름은 통 알 수가 없다. 카푸젤레가 어떤 음식인지, 주인공 조가 그토록 만들려고 했던 그레이비가 무엇인지, 닭고기 테트라치니, 크랩 케이크, 시금치와 치즈 캐서롤이 대체 어떤 맛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 음식은 지식이 아니다. 음식은 사랑일 뿐이다. 영화 ‘논나’를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해주시던, 맛을 보라며 떠먹여 주시던 음식이 기억이 난다. 영화 ‘논나’는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영화 ‘논나’는 또 그래서, 이상하게 눈물을 훔치게 만든다. 어릴 때 우리가 울면 엄마는 늘 그랬다. 엄마는 먹을 것을 해줬다. 울면서 먹으면 체해, 울지 말고 어여 먹어, 라고 하셨다. 엄마의 손맛과 그 손맛을 지닌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바로 ‘논나’이다. 영화는 때론 소품으로 진심을 나타낸다. 작은 영화가 좋은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 가면서 절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속속 겪으면서 사는 시대이다. 한국영화가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을 휩쓰는 걸 보게 될 줄은 오랜 영화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내 평생 한국 작가가 노벨상을 타는 걸 보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본도 오에 겐자부로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토록 수상을 노렸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미국의 폴 오스터도 그렇게 큰 인기에도 불구하고 상을 타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에 있어 통틀어서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로 쿠테타 만한 일은 없다. 그런 점에서, 곧 화제와 이슈 면에서, 윤석열은 감독 봉준호와 작가 한강을 뛰어 넘었다. 실로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유명이 아니라 오명과 악명이지만. 한국 영화계가 비교적 전혀 예상을 못한 일 중의 하나는 젊은 층 관객을 프로야구에 뺏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요즘 프로야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들 유니폼 하나쯤은 다 갖고 있을 정도이다. 프로야구 팬들 가운데는 2~30대 여성이 압도적이고 40대 이상의 ‘줌마’ 관람객들도 상당수이다. 여성들은 한국의 극장가를 좌지우지 했던 핵심 관객들이다. 그 관객들이 요즘 죄 야구장으로 가고 있다. 극장의 위기는 컨텐츠 퀄리티의 위기도 있지만 기존의 자신들을 지지했던 관객들, 청중들을 잃고 있다는 정치적 위기가 본질이다. KBO 관객은 지난 해 이미 천만을 넘어섰다. 2022년 600만, 2023년 800만에 이어 2024년에 1088만이 됐다. 대통령 후보든 국회의원 후보든 영화든 야구든, 중요한 것은 트렌드이다. 야구가 무서운 것은 관객수의 증가 속도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그 어떤 문화나 다른 스포츠 경기도 이기지 못한다. 영화가 야구를 당분간은 이기지 못하게 됐다. 심지어 일부 영화감독들도 영화보다는 야구를 보는 걸 선호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된 데에는 대체 불가라는 개념이 개입되고 있다고 미디어산업 평론가 조영신 박사는 얘기한다. 극장은 OTT든 VOD든 대체 가능한 플랫폼이 즐비하게 생겨나고 있지만 야구란 컨텐츠를 담아 내는 ‘야구장’은 현재로서는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치어리더들의 쇼가 있고, 약간 흥분해도 될 만큼의 치맥이 제공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을 연대시키는 동질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걸 대체할 공간은 지금으로서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야구장은 야구장이로되 극장은 더 이상 극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구가 영화를 이기든, 영화가 야구를 이기든 크게 보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중이 즐기는 문화나 스포츠는 같은 목적을 지니는 것이다. '대중은 과연 그것으로 행복한가'에 달려 있다. 요즘의 영화가 대중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가. 그 질문에 영화는 진지하게 답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많은 영화들이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예술도 안되고 돈도 못버는, 두 마리 토끼는 고사하고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범작들이 양산되고 있다. 야구에서 배워야 한다. 사람들을 흥분시켜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치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영화가 흥분을 잊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도대체 나미비아는 어디인가. 일본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 제목을 들으면 응당 들게 되는 생각이다. 