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아마도 이 지면을 통해서 한번 얘기한 바 있을 것이다. 일본 석학 다치바나다카시 얘기다. 『그는 도쿄대생은 죽었는가』라는 저서에서 “세상은, 결코 스페셜리스트가 지배하지 않는다, 제너럴리스트가 이끈다”고 했다. 이 말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끼는 때도 없다.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 씨가 그 점을 상징처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는 역설적으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기는 중이다. 윤석열 후보와 같은 스페셜리스트는 자신이 필요에 의해 쌓은 지식 공학의 범주에서만 세상을 보고, 또 잣대를 만들어 낸다.(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이다. 사모펀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조국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주입돼 있었다.) 스페셜리스트들은 대개 수직주의자들이다.(주 120시간 노동시간 발언.)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급과 계층에 대한편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를 알지 못한다는 발언.) 반면 제너럴리스트는 광범위한 지식을 구하려 노력한 덕에 그래도 세상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제너럴리스트들은 응당 수평주의자가 되며 세상에서 평등과 함께 분배에 대한 올바른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대체로 남의 말을 많이 듣거나 그러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지식으로 차별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 그의 국정 지지도가 비교적 건강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본다. CBS 라디오 大기자 출신으로 현재 YTN의 ‘뉴스가 있는 저녁’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앵커를 맡고 있는 변상욱 씨는 최근 『두 사람이 걷는 법에 대하여』란 에세이를 냈다. 마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이념의 균형론을 얘기하는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연상될 만큼 온통 명언과 경구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특히 그는 수십 년 간의 방대한 독서량을 보여 주듯 수많은 작가, 예술가, 학자의 책들을 인용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일종의 과학 철학에서부터 에밀리 디킨슨의 시, 피카소의 예술론, 이집트의 페미니스트 전사 후다 샤으라위, 미국의 진보주의자 하워드 진,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실패했지만,사회주의 농업경제의 부흥을 꿈꿨던 줄리어스 니에레레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국경은 끝간 데가 없다. 톰 행크스가 제작한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 우리 영화 ‘벌새’ 등등 영화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피력한다. 정치적 지도자가 그처럼 광범위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겠다.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격 요건을 다소 완화시켜 준다 한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1) 청년기에 인문과학에 대한 접근성이 좋았던 사람이거나 그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던 사람이어야 한다. 2) 부족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틈틈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3) 역사/ 철학/ 사회학/ 문학/ 소설/ 영화/ 연극/ TV 드라마/ 컴퓨터 게임 등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버리지 않고 최소한 그러한 문화예술적 활동을 하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혹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제1야당이라는 국민의힘의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잦은 말실수, 흔히들 얘기하는 망언을 일삼는 것은 위의 1, 2, 3 항목에 다 비껴 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후보는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릇 국가 운영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고도화/ 전문화/ 분업화돼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세련되어야 한다. 후자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들 떠들어 대는 이른바, 국격(國格)이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프랑스 현대영화를 대표하는 브루노 뒤몽의 신작 《프랑스》는 유명 여성 앵커 ‘프랑스 드뫼르’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 주인공 이름을 굳이 ‘프랑스’로 했고 그걸 또 제목으로 갖다 썼을까. 브루노 뒤몽 같은 자연주의자들은 알고 보면 면도날 같은, 무엇보다 매우 구체적인 일상의 에피소드를 동원해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을 드러낸다. 이번 작품을 가지고는 한 저널리스트와 그녀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이라는 설정을 통해 지난 20년간의 프랑스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려 한 것으로 느껴진다. 프랑스는 20년 동안 니콜라 사르코지(그는 내무장관 시절인 2005년 파리 북부 빈민가 방리유의 소요사태를 폭력적 경찰력으로 진압했고 그것으로 우파의 지지를 받았다.)에서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지지율이 4%까지 떨어졌었다.)까지 실망과 좌절을 겪었다. 유능한 인재로 차기 대통령감이라 여겨졌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은 IMF 총재 자격으로 뉴욕에 갔다가 호텔 메이드를 겁탈하려다 정치·사회적으로 멸종됐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젊은 대통령이 마크 롱이었던 바, 그에 대해서도 다소 신통찮아 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브뤼노 뒤몽은 영화에서 ‘이제 진보는 없어. 이상 따위도 없어. 사람들은 더 이상 국가라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없어’라고 일갈한다. 그저 현실을 충일하게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토론이라고 하는 것이 1회 정도는 이런 인문학적인 수다로 질의응답을 채워 보면 어떨까 싶다. 후보들을 경쟁적으로 앞세워 TV 오락 프로그램이나 버라이어티 쇼에서 노래나 춤을 추게 하지 말고. 그 무슨 꼭두각시 모양새인가. 그런 아이디어는 과연 누가 내는 것인가. 좀 세련되어졌으면 좋겠다. 이제 그럴 때도 됐다. 정치가 천민화하는 ‘꼴’을 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타짜’, ‘아멜리에’, ‘해리포터’, ‘파이란’, ‘고양이를 부탁해’ 등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검증받은 영화들이 재개봉하며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이달 1일에는 ‘타짜’가, 지난달에는 ‘파이란’과 ‘반지의 제왕’이, 10월에는 ‘해리포터-마법사의 돌’과 ‘고양이를 부탁해’가 각각 재개봉했다. 타짜는 개봉 15주년을, 나머지 영화들은 개봉 20주년을 기념한 재개봉이었다. 각 작품의 면면을 보면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명작들이다. 아무 영화나 재개봉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개봉 영화는 영화를 관람한 기존 관객에게는 ‘향수’를 추억하게 하고, 영화를 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케이블에서나 보던 작품을 대형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당시 시대상을 만나는 ‘새로움’을 제공한다. ◇ 추억으로 여행하다 오래전 영화가 재개봉되면 배우는 추억에 잠긴다. ‘파이란’(감독 송해성) 리마스터링 버전을 본 배우 최민식은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본 기분”이라며 “언제 어디서나 꺼내 볼 수 있는 문고판 소설 같은 작품을 하고 싶었는데 ‘파이란’이 그런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최민식은 파이란을 통해 그해 청룡영화상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개봉 당시 청춘 영화의 바이블이자 주목받는 여성영화로 꼽혔던 ‘고양이를 부탁해’(감독 정재은)는 배우 배두나, 이요원 등의 20대 풋풋한 시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 당시 청춘 스타정도로 평가받던 두 배우는 이 영화를 통해 실력파 배우로 거듭났다. 배두나는 제9회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이요원은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과 함께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지금은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배우가 된 배두나는 “아직도 ‘태희’처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20년이 지났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여전히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하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재개봉의 감동은 영화에 참여한 당사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20년 전 어린 시절 극장을 찾아갔던 관객들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낀다. 2001년 겨울 개봉해 신비로운 마법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선보였던 ‘해리포터-마법사의 돌’ 관람평에는 ‘진짜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순간을 잊지 못해요. 영화관에서 개봉할 때마다 예매하고 보는데 너무 설레고 봐도 봐도 너무 재밌습니다(thgu****)’, ‘볼 때 마다 설레고 나를 희망 속으로 데려가주는 느낌? 진짜 해리포터는 나의 어린 시절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sose****)’ 등의 당시를 회상하는 관객의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 새로움을 입다 재개봉한 영화들은 현재의 기술을 새로 입고 관객들을 찾는다. 지금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모두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됐다. 리마스터링은 ‘마스터’(원본)의 화질과 음질을 개선해 더 나은 품질로 재생산하는 작업을 뜻한다.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감독은 “디지털 리마스터링이 영화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건 아니지만, 미래의 관객들과 또다시 소통할 수 있는 창문 하나를 열어놓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기대감을 GV를 통해 밝혔다. 영화를 보지 못했던 관객 입장에서는 커뮤니티에서 밈(meme)으로 유행하는 콘텐츠의 원작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분되는 일이다. 대표적 작품이 ‘타짜’(감독 최동훈)다. “묻고 더블로 가”,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등 커뮤니티에서 유행어가 된 이 대사는 영화 속 곽철용(김응수 분)의 원작이기도 하다. 최 감독은 ‘타짜’의 리마스터링 버전 개봉을 앞두고 특별 영상에서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은 후일담도 공개했다. “평경장의 유명한 주문 ‘아수라발발타’는 백윤식 선생이 현장에서 갑자기 혼자 만들어 내뱉은 대사다”, “고니의 누나가 운영하는 중국요리집 장면은 원래 없었다가 현장에서 급하게 대사를 썼다”, “고광렬의 속사포같은 대사를 1분 안에 해달라고 유해진 배우에게 주문하기도 했다” 등등의 이야기는 영화를 처음 또는 다시 만날 관객을 즐겁게 하는 요소다. ◇ 추억과 새로움의 만남, 시장을 만들다 재개봉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영화도 있다.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다시 찾아온 영화 ‘아멜리에’(감독 장 피에르 주네)가 그러하다. 영화는 몽마르트르의 풍차 카페 직원으로 일하며 평범한 일상 보내고 있던 아멜리에게 찾아온 운명적인 사건을 그린 어른들의 동화다. 유수 영화제 133개 부문 노미네이트, 59개 부문 수상이라는 기록과 뉴욕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엠파이어 선정 세계 100대 명작,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00, 롤링 스톤 선정 최고의 로맨틱 코미디 등 화려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개봉 당시에는 18세 관람가 등급이었으나, 이번 재개봉은 15세 관람가가 됐다. 작품 속 노출 등의 장면을 삭제나 수정하지 않고 나온 이례적 결과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노출이 성적 맥락에서의 노출이 아니고, 성행위도 노골적이지 않으며, 표현이 코믹하고 간접적이다”고 이유를 밝혔는데, 작품 속 노출에 대한 이해가 과거보다 폭넓어졌다는 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보인다. 재개봉이든 리메이크든 과거의 작품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그동안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는 문화적 산물의 방증이기도 하다. 일명 뉴트로(new-tro)다.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표현이다. 앞서 언급했 듯 아무 영화나 재개봉의 기회를 갖는 게 아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여러 산업에 불고 있는 ‘레트로·뉴트로 시장’이 영화계에도 영향을 주고, 점차 확대되면서 재개봉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나타나 자리를 잡는다”고 설명했다. [ 경기신문 = 유연석 기자·정경아 기자 ]
에릭 홀트하우스의 저서 ‘미래의 지구 – 온난화 시대에 대응하는 획기적 비전’에 따르면 2030년에는 지구 멸망의 시그널들이 본격화 된다. 당신은 내일, 혹은 며칠 후나 몇 달 후에 세상이 망한다면, 그래서 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뭐 근데 그런 질문을 하는 영화들은 많다. 예컨대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이 만든 ‘세상의 끝까지 21일’에서 주인공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친구를 만나러 간다. 스티브 카렐은 아내보다는 옛 여자친구를 찾으러 간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다른 지역(뉴욕에서 시애틀로)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세상이 끝나는 날에 친구 찾기,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였다. 대부분 가족을 만나러 가지만 또 대부분은 ‘막 산다’.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아무나 붙잡고 섹스를 하는 데다 임신이나 성병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살이 찌는 것 따위는 더욱 더. 3주 후면 다들 죽는데 뭐. 곧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과연 무엇을 할까의 질문은 그걸 아무리 코믹하게 그린다 해도 마음속은 서서히 침잠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울에 빠지게 된다. 넷플릭스의 새 영화 ‘돈 룩 업’은 지금까지 나온 지구 종말 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죽기 전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보다 사람들, 곧 인류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곧 죽는 것이 확실시 되면, 상태가 좀 나아질까? 그동안의 광기를 멈추고 정신들을 차리게 될까? 천재적 스토리텔러인 아담 맥케이 감독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그럴 기미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현재는 암담하지만 미래도 절망적이며, 죽기 직전까지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영화 ‘돈 룩 업’은 장르상으로는 코미디로 분류돼 있지만 그냥 이건 디스토피아 드라마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두 가지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데 웃다가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하는 심정이 된다. 이른바 웃프다이다. 그래 뭐, 지구가 오래 안 간다는데 더 이상 뭘 어쩌겠는가. 환경 저널리스트 에릭 홀트하우스와 달리 영화감독 아담 맥케이는 지구 멸망의 단초를 혜성 충돌로 삼는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는 천체 관측을 하던 어느 날 거대한 혜성을 발견한다. 천문학자 사이에서 이런 일은 일종의 로또를 맞는 것과 같다. 그녀는 자신의 성(姓)을 딴 디비아스키 혜성의 발표를 눈앞에 두고 흥분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직후에 일어난다. 케이트는 지도교수 랜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함께 혜성의 이동 거리를 파악하던 중 이 에베레스트 크기의 괴물 혜성이 6개월 반 후에 지구와의 거리가 0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구와 정면충돌하는 것이다. 6500만 년 전에 공룡이 멸종할 당시, 운석이 충돌한 사건과 같은 것이다. 인류는 멸종된다. 자 이 소식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랜들과 케이트는 오만 군데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NASA의 박사가 동행한다. 물론 백악관부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통령은 일종의 여자 트럼프이다. 대통령 올리언(메릴 스트립)은 얼마 전 대법관을 임명했는데 이 인간이 포르노 출연 경력이 있어 논란이 된다. 올리언은 임명 철회를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이 대법관 후보를 ‘쉴드치려’ 한다. 둘은 한때 내연 관계였기 때문이다. 올리언은 대법관 지명 철회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여론의 향배, 자신의 지지율 추이 외에는 관심이 없다. 올리언이 케이트–랜들의 위기 진단을 받아들이는 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이슈는 이슈로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초기 대응이 미적지근할 때 이 천문학 연구자 둘(에 대해 백악관 비서실장은 하바드나 MIT 출신이 아니고 미시건 주립대 출신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는 식의 ‘재수 없는’ 태도를 보인다. 이 비서실장의 성도 올리언이다. 곧 엄마가 대통령이란 얘기다. 트럼프의 딸 이방카가 백악관 보좌관 일을 맡았던 것을 빗댄 것이다.)은 신문사와 방송국으로 향한다. 가장 인기 있는 쇼에 출연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는 의지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여기나 거기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어디나, 방송과 언론은 이미 정론의 역할과 위기 센터의 역할을 포기하거나 상실한 지 오래다. 그것은 두 사람이 인기 진행자 브리(케이트 블랜쳇)와 잭(타일러 페리)의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했을 때 극에 달한다. 이날 이 프로그램의 메인 이벤트는 아리아나 그란데(실제로 아리아나 그란데가 나온다)의 출연이다. 그란데는 얼마 전 남친과 ‘쩍’ 갈라섰고 오늘 출연에서 그 과정을 고백할 예정이다. 그런데 웬걸 방송국은 그란데의 전 남자친구를 생방송으로 연결하고 두 사람은 각자 누구와 누구와 바람을 폈네, 사실은 그 상대와 잤네 어쩌네 얘기를 하다가 재결합하자는 폭탄선언을 한다. 방송과 시청자들은 난리 난리 난리부르스가 난다. 그러니 케이트와 랜들의 지구 멸망 소식은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냐는 반응들이다. 여성 진행자 브리는 잘 생긴 랜들 교수에게 ‘눈짓’을 보낸다. 대학원생 케이트는 결국 생방송 도중 폭발하지만 그녀가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은 ‘밈’으로 회자되며 비웃음만 사게 된다. 영화 ‘돈 룩 업’에서 묘사되는 지구 멸망 전, 사람들의 모습은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가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도대체 머릿속에 어떤 쓰레기들을 담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한다. 일단 사람들은 진실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아무리 세상이 망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라는 태도들이다. 그러고 나서는 나중에 가서야 온갖 난리를 친다. 패닉에, 패닉에, 또 패닉에 빠진다. 이건 진정한 위기 불감증 때문이거나 아니면 나 하나만 살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의 극단적 이기주의의 발로 때문이다. 정치권의 진영 논리, 편 가르기 역시 극에 달해 있고 결국은 진정한 정치가 진짜로 실종돼 있는 현실이야 말로 사람들을 다 죽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영화는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백악관 비서실장 제이슨(조나 힐)은 바로 그런 일에 전문인데 그는 엄마인 대통령과 함께 한 대중연설에서 자신들의 속내를 이렇게 드러낸다. “여기에 우리 같은 상류가 있고 거기에 당신들과 같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에 저들(지식인과 좌파)이 있죠. 우리는 저들이 필요해요. 왜냐?! 바로 당신들과 우리를 같이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의 인간은 최첨단 IT사업자(마크 라이런스)이다. 이 사업자는 핵을 탑재한 우주선 미사일과 그걸 몰고 가는 극우 자살 특공대장(론 펄만)을 발사 이후 귀환시킬 만큼 개인의 탐욕에 빠져 있는 상태다. AI에 의한 빅데이터의 결과치임을 내세우는 이 IT사업자는 혜성 자체가 반도체에 필요한 천연물질로 돼 있다며(희토류를 암시한다) 이걸 잘게 쪼개서 태평양 바다에 떨어 뜨려야한다고 대통령을 꼬드긴다. 올리언은 그의 편을 들고, 미국과 세계는 랜들 박사 방식이냐, 이 IT사업자 방식이냐를 두고 또다시 논쟁을 벌인다. 시간은 째깍째깍 코앞으로 다가 온다. 지구는 이제 곧 폭발한다. ‘돈 룩 업’이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불문가지, 명약관화이다. 지구는 멸망하기 전에 이미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순전히 인류, 곧 인간들의 천박함과 오만함, 비루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에 하나 지구가 위기를 피해 가고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물질적이고 과학적인, 혹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해법보다는 정신의 혁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혁.명 사.회.철.학.의 복.원 6500만 년 전에 공룡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진 정신적 지도자들의 가르침 같은 것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적 스승의 부재야말로 지금 세상이 지닌 절체절명의 위기임을 영화는 정확하게 지적해 내고 있다. 