근데 나만 모르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미비아란 곳을 알고 거기에 사막이 있다는 것도 알까. 나미비아는 당연히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이다. 보츠니아 왼쪽,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영화 제목처럼 사막으로 유명한 곳이며 특히 해안가 사막(백사장이 아니고)이 특이한 나라인데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가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일본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도 일종의 근미래 SF 액션 풍의 영화인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이 영화는 한 일본 여성이 하루 종일, 영화 내내 ‘어슬렁거리는’ 영화이다. 여주인공 카나(카와이 유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20대의 여성이다. (영화 중반이 지나 카나는 스물 한살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그녀의 일상은 나이만큼이나 부정확하다. 하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와 사는지, 주로 누구와 놀고 누구와 얘기를 하는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 지가 불분명하다. 카나의 일상은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는 그 점이 궁금하도록 서사를 짰다. 도저히 궁금해서 영화를 끝까지 안 볼 수 없게 만든다. 도대체 나미비아의 사막은 어디 있는 것이며 이 영화의 여주인공 카나 같은 젊은 여자, 흔히들 얘기해서 요즘 젊은 (일본)여자애들, 여성들은 뭘 바라며 인생을 사는 것인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궁금하게 만든다. ‘나미비아의 사막’을 만든 감독 야마나카 요코도 28살의 여성감독이다. 이 영화는 엄청난 걸작이거나 수작이어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기성의 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세대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지금의 20대들이 어떤 고민 속에서, 나름 얼마나 치열하고 다이내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도쿄의 한 대형 버스 터미널을 롱 쇼트로 비교적 길게 보여 준 뒤 저 멀리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 오는 여주인공 카나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철저한 익명 속에서, 아주 작은 일개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카나는 카페에서 친구인 이치카를 만나는데 둘은 어릴 때 친구인 사노 치아키가 자살했다는 대화를 나눈다. 치아키는 컴퓨터 충전 케이블을 문손잡이에 걸고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했다. 카나는 무심한 듯 그렇게도 죽을 수 있다더니 (결국 걔는 그걸 해냈네)라는 투로 말을 받는다. 카나의 뒤에는 그녀 또래나 그보다는 나이가 조금 많은 세 명의 남자들 대화가 큰 소리로 섞이고 있다. 한 남자가 말한다. 노팬티 샤부샤부 집이란 게 있어. 또 한 남자가 그게 뭐냐고 묻는다. 남자가 답한다. 샤부샤부 집인데 여자들이 노팬티로 서빙을 해. 근데 바닥이 거울이야, 라는 식의 대화이다.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꽤나 발칙한 분위기를 이어 갈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 카나는 처음엔 혼다(칸 이치로)라는 착실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를 애인으로 사귄다. 혼다는 술 먹은 그녀를 챙기고 재워주고 아침밥을 해주고, 꼬박꼬박 피임약도 먹여 주는 착한 남자이다. 그는 직장인이다. 부동산 회사에 다닌다. 그러나 카나는 그런 혼다 몰래 다른 남자 하야시(카네코 다이치)를 만난다. 그러다 하야시에게 점점 빠지게 된다. 카나는 친구 이치카와 함께 호스트 바를 가기도 한다. 이치카 없이도 ‘호빠’를 가곤 한다. 그럼에도 카나의 가장 중요한 일상은 무료함이다. 영화는 그녀의 ‘혼자’를 가장 많이 보여 준다. 카나가 혼자 있을 때 그녀가 뭘 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그려 낸다. 카나는 어슬렁거린다. 혼다와 사는 집 근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그가 출근을 했을 때나, 출장을 갔을 때 그의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무료하기 그지없고 무심하고 무상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삶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것인데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근데 20대들은, 20대의 감독들은, 20대들이 만든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반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꼭 삶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해? 무엇을 향해 나아 가야만 해? 목적이나 목표가 꼭 필요해? 인생을 그냥 부유하면 안 돼? 