그런데 그걸 굉장히 웃긴 방식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처절하게 직설(直說)을 던지는 방식으로. 마지막 순간 히피 청년(티모시살라메)의 기도 문구가 가슴에 콱 와 박는다. 우리에게 그 어떤 위기의 순간이 닥쳐오더라도 우리 모두를 담대하게 하소서라고 그는 기도한다. 맞다. 아담 맥케이 감독이 애기하려는 것도 이 담대함이다. 자존감을 갖고 이 부당하고 부정직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세상에 당당히 맞서고, 임하라는 뜻이다. 전설의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였다면 지구의 마지막 날 전에 이런 멘트를 했을 것이다. “오늘은 저의 마지막 방송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 27년간 방송을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시청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지낼 겁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행운이 함께 하기를. 신의 가호를.” ‘돈 룩 업’의 주인공들도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눈다. 신은 의로운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 ‘단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한다. 모두들 그 ‘단 한 사람’이 돼야 할 때이다. ‘돈 룩 업’은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영화이다. 자 세상이 멸망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자,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화제작 ‘드라이브 마이 카’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 하나, 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된다는 점(그의 전작 ‘해피 아워’는 장장 5시간28분짜리이다)이고, 거기에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기 전인 인트로 부분이 물경 50분이나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평자(評者)들을 제일 깜짝 놀라게 하는 점은 그 50분이 하루키의 소설 단 몇 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류스케의 영화적 상상력이 하루키의 문학적 상상력에 못지않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문학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류스케는 그걸 뛰어 넘으려 한다. 신세대다운 발상이다. 류스케는 1978년생, 이름하여 M세대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50분을 할애한 하루키 소설의 분량은 이 작품이 수록된 ‘여자 없는 남자들’의 26페이지에서 29페이지까지 단 세 장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지만 아내는 이따금 다른 남자와 잤다. 가후쿠가 아는 한 상대는 모두 네 명이었다. 최소한 정기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자가 네 명이었다는 얘기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아내가 죽은 후 고독하고 상실된 삶을 살아간다. 그를 괴롭히는 건 아내의 혼외정사가 아니라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고 그것이 혹시 자신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그녀는 왜 자기를 일상 속에서 배반했으면서도 늘 자신에게 돌아왔고 또 계속 사랑했을까. 그녀의 섹스를 질투했으면서도 왜 자신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었을까. 하루키는 그에 대해 그다지 많은 답을 내놓지 않는다. 문학의 질문은 현상인 아닌 본질에 대한 것에 있으며 따라서 답은 다소 엉뚱하거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더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지 구체적인 해답을 얻는 쪽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추상과 관념에 접근하는 구체와 실재를 보여줘야 한다고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류스케는 그래서 극중 인물인 가후쿠의 아내에게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래야만 했던 이유(젊은 남자와 정사를 벌여야만 했던 까닭)와 갑작스런 죽음의 과정, 그 스토리를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50분이란 시간의 소요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 지금부터는 영화가 가미한 이야기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기반을 했지만 상당 부분은 재창조됐다. 가후쿠의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각본가이다. 그녀는 원래 TV 연기자였다. 그러나 ‘어떤 사건’ 이후 배우 일을 그만 뒀다. 가후쿠는 여전히 연기 일을 한다. 그는 무대 배우다. 종종 연출을 맡을 만큼 중견 연기자이다. 그의 전문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이다. 가후쿠와 오토 사이의 ‘어떤 사건’은 바로 이들 사이에서 태어 난 딸아이가 네 살 되던 해에 폐렴으로 죽은 일이다. 그 일이 둘 사이를 변하게 했다. 아이는 2001년에 죽었으며 때문에 살아 있었다면 이미 20대였을 것이다. 아내 오토가 죽은 것은 지금 현재 시점에서 보면 4년 전이다. 아내의 사인은 갑작스런 지주막하출혈이다. 원래 소설에서는 급격한 자궁암 악화였고 고통 속에서 죽었지만, 영화에서는 가후쿠가 집에 돌아와서 쓰러져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는 설정이다. 오토는 가후쿠가 집을 나서기 전,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얘기 좀 하자는 말을 했었는데 다 알다시피 부부가 ‘우리 얘기 좀 해’라는 말을 어느 한쪽이 꺼내 들었을 때는 그게 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가후쿠도 오토가 ‘어떤 결단’을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일부러 늦게, 늦게 귀가했고 아내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가후쿠는 그 며칠 전 러시아 출장을 가다가 비행기가 연발되는 바람에 다시 집에 돌아왔는데 거실에서 다른 남자(젊은 배우)와 소파에서 섹스를 하는 아내를 목격한다. 그녀는 그가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내는 자신이 저지르는 배덕의 섹스를 남편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가후쿠 역시 오토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걸 다시 자신이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을 역시 오토가 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오토가 밤에 들어 와 ‘우리 얘기 좀 해’라고 하는 것은 그 전반적 상황에 대한 얘기일 것이다. 가후쿠가 두려운 것은 또 한 번의 상실이다. 그는 딸을 한 번 잃었고 이번에는 어쩌면 아내를 잃을 수 있다. 그는 그녀가 바람을 핀다 한들 그게 상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에서 여기까지는 밝힌다. 류스케의 영화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아내 오토는 더 이상 갑작스런 상실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며 차라리 상실을 주체화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상실이란 것이 무엇인지, 그 관념을 주체적으로 실재화하면 무엇이 되는지,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알고 싶으며 그럼으로써 지나간 상실을 역설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렵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남편을 버림으로써 이겨내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남편을 지극히 사랑한대도 그렇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니까 더욱 그렇다. 자식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기가 힘들어질 수가 있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얘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아내의 인격에 그러한 구체적인 스토리를 채워 넣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구체화가 마음에 들었다. 아내의 섹스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그것을 응원까지는 못하더라도 딴 남자와 섹스를 해서라도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옆에 붙들고 있고 싶게 만든다. 영화는 그러한 마음에 동조하게 만든다. 소설과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주인공 가후쿠가 약간의 음주와 시각 장애로 접촉사고를 일으키고 그래서 개인 운전기사가 필요해졌다는 설정에서도 차이를 벌린다. 영화에서는 음주를 없앴다. 그리고 접촉사고를 일으킨 것은 소설에서는 아내가 죽은 후이고 영화에서는 죽기 전이다. 어쨌든 그가 운전기사인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나게 되는 것은 히로시마 연극제에 올라가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아내의 정부(情婦)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를 캐스팅한다. 히로시마 연극제에 올라가는 ‘바냐 아저씨’는 일종의 다언극(多言劇)이다. 극 중 연기자들이 각자의 언어를 쓴다. 영어 / 타갈로그어(필리핀 표준어) / 한국수어(手語) / 중국어 / 일어 등이다. 연극이라고 하는 것이 언어가 아니라 행위의 예술이고 소통의 궁극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연기자들은 상대의 언어를 알아들어야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 자체를 이해해야 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안에 독특한 액자 연극을 한 편 만들어 놓는데 그것 역시 하루키 문학의 경지를 뛰어 넘으려는 류스케의 또 다른 시도이다. 그리고 그게 참 좋다. 독특하다. 새로운 작품, 새로운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들어 냈다. 어쩌면, 가후쿠와 운전기사 미사키의 관계, 우정, 직업을 뛰어 넘는 이해와 소통의 문제는 그것을 또 넘고 넘어서는 문제이다. 솔직히 그 부분은 다소 작위적이다. 진부한 면이 있다. 가후쿠는 복잡한 심경을 이겨내기 위해 히로시마에서 미사키의 고향인 홋카이도의 어디론가로 꼬박 하루를 다녀온다. 미사키의 고향은 산사태로 사라진 상태다. 미사키 역시 어린 시절 이미 큰 상실을 겪은 터이다. 소설과 영화는 매우 다르다. 소설에서는 아내가 죽은 지 10년이 넘었고 가후쿠는(하루키처럼) 60대가 넘은 늙은 남자다. 하루키는 주인공을 꼭 자신과 비슷한 얼터에고로 묘사한다. 그게 좀 재수가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아내가 죽은 지 꼭 4년째로 설정이 된다. 가후쿠의 나이도 40대 후반 정도다. 훨씬 낫다. 소설도 하루키의 작품 중 단연 최고급이지만 영화도 그에 못지않다. 영화가 매우 훌륭하게 자기 길을 갔다. 영화와 소설의 조우(遭遇)는 새로운 창조다. 어떤 작가끼리 만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류스케는 마치 하루키가 영화감독이 된 것 같은 존재이다. 일본영화계의 신인류라는 표현이 걸맞은 영화작가이다. 오랜만에 일본영화의 부활을 경험한 듯한 작품을 만나게 될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꼭 권하게 되는 작품이다. 아! 오토는 남편 가후키와 정사를 벌이며 연극 대본의 줄거리를 얘기한다. 칠성장어에 대한 얘기이다. 그 부분을 주목해 보시길 바란다.
1613년에 이탈리아 페샤(pescia)의 한 수녀원에서 벌어진 섹스 스캔들이 500년 만에 영화 ‘베네데타’로 부활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거장인 폴 버호벤이 만들었다. 폴 버호벤은 83세로, 우리에겐 ‘원초적 본능’이나 ‘로보캅’, ‘쇼걸’, ‘스타쉽 트루퍼스’란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전작인 ‘엘르’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할리우드보다 파리를 근거지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솔직히 그는 언제부턴가 퇴물 감독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폴 버호벤은 폴 버호벤이다. 특히 이번 신작 ‘베네데타’는 노령인 그의 거의 마지막 역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오랜 숙원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베네데타’는 실화다. 1613년에 벌어진 한 종교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현대의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주디스 브라운 교수에 의해 ‘수녀원 스캔들 –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By Judith C. Brown. 214 pp.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이란 논문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폴 버호벤은 그 역사서를 매우 도발적인 드라마로 뒤바꾸어 놨다. 영화는 매우 외설적이고 야하다. 폴 버호벤 영화가 다분히 그래 왔듯이 수위가 상당히 높다. 나오는 여성들, 수녀들은 자신들의 나신(裸身)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그도 그럴 것이 ‘베네데타’ 실화의 상당 부분은 섹스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적나라함(nudity)은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베네데타’는 17세기 초반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무엇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점이야 말로 이 영화를 통해 폴 버호벤이 보여주려는 진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베네데타 까를리니는 벨라노 출신이다. 그녀는 어릴 때, 그러니까 약 8세 때부터 수녀가 됐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가문의 영광 같이 여겨지던 때였다. 베네데타의 집안은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지불해 가면서까지 그녀를 수녀원에 들여보낸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 증상이 나타난 것은 23살이 되던 때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환상을 신성화하기 시작한다. 베네데타(비르지니 에피라)에게 빙의가 일어나는 것도 이때쯤부터인데, 그녀는 성인 남자(예수)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등 신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음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영화는 기록과 역사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각색을 통해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처럼 손과 발에서 피를 내는 베네데타의 모습을 그려 낸다. 그녀는 당시의 예수가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는 지적을 받자 이마에서 피를 쏟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성령이 역사(役事)하셨음을 증명함으로써 30세의 이른 나이에 페샤 수녀원의 원장이 된다. 이때부터 그녀는 비교적 무소불위의 인간이 돼 가는데 그녀는 바로 예수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수녀원 주변에서 살아가는 민생들도 그런 그녀를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고단한 인생살이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들의 죄를 대속(代贖)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세상에는 막 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열망한다. 베네데타는 사람들의 그런 심리에 딱 부합되는 인물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때부터 베네데타는 수녀 견습생인 바톨로메아(다프네 파타키아)와의 성관계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의 베네데타는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성에 눈을 뜬 바톨로메아로부터 섹스를 알게 된다. 바톨로메아는 베네데타를 위해 마리아 성상을 이용해 자위 기구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베네데타의 이런 행각은 결국 대교구에 고발 조치된다. 영화에서는 베네데타에게 원장 자리를 뺏긴 전 원장(샬롯 램플링)이 고발하는 것으로 나온다. 베네데타와 바톨로메아는 곧 종교재판에 넘겨진다. 실화에서든 영화에서든 베네데타는 대교구 감찰 주교에 의해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중세에서의 심문은 곧 고문을 의미한다. 감찰 주교는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신성모독이자 베네데타의 음란하고, 권력을 탐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예수처럼 양 손에서 피가 나는 것도 그녀의 자해(自害) 때문일 수 있음을 밝혀내려 한다. 베네데타는 바톨로메아의 섹스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속에 들어 온 청년 예수가 시켜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톨로메아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는데, 그녀는 베네데타의 자위 기구를 증거로 제출하기도 한다. 영화의 결말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1610년대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막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종교가 이성적이 돼가던 시기였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 빈번하게 자행되던 매관매직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었고, 신부나 수녀의 성적 일탈 행위는 다반사처럼 벌어지던 때였다. 종교가 전부였던 중세에 종교가 가장 타락했었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개혁의 형태로 진행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그와 같은 시대적 배경이야 말로 베네데타에 대한 종교재판이 엄정한 형태로 진행됐던 이유이고 그녀의 종교적 범죄 행위를 증거나 증거물, 합리적(?) 증언으로 입증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맹신과 불신이 교체되던 시기였고 종교적 환상과 과학적 이성이 교차되던 시기였다. 개혁론자들은 아직 어설펐고, 민중들은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못했다. 수도원 주민들은 여전히 베네데타에게 성령이 임해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페스트로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어 가는 중이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폴 버호벤의 생각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시대가 됐든 가치와 이념이 흔들릴 때, 그리고 그 혼란이 극에 달할 때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형태이든 역병이 창궐한다는 것이다. 베네데타와 페스트의 대구(對句)는 기이하게도 지금의 정치적 상황과 코로나19로 겹쳐 보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종교적(정신적) 아노미에 빠져있는가. 세상은 어떤 정치적 혼란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가. 바로 그 점이야 말로 폴 버호벤이 보여주려는 카오스(chaos)의 정치학이다. 혼란에도 법칙이 있다. 나중이 돼서야, 그 법칙이 보인다는 것이다. 혼돈의 와중에는 혼돈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혼돈스럽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온갖 거짓의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늦게 온다. 그게 늘 문제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문제다.
이건 아니다. 지난 6일의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쏟아진 말들이 그랬다. 이건 아니다. ‘지긋지긋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라니. 누가 그에게 그렇게 왜곡된 연설문을 써서 줬을까. 미완성이긴 해도 한반도 종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다 코로나19의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세계 8위의 무역 대국을 이루어 낸 정부가 무능하다니. 한치의 부정도 없는, 심지어 아티스트인 아들이 공적 지원을 받는 것조차 시비를 받을 정도로 투명한 대통령이 부패하다니. 그것이야 말로 숱한 ‘차떼기 뇌물’의 역사와 국정농단의 과거를 지닌 정당의 후보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가 창피하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염치라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 그러므로 해서 더더욱 이건 아니다. 여성은 군 복무를 하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하되 자식을 2명 낳은 여자는 예외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인재랍시고 영입하려 했던 당사자들이 ‘스트릿우먼 파이터’를 축하 댄스 무대로 장식한다. 한 마디로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스우파’의 스피릿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격적일 만큼 당당한 여성상을 시대가 받아들여야 하며 또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막 갖다 쓸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건 더욱더 아니다. 정규직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30대 자영업자를 핵심 지지자로 갖고 있는 정당이 ‘오징어 게임’의 주제곡을 행사용으로 쓸 일은 아닌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주창하는 주제의식은 인간에겐 극단화된 계급사회를 바꾸겠다는 선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미혹의 언어를 내세워 사실상 계급사회를 추구하는 정당이 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한 마디로 ‘얻다대고’인데 대중 추수주의(大衆 追隨主義: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의 전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걸 두고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건 더욱 아니다. 총괄선대위원장이라고 하는 김종인 씨는 ‘문재인 정부가 쫓아내려 안달했던 강직한 공직자가 공정과 정의의 상징으로 이 자리에 있다’고 했는데 윤석열 후보는 만인이 알다시피 스스로가 검찰 정치를 하기 위해 사표를 내고 나온 사람이다. 대통령은 그를 쫓아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절차적 민주성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대통령의 권한을 너무 소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강직이라는 단어는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 뇌물수수사건 무마 의혹부터 부인의 도이치 모터스 주가 조작사건 의혹까지 온갖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쓸 말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을 그렇게 막 갖다 쓰면 안될 일이다. 그것도, 대장동 개발 과정에서 아들을 통해 5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챙긴 자가 있던 정당이 할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또한 심대하게 염치가 없는 태도이다. 알면서도 정치적 수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심각한 악의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나이 ‘자신’ 분이 그러면 안될 일이다. 또 이래서도 이건 아니다. 상임선대위원장이라는 김병준 씨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향해 ‘국가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결합할 때 나라도 민족도 파국 파산 파멸했다’고 했는데 국가주의란 말은 배운 사람이라면,그것도 교수 출신이라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맞는 인간이나 집단을 향해서 해야 할 말이다. 김병준 씨처럼 기회주의적 작태의 극치를 보이는 사람이 자유주의 철학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운 일일 수 있다. 이건 아니다의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표창장 위조 의혹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무려 징역 4년을 살게 하면서 동시에 온갖 학력, 이력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실정법의 잣대를 적용하지 않거나 미루고 있는 것은 공정하지가 않다. 그 사람의 석사 학위를 부여했던 대학이 그 심사과정에 대한 조사를 미루는 것은 실로 눈에 다 보이는 일이다. 시간을 벌자는 것일텐데 그들은, 그 학교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대학사회가 그러면 안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는 더 이상 진부할 대로 진부해져서 하고 싶은 말도 아닌데 그건 진실로, 진실로 선택적 정의에 불과한 얘기인 것이다. 이거 아니지 않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도 부지기수다. 손바닥에 왕(王) 자와 같은 특정 문양을 필요할 때마다 주문(呪文)용으로 새기고 다니며 무속인의 ‘고견’을 일상에서 함께 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축복을 기원해 주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 건 정말 아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이것도 아닌 일이다. 전국 유세 현장에 사전 녹화한 후보의 AI 영상을 틀겠다는 것은 첨단과학의 이기를 오용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실시간 토론과 현장 유세를 통해 대중을 만날 때 그가 하는 언변의 진실성을 가릴 수가 있다. 국가운영의 능력이 자발성에서 나온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가 있다. 아바타라니.이건 무슨 오염된 과학인가.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 넘어서서 정말로 이건 아닌 것인 일이 있다. 한 여성의 개인사, 가족사를 탈탈 털어서 대중에게 회자시키고 그녀의 아이들까지 사진을 공개하며 조리돌림하는 악마의 유투버들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보내는 대중들은 인간들이 아니다. 관음증과 새디즘이 뒤섞인 광기의 파시스트일 뿐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주홍글씨인가.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된다. 사회가 이렇게 가서는 안된다. 미래가 이런 식이어서는 안된다. 2016년 트럼프주의자들이 '힐러리 투 제일(Hillary to jail)' '록 허어 업(Lock her up)'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윤석열 지지자들도 문재인을 감옥에 넣겠다는 일념이 강하다고 한다. 증오의 정치를 유포시키고 있다. 이건 진실로 아닌 것이다.