떠돌면서 살면 안 돼, 라고 묻는다. 목적이나 목표는 당신들 거 아냐? 라고도 묻는다. 표면적으로 말하면 카나는 대책 없는 젊은이이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제모 시술 에스테틱이다. 그녀는 시술 보조원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하지는 않는다. 맡은 시간에만 가벼운 화장기의 얼굴로 예의 바르게 손님들을 대할 뿐이다. 거기에 비하면 그녀의 다른 일상은 비교적 격렬하다. 혼다와의 동거를 끝내고 하야시와 살면서 둘은 말 그대로 무지하게 싸워 댄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사랑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다들 자신이 자신을 이기지 못해 그러는 것일 뿐 사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정밀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카나는 혼다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한 적이 있고 혼자서 중절 수술을 받아 마음의 상처가 있었던 듯이 보이며 현재 동거 중인 남자 하야시가 과거의 여자 카나코(주인공 카나와 이름이 같다.)와의 사이에서 임신과 중절을 겪은 사실을 알게 되고 광분을 한다. 카나는 하야시에게 툭하면 시비를 건다. 뻑하면 그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전 남자 혼다는 카나에게 와서 울고 불며 한바탕 난리를 친다. 카나는 모든 것, 모든 일상에 다 질려한다. 카나는 에스테틱 일도 그만둔다. 카나가 이유없이 화를 내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혼다가 됐든 하야시가 됐든 자신의 트라우마의 원인이 뭔지는 모른 채, 안다고 착각을 한 채, 상처를 줘서 미안해, 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을 조금 하다 돌아온 하야시의 부모는 일본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산다며 비웃는다. 카나가 느끼는 점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모를 하러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자기의 행동을 ‘제모하지만’ 결코 마음속은 그렇게 ‘제모가 되지’ 않는다. 카나는 결국 인격성 장애이자 양극성 장애자이다. 이런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결국 조울증으로 발전한다. 경계성 장애란 옳고 그름의 판단의 경계에서 자신의 결정을 계속 유보하고 억누르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정신 장애이다. 예컨대 자신을 범하려 했던 아버지가 있고(카나의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카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 그를 최악의 남자라고 생각하며 많은 남자들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만 일상 속에서는 그런 남자(들)의 또 다른 면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분노를 억제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일상은 돌발적이고 돌출적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사람의 행동을 두고 보통 그 앞에 ‘미친’이란 형용사를 쓴다. 카나의 행동이 점점 미친x 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결국 카나라는 이름의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인격성 장애를 앓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는 작품이다. 이중인격이 고착화 되어 있는 사회가 각 인격체에게 강제하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이 무엇인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상실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한다. 그러니 다들 이제는 나미비아를 찾아가야 한다. 나미비아의 사막 모래를 만져 봐야 한다.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는 나미비아는 궁극적으로는 미지의 자신이다.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알아내는 것, 그것이 개인의 방황을 그치게 하고 사회가 지닌 정신병적 증후군(노팬티 샤부샤부 같은 일탈적인 성 취향)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런 생각이나 판단까지도 필요 없는 얘기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그런 생각까지 꼭 해야 해?,라고 묻는 20대 감독의 도발적 시선이 담겨져 있다. 그냥 겪어내고 어슬렁거리며 그 고통의 시간들을 경과시키면 된다고 얘기한다. 그런 식으로 20대들의 생각, 행동의 일단을 훔쳐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영화에 대한 동의나 공감조차 그건 각자의 몫이다. 그 충돌의 정서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는 요즘 꽤나 젊어지고 있다. 부러울 뿐이다.