일별(一別)만 가지고 영화를 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영화가 있고 그럴 수 없는 영화가 있다. 제인 캠피온의 역작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럴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장대하면서도 웅장한 작품은 펄 벅의 ‘대지’를 연상시키게 하면서도 록 허드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무엇보다 제임스 딘의 유작(遺作)이기도 한 ‘자이언트’를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이안 감독이 만든 ‘브로크백 마운틴’을 닮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 미국이 어떻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갔는지, 그 과정에서 이른바 대규모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이른바 부호와 상층 부르주아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이 영화 ‘파워 오브 도그’도 위대한 미국 현대사이면서 기이하게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핏빛의 음모, 치정, 살인의 냄새를 가득 풍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영화를 합친 느낌이 난다. 그것도 매우 도발적으로. 무엇보다 매우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무릎을 친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修辭學)이 아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결론은, 보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가감없이 정통으로 때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말 한마디 한마디, 대사 하나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복기(復記)에 애를 쓰게 된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 한 번이 아니라 다시, 그리고 또다시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하는 이유는 모두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흘러간 장면에 담겨져 있는 알레고리들을 찾고 싶은 욕구가 일기 때문이다.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런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토마스 새비지가 쓴 1967년의 소설이 더욱 심오할 것이라는 예상을 갖게 한다. 영화와 문학이 만나는 수평선의 그 지점이 궁금해진다. ‘파워 오브 도그’는 토마스 새비지의 자전적인 성장 스토리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아이다호 주의 유명한 양 목장 집 맏아들로 태어난 새비지는 어릴 때 이혼한 어머니가 몬태나의 부유한 목장주와 결혼하면서 서부 개척형 대재벌의 집안에서 자랐고 이것이 훗날 ‘파워 오브 도그’의 원천이 됐다. 그는 작품 속 피터처럼 게이이다. 커밍아웃은 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필(베네딕트 컴버배치)과 조지(제시 플레먼스) 형제는 몬태나 버뱅크에서 소 천 마리를 키우는 목장주이다. 그 설정 하나만으로 이 소설과 영화가 얼마나 광활하면서도 동시에 척박하고 황량한 심성의 배경을 갖고 있는가를 느끼게 해 준다. 필은 완벽한 상남자이다. 목장 일에 대해서는 버뱅크가(家)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지극히 마초(macho)적인 캐릭터로 모든 목동의 우두머리이자 황야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일깨워 주는 리더이다. 그는 성격이 불 같고 지독하며 못돼 ‘처먹었지만’ 오로지 동생 하나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동생 조지는 필과는 천양지차의 성격이다. 외모도 형인 필은 날렵한 근육질인 데 반해 동생은 다소 둔하게 생겼다. 그러나 착한 심성, 인내심이 강한 성격 등등은 오히려 집안 내부를 꾸려 가는 데 적합한 캐릭터이다. 실제로 소 천 마리를 키우고 사고 파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며 특히 몬태나의 목장 일이 기업형이 되어 가는 데 있어 조지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수십, 수백의 직원들을 건사하는 것도 오로지 조지 몫이 되어 간다. 필이 봉건주의라면 조지는 자본주의다. 그렇게 양 체제를 대변한다. 그런 조지로서는 아내가 필요하고, 하필이면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는 것이 화근이다. 형인 필은 동생 조지가 버뱅크가로 아내를 데려 온 첫날, 그녀에게 이렇게 쏘아 붙인다. “내가 왜 너의 아주버님이야? 이 꽃뱀 같은 년아!” 결혼 전 필은 조지에게 여자가 너에게 시집을 오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아들이라는 피터(코디 스밋맥피)의 대학 등록금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지는 실제로 로즈를 사랑한다. 다행히 그녀의 아들에게도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그러니 집안의 분쟁이 만만치 않아질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안 봐도 비디오,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되고 만다. 이야기는 다소 지루하게 가다가 의대에 진학한 아들 피터가 방학 때 버뱅크로 오면서 급물살을 탄다. 피터는 겉으로 보기만 해도 여성성이 더 강해 보인다. 서부의 ‘사나이’들에게 놀림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이자 의붓 큰아버지인 필은 그런 피터를 지나치게 압박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 조카를 서부의 남자로서 키워 내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세상 사는 여자의 눈을 피해갈 수가 없다. 피터의 엄마인 로즈는 필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피터를 필에게서 떨어지게 하려고 한다. 문제는 로즈가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로즈는 몬태나의 광활한 목장에 홀로 남겨진 고독감을 술 없이 견뎌 내지 못한다. 남편인 조지는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하지만 목장 경영에 여념이 없고 형인 필은 자신을 무시하고 압박하며 일은 일꾼들이 하기 때문에 할 일이 없고 무료할 뿐이다. 늘 돈이 많은 남자를 둔 여자들은 그런 이유로 술에 빠진다. 로즈가 딱 그렇다. 자신의 안위가 늘 걱정인 로즈를 여린 손으로 안아 주면서 아들 피터는 엄마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피터의 이 흘리는 말 한마디가 영화의 뒷부분 모두를 좌지우지한다. 그는 정말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다.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던 영화는 극 중반부터 급격한 심리적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린다. 로즈가 아주버니인 필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을까, 조지는 아내의 알코올 중독에 대해 어떤 처방을 내릴까. 아들 피터는 저러다 정말 법적이긴 해도 큰아빠인 필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근친상간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등등. 형 필의 캐릭터는 상당 부분 제인 캠피온의 전작이자 출세작인 ‘피아노’의 베인스(하비 카이틀)을 닮았다.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의 동성애 버전을 만들려 했었던 것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는 엄청난 반전이 숨겨져 있다. 때로는 세상의 모든 일이 단 한 사람에 의해 그 큰 물줄기가 바뀔 때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역할을 과연 누가 하게 될까? 무엇보다 왜 하게 될까. 그걸 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파워 오브 도그’는 일종의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이건 결코 로맨스 멜로물이 절대 아니다. ‘파워 오브 도그’는 성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시편 22편 20절이다. “제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저의 소중한 것을 개들의 힘으로부터 구하소서”이다. 이 시편도 잘 음미해 보시기를 바란다. 개들의 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책과 영화 모두를 기꺼이 권해드린다. 읽고 보거나 보고 읽기를 강추한다. 세상은 넓고 보고 읽은 것은 차고 넘친다. 만고의 진리다. 극장에서는 이젠 볼 수가 없다. 넷플릭스 독점이다. 2021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 수상작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 나면 이제는 거의 사멸되다시피 한, 그래서 다소 시대착오적인 어휘들이 떠오른다. 예컨대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같은 것, 혹은 경이(驚異)롭다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언제부턴가 사라져 가고 있는 중요한 세상의 가치, 삶의 원칙에 대한 얘기다. 무엇보다 그 회한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사라지고 있는, 폐간 직전에 놓여 있는, 한 유수의 잡지에 대한 얘기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우리 말로 약간 고쳐서 의역하면 ‘프랑스발(發) 특종’이 되겠다. 프랑스 앙뉘라는 가상도시에서 발행되며 정치·사회·문화·생활·음식과 지역에 대한 갖가지 뉴스를 다루는 고급 잡지다. 미국 캔사스 출신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아서(빌 머레이)는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앙뉘에 왔고 ‘피크닉’이란 이름의 잡지를 인수해 지금의 ‘프렌치 디스패치’로 바꾸고 키워냈다. 그렇게 캔사스에 앙뉘를, 앙뉘에 캔사스를 가져다 놓는 일을 한다. 곧 세계를 지역에, 지역에 세계의 소식을 변증(辯證)시킨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매우 독특한 글로벌 잡지로 성장시킨다. 월간지 ‘프렌치 디스패치’는 소수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기자와 기사의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은 늘 마감이 늦거나 편집자가 요구하는 분량을 넘치기가 일쑤이며 대체로 취재 기간이 길고 비용도 대체로 과다하게 쓴다. 원래의 기획의도에서 벗어나 있는 내용일 때가 많고 원고를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데 있어 웬만해선 타협하지 않는다. 편집장은 이들을 깨지기 쉬운 보물 다루듯 한다. 하지만 그가 결국 존중하는 건 이들의 글이지, 이들 자체는 아니다.(그는 편집장실에서 울지 말 것,이란 푯말의 액자를 걸고 있다. 직원들에게 그는 때론 무자비하게 군다.) 영화의 오프닝 씬인 편집회의에서 발행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일갈한다. “난 아무도, 그 어떤 기사도 안 잘라. 인쇄 종이를 더 확보하고 페이지를 늘려!” 그런데 그랬던 발행인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다. 그리고 그의 유언장이 공개된다. 당장 인쇄기를 녹이고 / 발행을 중단하며 / 직원들, 기자들에게 후한 퇴직금을 줘서 고용계약을 해지시키라는 것이다. 잡지를 영원히 종간(終刊)시키라는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런 일이 진행되기 직전, 발행인이 기획한 이 잡지의 마지막 호 내용을, 세 가지 에피소드로 나누어 담아 내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과 광경이 예술적 면에서 실로 너무나 고전적이면서도 원천적이고, 혀를 내두를 만큼 정교하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다 재미있으며 독창적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영화가 과연 어디까지 예술적이고 탐미적이며 시대를 뛰어 넘어 세기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를 광기의 아티스트로 밀어 붙이는 듯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웨스 앤더슨의 이 영화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예술의 가치가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 또 심오했던 것인지, 더 나아가 심오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예술지향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가 얘기하는 것처럼 그다지 쓸모없지도, 또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예술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며, 지금의 시대를 다음의 시대로 넘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술만이 진정으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프롤로그 격의 작은 얘기 하나, 그리고 세개의 에피소드, 마지막 에필로그로 구성돼 있다. 마치 잡지의 전체 구성, 그러니까 에디토리얼과 커버스토리, 섹션 기사들, 편집 후기 등등인 것처럼 이루어져 있다. 앞의 작은 얘기는 로컬 담당 기자(오웬 윌슨)가 앙뉘 지역을 소개하는 것이다. 근데 이건 영화적으로 영리한 선택인데 영화 속 가상도시 앙뉘를 소개하는 척, 프렌치 디스패치란 잡지의 전사(前史)와 전사(全史), 그 개략을 훑어 주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앙뉘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무슨 얘기, 어떤 사람들, 도대체 무슨 주제의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아채게 만든다. 앙뉘라는 소도시를 웨스 앤더슨의 카메라가 담아 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프레임 한 컷 한 컷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프레임 하나 하나가 어떻게 컷(cut)이 되고 신(scene)이 되며 시퀀스(sequence)로 이어지는지 그 역동성을 느끼게 만든다. 에를 들어 이런 식이다. 프렌치 디스패치 건물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고정 쇼트(shot)에서 이 도시의 아침이 분주하게 시작되는 모습을 담아 내는데, 프레임 하단의 보도 블록 하수구에서 물이 콸콸 넘치면 프레임 상단 위의 건물에서 누군가 창문을 열고, 이윽고 프레임 왼쪽 중간 쯤에서는 누군가 이불을 널고, 왼쪽 아래에서는 빗자루를 든 남자가 나와 자신의 건물 앞을 쓸기 시작하면 그를 뒤따라 나온 강아지 한 마리가 프레임 왼쪽 아래에서부터 뛰기 시작해 오른쪽 아래를 지나 프레임 위로 올라가며 결국 깡충깡충 한바퀴를 도는데 그게 앙뉘 골목 한바퀴를 도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프레임 중앙에서는 가판대가 열리고 하루의 장사가 시작된다. 바깥으로 노출돼 있는 건물의 내부 계단으로는 하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모닝 커피와 차(茶), 담배 등이 놓여진 쟁반을 들고 바쁘게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침 회의가 곧 시작되는 것이다. 소도시의 아침 풍경이 단 하나의 컷으로, 그것도 롱 테이크 촬영 방식으로 담겨진다. 여기에 동원된 엑스트라들, 조단역 배우들은 각자의 동선과 그 합을 몇 번이나 맞추기 위해서 같은 액션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것이다. 감독의 예술적 고집과 아집이 느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전 장면이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지 본문 격에 해당하는 세 가지 에피소드는 각각 정신병동 감옥에 갇혀 사는 한 천재 화가 모세(베네치오 델 토로)와 그의 뮤즈이자 간수인 여성 시몬(레아 세이두)의 이야기다. 모세는 어느 날 눈이 뒤집혀 바텐더 두 명의 목을 잘라 살해했다. 그리고 정신병동 감옥에 들어 왔으며 종신형을 살다가 어느 날 붓을 잡는다. 여자 간수인 시몬의 나신(裸身)을 비구상으로 그려내는데, 탈세 혐의로 감방 생활을 하던 미술상 줄리언(애드리언 브로디)이 그의 그림을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하고 모세는 일약 세계적 화가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유명 박물관의 큐레이터(틸다 스윈튼)가 설명해 준다. 시대는 대략 1920년대쯤이고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풍의 그림이 유행하던 때이다. 잭슨 폴록 류의 ‘흩뿌리기 식’ 기법의 얘기를 풍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1960년대 파리처럼 느껴진다. 6·8혁명의 시대고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제피렐리(티모시 살라메)와 그를 취재하는 노련한 여기자 루신다(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얘기다. 6.8 혁명이 얼마나 치기 어린 것이었는지, 얼마만큼 허무맹랑한 젊은이들의 기개가 표출된 것이었는지, 그렇기 때문에 늘 이상하게도 순수하게 느껴지고 그럼으로써 시대가 지나도 항상 향수어린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의 축소판 느낌을 준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경위 출신 셰프 네스카피에르(스티브 박)가 만드는 경찰서 요리에 대한 얘기다. 로에벅이란 기자(제프리 라이트)가 취재하는 얘긴데 기사는 엉뚱하게도 경찰서장(마티유 아말릭)의 아들이 마피아에게 납치돼 이를 구해내는 과정의 내용으로 변질된다. 그 과정에 대해 로에벅은 방송 스튜디오에 나와 MC(리브 슈라이버)와 후일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쳐 낸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사망한 편집장의 유지(遺志)대로 기자들, 편집부원들, 직원들이 모여 마지막 부고 기사(obituary)를 쓰는 장면이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책 한 권의 분량으로도 설명이 부족한 작품이다. 하나의 장면에 여러 장면을 녹여냈으며 여러 장면을 하나의 느낌으로 통합시키고 있다. 한 언론사의 흥망을 얘기하는 척, 세상과 인간사의 보편성을 논한다. 그림과 음식, 청춘 연애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그 이상이기도 하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이번에 뭐라 말하기 어려운,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걸작을 만들어 냈다. 감독 스스로가 좋아한다는 미국 뉴요커를 모델로 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일러스트는 실제 삽화가인 하비 아즈네라스가 그렸다. 걸작은 걸작을 알아보는 사람에 의해 걸작이 된다. 베네치오 델 토로에서부터 레아 세이두, 틸다 스윈튼, 리브 슈라이버, 제프리 라이트, 애드리언 브로디, 프랜시스 맥도먼드, 오웬 윌슨, 에드워드 노튼, 마티유 아말릭, 윌렘 데포, 크리스토프 왈츠, 시얼샤 로넌 그리고 티모시 살라메와 빌 머레이까지. 어마어마한 배우들이 조단역을 마다하지 않고 출연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언컨대 2021년 최고의 걸작이다. 2022년 아카데미가 기다려진다.
#불안하다. 영화 ‘부산행’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가 ‘반도’와 ‘방법: 재차의’ 등으로는 비교적 혹평을 받았던 감독 연상호가 이번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으로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의 화려한 부활이다. ‘지옥’ 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여전히 2위이고 ‘갯마을 차차차’, ‘연모’, ‘마이 네임’ 등도 인기가 최고 수준이다. 다들 국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8개국, 많게는 70여 개 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K콘텐츠의 인기가 최절정이고 상한가 중에 상한가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하다. 이런 분위기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문화의 발전은 정치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는 더욱더 그렇다. 중국의 영화계가 제5세대 감독(첸 카이거, 장예모)과 제6세대 감독(로예), 지하전영 감독들(지아장커)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왜 걸작의 불모지가 됐는 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진핑의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 때문이다. 정치가 닫히면 영화가 닫힌다.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감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방으로 밀려났는지도 아베와 이후의 자민당 극우 정치가 만들어 낸 폐해를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다. 정치는 영화이고 영화는 정치이다. 푸틴 이후 러시아 영화는 3류 액션 블록버스터로 전락해 있다. 정치가 엉망이 되면 영화와 드라마는 수렁에 빠진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더 치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꺾일 것인 가. 우리는 지금 그 기로에 서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정말 웃긴다. 매일처럼 쏟아지는 정치뉴스는 차라리 개그다. 방송에서 ‘개그 콘서트’ 같은 정규 코미디 프로가 없어진 이유이다. 같은 류의 프로그램을 중복 편성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손에 왕(王) 자를 새기지를 않나, 그런 무속신앙적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유수 기독교 목사들이 단체로 안수 기도를 드려 주지를 않나, 반드시 와 반듯이 와 같은 초등학교 맞춤법 논란이 일어나지를 않나 등등 하여간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그렇게 자랑질을 일삼는 최고 명문대 출신들의 수준이 이럴진대, 그런 인간형들이 모여 있다는 검찰이나 법조는 과연 어떻겠는가. 아니면 일명 폭탄주를 평소에 너무 많이들 마시는 것 아닌가. 지나친 음주는 뇌세포를 파괴하기 마련이고 지능지수와 지적 수준을 급격하게 퇴화시키게끔 돼있다. 어쨌든 개그맨들, 코미디언들만 안됐다. 그들만큼은 웃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창피하고 화가 난다. 자신의 정치관을 바꾸는 것은 좋다. 살다 보면, 나이를 먹다 보면 좌가 꼭 좌가 아닌 것이 되고 우가 꼭 우가 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6·8 혁명의 주역들이 어떻게 변질됐는지, 미국의 1970년대 반전, 학생운동의 주역인 톰 헤이든 같은 인물이 어떻게 기득권화됐는지 등등은 누누이 목격해 왔던 바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 여기 한국 같지는 않았다. 광주항쟁을 함께 했던, 김대중 같은 몇 안 되는 한국의 정치지도자의 뜻을 따랐던 사람들이 파시스트였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정치그룹과 손을 잡아서는 안된다. 그건 밀정 짓이다. 악랄한 배반이다.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후 체포되고, 고문받고, 투옥됐었던 통일사회당 김철 당수의 아들이라면 아버지 영전에 부끄러워서라도 변절의 길을 가서는 안될 것이다. 그건 반대로 80년대 학생운동 그룹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상대 계파가 싫다 해도 극우와 손을 잡는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 이재명은 파시스트이고 윤석열은 자유주의자이니 만큼 좌파는 윤석열과 연대를 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이상한 구분법인가. 어떻게 학자 입에서 이런 엉뚱한 정치, 사회 분석이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의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독재 정부 인가.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와 비교할 때 대체 어느 지점에서 같은 점이 있다는 말인가. 체포영장 없이 구금되는 적이 있는가.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한들 언론에 재갈을 물린 적이 있는가. 집회 결사의 자유가 봉쇄된 적이 있는가. 이게 무슨 해괴한 망발들인가. 실로 창피한 언행들이다. #우울하다. 김지운 감독의 저주받은 수작 ‘인랑(人狼)’은 정부 병력인 특기대와 반정부/ 반통일 세력인 섹터와의 싸움을 그린 얘기지만 알고 보면 정부 내 또 다른 권력 조직인 공안(公安)이 은밀하게 섹터와 손을 잡고 정부를 전복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기대는 공안/ 섹터의 공격이 거세지자 전위 공격대인 인랑을 만들어 이에 대항한다. 거의 4년 전 만들어진, 이 정부 초창기에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영화의 내용은 지금의 혼란기를 그대로 예언하고 있는 듯한 작품이다. 영화 속 반통일 세력과 지금의 종전선언 반대 세력의 모습이 흡착돼 보인다. 영화의 끝은 우울하다. 우리의 끝도 그럴 것인가.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을 구속까지 시켰던 지금의 보우소나루 극우 정권이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는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에 잘 나와 있다. 문재인에 대한 정치보복은 진작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브라질의 다큐가 여기, 한국에서도 똑같이 시행된다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 국민들의 우울증이 심각해질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도 볼 것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우울하고 또 우울해진다.