한국영화는 이러다 망할 것이다. 영화계 안팎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소리이다. 지난 3월말 경 프랑스 칸 영화제의 공식 경쟁작이 발표된 후 여기저기서 문의가 이어졌다. 한국영화가 왜 한편도 포함이 되지 않았느냐, 영화제도 작품 라인업을 정할 때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느냐는 식의 질문이 뒤따랐다. 물론 영화제는 그 해 행사를 준비하면서 올해의 키 워드, 주제, 방향을 결정한다. 그 큰 테마의 줄기에 따라 출품 경쟁작들을 선정, 배치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영화가 정치적으로, 의도적으로 이번 칸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다. 결론은 단순하다. 영화가 안좋아서이다. 영화의 수준이 칸영화제나 베를린, 베니스 등 유럽 3대 영화제, 아카데미, 선댄스, 트라이베카 등 미 대륙 영화제의 출품 기준을 밑돌기 때문이다. 영화제는 가차없다. 못 만든 영화는 아무리 거장이 만들었다손 하더라도 픽 업 하지 않는다. 영화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낯설고 새로운 작품이다. 혁신적인 내용의 영화들이다. 세상사에 대한 고민, 인간 실존에 대한 사유가 들어 있는 작품들이 우선적으로 채택된다. 지난 2~3년간 한국영화 중에는 그런 류가 전혀 없었다고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않다. 일본에선 이미 하마구치 류스케나 미야케 쇼, 네오 소라 등 현대 감독 3인방이 출현했다. 앞의 감독은 40대 중반, 뒤의 두 감독은 30대 초중반들이다. 일본영화계는 세대교체에 성공하면서 새롭고 낯선 영화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 故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인 네오 소라는 4월 30일 개봉된 ‘해피엔드’란 영화를 통해 일본사회가 AI기술을 이용해 또 다시 전체주의로 나아갈 우려가 있다는 경고음을 보낸다. 프랑스에서는 쥘리아 뒤쿠르노가 ‘티탄’이라는 기괴한 작품을 통해 트랜스 젠더를 뛰어 넘어 트랜스 휴먼 시대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줬는 가 하면 자매 감독 델핀 쿨랑, 뮤리엘 쿨랑은 ‘콰이어트 썬’이란 영화를 통해 극우화로 치닫고 있는 프랑스 20대 젊은이들에 대해 고민한다. 코랄리 파르쟈가 만든 ‘서브스턴스’는 지난 해 말 개봉돼 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줬다. 한국영화가 상투적인 조폭 영화에다 마동석 식 한방 액션에만 취해서 흐느적 거리고 모두들 OTT드라마에 몰려갈 때 세계 영화계는 훨씬 앞선 지점에서 세상사를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영화가 계속 이런 식으로 수준 낮은 돈벌이에만 치중하는 한 미래는 없다. 칸 영화제에 한국영화가 한편도 출품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영화 정책과 산업을 주도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장과 위원, 직원들이 5월 영화제 기간에 맞춰 칸으로의 해외출장을 준비중이라는 소식이다. 영화계의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영화인들 상당수가 배달과 대리운전, 상품 매장 아르바이트로 지내고 있는 때이다. 영진위원장은 대체 생각과 배려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인가. 영진위 해체론, 재구성론이 나오는 이유이다.
영화 '야당'은 일부의 오해처럼 정치영화가 아니다. 여당이니 야당이니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것이다. 결국 이 '야당'도 여야의 이야기, 정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모든 건 다 정치와 연결된다. 특히 한국사회가 그렇다. 한국사회를 그리려는 영화는 어쩔 수 없다. 정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영화 '야당'에서 야당이란 마약 조직 내부자와 대규모 거래를 위한 판을 짜고, 그 정보를 검찰에 넘기면서 조직 일부는 살리고 조직 일부는 검거하게 하는, 일종의 고도의 밀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 혹은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있는 말이 아니라 마약 범죄에서 쓰이는 은어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야당질 당했다'는 얘기는 마약 조직 혹은 마약범이 한 사기꾼의 술수에 넘어가 조직이나 돈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야당'은 이강수(강하늘)란 인물을 중심으로 그를 철저하게 이용해 먹고 버리는 간악한 검사 구관희(유해진)와, 구관희에게 뒤통수를 맞고 수뢰혐의로 구속까지 당하는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대의, 일명 옥황상제라 불리는 형사 오상재(박해준) 등 세명이 벌이는 삼각 관계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대통령 후보 아들로 마약 중독자인 조훈(류경수)이라는 파렴치범이 나오고 이 인간 탓에 중독자가 됐다가 추락한 여배우 엄수진(채원빈)이 얽힌다. 잔혹한 마약상 염태수(유성주)가 있고 북한산 마약을 밀매해 들여 오는 김학남(김금순)이란 여자가 활개친다. 인물들이 얽히고 설킨다.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영화 '야당'은 일종의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 계통의 영화이다. 류승완의 '부당거래'(2010),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2015)과 같은 계보의 작품이다.