새로 나온, 아니 오랜만에 극장가에 나온 한국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알고 보면 장르는 로맨스 영화다. 로맨스 장르가 아닌 척해도 사실은 뼛속 깊이 로맨스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로맨스들이 심상치가 않다. 예전 같으면(라떼에는) 애들이 보기에 ‘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흔히들 얘기하는 현대인들의 성 인지 성향, 우리 사회 속 차별 문제에 대한 자의식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와 같은 작품일 수 있다. 중년 남자 교수와 학생 간의 동성애와 이웃집 아줌마와 고등학생의 미묘한 연애담이 유쾌하게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보수 기독교 단체 같은, 세상의 사랑에 대해 오도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얘기한 것처럼 그런 설정들이 ‘곁들여지는’ 느낌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전면과 정면을 살짝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를 만든 배우 출신의 조은지 감독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갖는 궁극의 주제는 내가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그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근데 그 말은 영화의 후반, 남자 교수가 7년 만에 발표하는 신간 기자회견에서 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장르만 로맨스’는 이런 얘기다. 학교에서 작가론을 가르치고 있는 중년의 교수 김현(류승룡)은 이혼남이다. 전처인 박미애(오나라)와 두 번째 와이프(류현경)의 사이에서 각각 아들과 딸을 두고 있다. 그는 한때 유명 작가였다. 그러나 책이 나온 지 7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노트북 MS 워드의 A4에는 단 한 줄의 글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다. 지금 와이프는 어린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지금 ‘기러기’이다. 전처인 미애는 툭하면 그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 가라 한다. 고등학생인 아들 성경(성유빈)때문이다. 이 아들은 얼마 전 여자친구에게 차였는데 그 이유는 여친이 임신을 한 데다 그 아이의 아빠가 다른 남자 애라는 것 때문이다. 성경은 질풍노도의 청소년인 셈이다. 이 청소년의 눈에 비친 이혼한 엄마 아빠는 정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혼 후에도 엄마는 전남편과, 아빠는 전처와 바람을 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부부 사이의 남녀는 어느 날 서로에게 갑자기 혹해서 잠자리를 가지려 했고 그걸 아들이 목격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아빠는 이미 새 결혼은 한 상태이고 엄마도 남친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엄마의 남친은 아빠의 30년 절친, 그의 소설을 전속으로 내고 있는 출판사의 대표(김희원)이다. 그러니 아들 눈으로 볼 때 이것도 바람은 바람인 것이다. 아들 성경은 제멋대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며 엄마 아빠에게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던 와중에 역시 제멋대로 사는 것 같은 옆집 아줌마(이유영)가 눈에 들어온다. 청소년의 욕정은 폭발한다. 주인공 남자이자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작가 김현의 상황은 더욱더 복잡 미묘하기 그지없다. 전처와 현재의 아내 사이의 양다리 문제도 문제지만 전처의 정부(情夫)가 30년 친구 지기라는 걸 그는 아직 모른다. 더 큰 문제는 게이 후배 작가의 집에 들렀다가 만난 그의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자기 과 학생) 유진(무진성)으로부터 애정의 융단폭격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진이란 남자의, 김현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다. 김현은 유진의 습작 단편에 자극을 받아 둘 간의 공동 집필을 계획하고 남산의 달동네 단칸방에서 둘만의 생활을 갖기도 한다. 영화 ‘장르만 로맨스’의 얘기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좌충우돌, 한바탕 폭소의 소동극을 향해 치닫는다. 코미디는 역시 슬랩스틱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 근데 그걸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배우 류승룡이다. 그는 넘어지고, 얻어맞고, 무릎 꿇고, 침대에서 떨어지고, 부딪히고, 뒤로 자빠진다. 그 리듬을 가장 잘 타고, 가장 잘 이해하는 배우가 류승룡이다. 그런데 그런 류승룡을 이번에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바로 이 영화의 감독인 조은지이다. 둘은, 연출과 배우의 합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코미디는 또, 서브플롯이 겹겹이 잘 쌓여져 있어야 재미가 극대화된다. 이 영화가 그렇다. 영화 속의 주제와 소재가 즐비하게 펼쳐지며, 잘 구워진 케이크처럼 착착 잘 얹혀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전처와의 혼외정사를 벌이려는 남자와 옆집 아줌마와 ‘썸’을 타게 되는 아들의 모습, 게이 남자의 애정 공세와 다른 남자와 도둑 여행을 떠나는 전처의 모습 등등 에피소드가 우당탕 거리는 척, 꼬이고 꼬이는 척, 사실은 질서정연하게 펼쳐진다. 스토리텔링이 매우 잘 짜여져 있음을 보여 준다. 배우 출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라고 보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다. 그렇게 보이게 하는 데는 주조연급 배우들의 합이 매우 높아서이다. 특히 출판사 대표 역을 맡은 김희원이 우는 연기는, 영화 속 오나라의 대사처럼 우는 남자가 매력 있게 보일 만큼 감칠맛이 있다. 무엇보다 김희원이란 배우가 우는 연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신예 무진성의 참으로 예쁘게 나온다. 남자가 남자에게 이만큼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새삼 알게 된다. 당신은 영화 속 중년 남자가 게이인 젊은이와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되기를 바라는가. 영화가 그런 결말로 갔으면 좋겠는가. 아무려면 어떤가. 당신은 이성애자인가 동성애자인가. 그것도 아무려면 어떤가. 세상이 이성애적 사랑과 동성애적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어떻겠는가. 그것 또한, 더더우기나 아무려면 어떠한가. 예수가 서로 사랑하라고 했거늘. 쯔쯔. 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우리 사회의 막힌 부분에 대해, 마치 영화 속 오나라가 슬쩍 옆으로 다가와 허벅지를 꼬집 듯, 그렇게 꼬집고 있는 영화다. 그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법이 돋보인다. 세상이 이 영화만큼 유쾌했으면 싶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점도 이 영화가 선사하는 유의미한 선물 중의 하나다. 웃고들 싶으신가. 마음을 오픈하시고 이 영화를 즐기시기들 바란다. 마침 영화 속 출판사 이름도 오픈 마인드이다.