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란,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 내되, 거의 모사(模寫)에 가까울 만큼 현실성을 극대화하는 작품을 말한다. 그러나 앞선 작품들이 워낙 큰 인기를 모았던 탓인데다, '내부자들'과 '야당'이 같은 제작사인 하이브 미디어코프의 작품 탓이어서인지 마치 자기복제를 한 느낌을 준다. 바로 그 점이 개봉 초기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니냐'는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흥행 조짐이 뒤늦게 불이 붙게 된 작품이 됐다. '야당'은 오히려 개봉 일주가 지난 후, 순전히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흥행 바람을 타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도 영화가 지닌 역동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대중 관객의 만족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야당'은 '내부자들' 류의 영화와 같으면서도 다른 지점에 착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건 대중들이 서있는 위치가 10년 전인 2015년 전후와 지금이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회학적 요인'도 작동하고 있다. 그간 우리사회는 얼마나 더 뒤틀려졌으며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시달려 왔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지난 10년의 일그러진 그 고통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대중의 반응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야당'은 다소 폭력적이고 과장된 비틀림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난 몇 년간의 한국사회가 지닌 병적인 욕망, 그 추악한 민낯을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관객들이 현재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폭력이 주는 기이한 쾌감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내용의 영화야 말로 지금의 사회를 수렁 속에서 건져 내는 밧줄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감 때문이다. 영화 속 검사 구관희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마약 '판'을 짜고 사람을 이용해 먹고 가차없이 잘라 내며 비열한 뒷 공작으로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워 재판과 투옥이라는 '영혼 털이'를 자행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구관희는 서부지검의 부부장 검사까지 오르고 결국 그 위와 더 그 위로 점차 올라가려 한다. 구관희는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아들 조훈이 벌인 마약파티를 은폐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멀쩡한 경찰을 감옥에 보내는 한편, 뇌물 제공 혐의로 구속시킨('구속된'이 아니고) 대기업 오너에게 진술을 달달 외우게 해 상대당 후보에게 몇날 며칠에 돈을 건넸다고 연습 시킨다.(이건 마치 한명숙 총리가 구속됐던 뇌물수수사건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구관희는 다그치는 조훈에게 "내가 대통령을 만들 수도, 대통령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가 하면 결국 소변 검사를 위조해 조훈을 석방 시키려 한다. 동시에 상대당 대통령 후보에게 뇌물이 건네졌다는 자신의 각본에 맞춰 여성 대변인에게 구속 '영장을 치겠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악마의 끝판왕이지만 이런 내용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건 지난 4~5년간 우리 사회 내부에 그런 일이 횡행했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한국사회가 정치 검찰들의 왕국이었으며 그들이 자행하는 온갖 법기술로 이런 저런 사람들이 난자돼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영화 '야당'은 마약 거래 이야기로 시작해 정치 영화로 끝을 낸다. 그 이야기를 전환시키는 연출 솜씨가 만만치 않다.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곧 스토리와 스토리 텔링(스토리를 구축하는 방식), 캐릭터 설정 모두에 모자람이 없다. 원숙하고 출중하다. 영화를 만든 황병국 감독은 노장급에 속한다. 그의 데뷔작 '나의 결혼 원정기'(2005)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연출 호흡은 너무 더딘 편이어서 '특수본'(2011)이 실패한 이후 연출 대신 수많은 영화의 개성있는 조역으로 영화적 입지를 유지해 왔다. 이번 '야당'은 황병국의 연출 실력이 녹슬지 않았으며 영화적 패기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유해진의 남다른 연기가 돋보이며 박해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강하늘은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역에 있어 자신의 연기 톤을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흉내를 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고 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늘-이강수 캐릭터가 영화 전체를 약간 코미디처럼 만든 부분도 있다. 이건 호오가 엇갈릴 것이다. 영화 '야당'은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펼쳐 놓는 여러가지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 해법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야당'은 이야기와 인물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 놨지만 그 매듭의 시작을 알고 나면 그리 복잡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심사가 꽤나 복잡해진다. 영화 '야당'은 겉으론 꽤나 통쾌하고 대범한 척 한다. 그러나 역시 뒤로 가면 갈수록 이상한 울분이 쌓인다. 영화 '야당'은 알고 보면 겹겹이 주제를 감추고 있다. 양파 껍질 벗기듯 그 하나하나의 주제를 알아채다 보면 이 영화가 꽤나 심지가 있는 작품이란 걸 알게 된다. 올 상반기 한국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괜찮은 수작이다. 상업영화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조기 대선이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한달 반 정도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각 공기관이 이를 두고 고민에 싸여 있는 모양이다. 곳곳에서 기관장 알박기 인사가 꽤나 거세고 거칠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듯이 보인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문제가 터진 상태다. 기존 원장은 지난 2월에 임기가 다 됐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야 이미 원장추천위원회가 구성돼 공모를 내고 선임 절차에 들어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12월 계엄,내란 사태로 모든 것이 비정상이 됐다. 그런 ‘임시’ 상황이 4월 4일까지 계속됐던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있었고 이제서야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새로운 원장 임명 절차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자, 지금 이럴 때 새로운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을 뽑아야 하겠는가. 결론은 아니다이다. 대통령 선거 일정이 추후 1년이라도 남았다면 당연히 새 원장을 뽑아야 한다. 그러나 한달 반 정도 후면 어찌 됐든 새 정부가 구성될 것이다. 그때까지 유예해야 한다. 그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국립 아카이빙 기관이다. 모든 뉴스 자료는 KTV가 보관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대한늬우스’도 KTV가 갖고 있다. 뉴스를 제외한 모든 영상, 특히 영화의 경우는 한국영상자료원에 있다. 자료원 사무국은 서울 상암동에 있고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그러나 자료를 보관하는 창고는 비교적 막대한 규모로 경기도 파주에 조성돼 있다. 엄중한 국가보호시설이다. 그만큼 영상 자료는 국가의 기록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같은 아카이빙 사업을 주축으로 한국 영화문화 발전을 위한 각종 사업을 병행해 왔다. 1950~2000년 사이의 국내 클래식 무비를 대중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각종 기획전, 상영회를 만든다. 그간 35mm 필름으로 보관 중인 영화에 대한 모든 디지털 전환 작업도 자료원의 사업 중 중차대한 것으로 꼽힌다. 해외 우수 클래식 명작들을 초청 상영하는 것 역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상암동 자료원 건물 지하에 마련돼 있는 두개의 상영관에는 연일 관객들이 몰리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은,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은 자리는 아니겠으나, 영화계 인사들에게는 매우 중차대한 위치의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원장 직에 새로 임명될 인물을 신중하게 판단해 결정해야 한다. 향후 3년의 시간동안 한국영상자료원은 물론 국내 영화계 문화산업 전반의 미래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와 새 정부 구성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새롭게 임명하는 것을 넘어 현재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명 알박기 인사는 재고 되어야 한다. 1968년 프랑스의 6.8 혁명은 파리 시네마테크 원장인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하면서 촉발됐다. 모든 일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다. 한국영상자료원장의 문제는 사소한 일 처럼 보이지만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