극장 한 켠에서 ‘은둔형’으로 개봉중인 미국 독립영화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퍼스트 카우’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첫 젖소’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지 전혀 짐작하기 힘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런 얘기도 영화로 만들어질 수가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여기서 이런 얘기란, 말 그대로 별로 이야깃거리가 안 되는 얘기가 시나리오로 쓰여질 수 있다는 측면과 이런 이야기조차 제작과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생경함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글쎄, 대체 어떤 투자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투자분이 회수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예술은 종종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용기의 결합에서 탄생한다. 투자와 제작, 연출, 촬영, 연기의 모든 면에서 이 영화 ‘퍼스트 카우’는 대단한 용기가 전제돼야 했을 것이다. 특히 연기자들이 놀랍다. 이런 얘기로 연기가 돼?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미 북서부를 배경으로 한다. 퍼스트 카우. 그러니까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젖소 한 마리가 들어 오게 되고 이 젖소의 젖을 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암투극이다. 코미디라고? 절대 코미디가 아니다. 실제로 생과 사를 가르는 문제가 전개된다. 여기서 19세기 미 북서부라는 시공간의 설정이 좀 중요해 보인다. 19세기 중에서도 초엽, 그러니까 1820년대나 30년대가 배경으로 보인다. 공간은 언뜻 오레곤 주 어디라고 비추어(지거나 거기서 촬영된 것처럼 보여)진다. 19세기 초엽은 미국의 초기 자본주의 시대다. 상업 자본주의에서 서서히 산업 자본주의로 넘어가기 전인데 1861년에 벌어진 남북전쟁 전 시절의 얘기이니 만큼 여전히 삶의 기반은 광물과 자연에서 이루어지던 때를 보여 준다. 이것이 최단 서북부 오레곤 같은 데에서는 금광이었을 것이고 미주리-캔사스 간의 중부 미주리 강 오지 같은 곳에서는 모피나 동물 가죽(예를 들어 비버)였을 것이다. 이런 삶에는 군대 무장병력들이 결합하거나 할 수 밖에 없는데 이들 노동자(근대적 수렵채취인)을 자연의 습격(재해나 맹수, 회색 곰 등)이나 인디언들의 공격에서 지켜주겠다는 취지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무장병력은 거의 대개가 결국, 해당 지역에서 무소불위 권력의 일원이 되거나 지배자가 된다. 서부시대 금광운영업자나 모피 주식회사 사장들, 장사꾼들은 무장 병력을 용병처럼 활용했다. 당시는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 시행되어진 때가 아니라 그걸 만들면서 가던 시대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거나 강탈하거나 약탈하고, 집단 린치를 가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을 것이다. 이른바 무법지대, 무법시대였었고 사람들의 위생(치아나 손발톱), 개인 용모(의상) 등등도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악하고 끔찍했을 것이다. ‘퍼스트 카우’는 바로 그런 시대를 그리는 작품이다. 이른바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라 하면 건맨의 활약을 상상하기 쉽다. 존 포드 감독이 만들어 놓은 ‘역마차’의 판타지, 존 웨인이 만들어 낸 마초적 남성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서부개척시대는 이 영화 같았을 것이다. 초라하고 더럽고 궁색하기가 이를 데 없는 ‘밑바닥’ 인생들이었을 것이다. 정면을 마주하고 결투를 벌이는 것 따위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거칠고 힘든 생활의 한 가운데에서 누군가 만담꾼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오락을 줄 요량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퍼스트 카우’의 주인공은 백인 남자와 중국인 남자 한 쌍이다. 착한 백인 쿠키(존마가로)는 일종의 주방장이자 요리사이다. 동료(라기보다는 패거리에 가까운 인간들)에게 숲에서 버섯을 따거나 다람쥐나 물고기를 잡아서 끼니를 마련해 갖다 바치는 생존의 식사 당번이다. 선한 남자 쿠키는 그래서 이름이 쿠키이다. 최소한 쿠키는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동료랍시고 그에게 먹을 것만을 보채는 남자들은 여기서의 일정이 끝나면 (금광을 채굴하던 인간들은 금이 많이 날 곳을 찾아 일정 기간을 간격으로 옮겨 다녔다. 금광채굴업자에게 고용돼 계약직 노동을 하기도 했는데 영화에서는 그 계약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쿠키를 해치고 그가 받은 배당금을 몽땅 다 뺏어 버리겠다고 대놓고 말한다. 쿠키는 남자들의 채근과 협박에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숲에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가 벌거벗은 채 숨어 있는 중국인 남자 루(오리온 리)를 발견하다. 루는 (정당방위 격)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중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쿠키는 루를 하루 밤 숨겨 준다. 둘의 이러한 인연은 극악한 생존 환경의 혼란 속에 잠시 끊기지만 2년 후 한 정착 지대 마을에서의 우연한 재회로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암소 한 마리, 젖소 한 마리가 끼어 든다. 이 암소는 구역 수비대장(토비 존스) 소유의 것으로 이 마을에서 딱 한 마리만 있는 것이다. 쿠키와 루는 마을 장터(라고 해 봐야 노점이지만)에 스콘을 내다 팔아서 입에 풀칠을 하며 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스콘이라고 하는 것에는 우유가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쿠키와 루는 수비대장이 키우는 암소에게서 매일 밤 몰래 젖을 훔쳐 짜 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스콘은 ‘대박’이 나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 대장에게 들키게 되고, 이들은 군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잡히면 재판이나 판결없이 바로 죽음이다. 쿠키와 루는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이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려 한다. 19세기 초에 사람들은 금과 돈과, 젖소의 우유와, 먹을 것과, 자본주의적 탐욕의 모든 것에 게걸스럽게 달려 들던 때였다. 이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의 시대였으며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던 시대다. 인류에 문명이 찾아 든 것은 실제로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을 하나하나 거침없으면서 민망하게 나열하고 있는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게 꼭 19세기 때의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은가' 라는 깨달음이 다가 온다. 초첨단, 초현대의 자본주의 시대라는 지금 21세기에도 인간의 탐욕은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야만하고 야만하고 야만할 뿐이다. 우리의 부동산 문제가 대표적이다. ‘퍼스트 카우’는 세계 최강대국이고 최고 부자 나라라는 미국이 얼마나 조야(粗野)한 건국사를 지니고 있는지, 얼마나 야만스런 역사를 밟고 올라서 있는 국가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사람은 자신과 주변의 원천(源泉)을 늘 생각하고, 그리하여 늘 성찰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원류가 어디였는지, 우리의 ‘꼴’이 원래 어떠했는지를 회고하며 사는 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문명사회로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의 탐욕은 젖소의 젖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퍼스트 카우를 어떻게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가의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탐욕은 반드시 비극이 된다. 쿠키와 루는 어떻게 됐을까. 수비대장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과연 부동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젖소와 부동산. 그것 참, 난제 중의 난제로소이다,이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람, 일본사회가 저 지경이 됐구나, 사회에 유대/ 연대/ 소통/ 배려/ 공동의 삶이란 게 거의 없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세대간에 같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세대끼리는 이미 단절된 지 오래다. 혼다 영업사원이 와서 모모코에게 경차를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혼다는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혼다를 사면 적어도 6개월의 한 번씩은 혼다 직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아들이 돼버린 사회. 우리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80년대 학번 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기득권층으로 몰리게 됐는지, 언제부터 모두들 2030 2030 하면서 그들의 눈치나 보게 됐는지,언제부터 젊은이들 상당수가 극우와 보수(윤석렬과 홍준표)를 구별하지 않고 정권만 바꾸면 ‘땡큐’인 심리가 됐는지, 언제부터 모두들 부동산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게 됐는지, 이런 식이면 우리사회는 모두 다 각자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투의 극단의 개별화된 사회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상식을 되찾으면 된다. 검사라는 직업의 상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텔레그램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고 전화 녹취록까지 공개돼서 자신이 범죄를 사주했거나 적어도 모의에 동참한 사실이 밝혀지면 내가 그랬다,라고 고백하는 게 상식이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에게 항상 들었던 이야기는 너희가 잘못한 것보다 거짓말한 것 때문에 더 화가 나, 이다. 일부 검사들의 이런 행태는 사람들이 유년시절부터 키워 왔던 상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사람 한 명의 의식이 잘못 뚫리고 왜곡되면 사회 전체의 망이 해체된다. 손준성, 김웅처럼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얼마나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자신들 욕망대로 사회가 구성되고 재편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거의 악마의 수준이다. 이러니 우리말에 처단이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다. 과거 북한 공산당이 지주라 하면 무조건 대나무 꼬챙이로 찔러 죽였다며 반공교육에서 비난의 수위를 극대화 시켰지만 사실 그 지주들 중에 소작농의 어린아이가 굶어 죽는 것조차 본 체 만 체 했던 인면수심의 인간들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보수는 몰상식과 인격 수양, 자기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진보는 자칫 인간성을 상실할 수 있는 극단적 폭력에의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그쯤 되면 양자는 같아진다. 그러니 보수는 올바른 상식을 되찾아야 하고 진보는 좀 적당히, 늘 앞섬과 뒤처짐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헤아리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 마디로 모두들 좀 실용적이 돼야 한다. 그리고 좀 문화적이 돼야 한다. 버락 오바마가 잘했던 일 중 하나는 백악관에 ‘백스테이지 앳 더 화이트하우스(Backstage at the Whitehouse)’란 이름으로 각종의 가수들을 불러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테데스키&트럭스 밴드의 수잔 테데스키와 데릭 트럭스 듀오도 왔었고 에이미 만도 와서 자신의 메가 히트곡 ‘새이브 미(Save me)를 불렀으며 심지어 비비 킹도 작고하기 전에 롤링 스톤즈 믹 재거와 함께 이 무대에서 신나게 한판을 하고 떠났다. 비비 킹이 오바마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독촉하는 장면은 정치가 때론 좀 놀고, 평민들과 어울리며, 그래서 잠깐이나마 상식적이 되고, 또 그래서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치가 좀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울대 식의 오만에서, 고시 패스의 자폐적 심리에서, 판검사의 막무가내식 눈높이에서, 언론고시의 기계적 지식에서, 의사들의 비뚤어진 에고(ego)에서 내려와야 한다. L시티와 대장동 수천억원의 욕망도 일반 사람들의 눈높이나 서민의 생활과 의식으로 종종 내려와야 한다. 청와대에 백스테이지를 만들어 공연을 할 그릇은 지금 후보들 중 누가 지니고 있을까. 이날치를 청와대에 불러 같이 노래할 수 있는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 그 모든 것은 꿈인가. 다들 각자, 나는 나대로 혼자서만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 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고독하고 쓸쓸하게 죽을 것인가. 그런 사회를 만들 것인가. 비록 트럼프는 극혐하지만 힐러리도 싫어서 투표를 포기했던 미국의 2016년 대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격은 상식에서 나온다. 상식의 인간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고만고만하고 비교적 평범한 탈북자의 얘기처럼 느껴지던 다큐멘터리 '그림자꽃'은 러닝타임 38분쯤부터 급물살을 탄다. 이 다큐의 중심인물인 김련희(53)가 한국 주재 베트남 대사관을 ‘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김련희는 베트남 대사 측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자신을 제발 북한으로 돌려 보내 달라는 것이다. 남한 정부가 자신을 억류하고 잡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 꽃'은 탈북자 여성의 얘기가 아니다. 평양 시민으로 살아가던 한 여성이 어찌어찌 해서 남한까지 흘러 들어 왔는데 당초에는 순진하게도 다시 북으로 돌아 갈 거라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일의 뒤틀림이 시작됐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김련희는 여전히 자신을 탈북자가 아닌 평양시민이라 주장한다. 남한은 그런 그녀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행위자로 간주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때리기까지’ 했다. 그녀에게는 보호관찰관이 따라 다니고 일주일에 한번 씩, 혹은 수시로, 그녀가 자신들에게 출두하기를 요구한다. 남한에서 김련희가 살아가는 삶은 한 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북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문재인 정부 하에서조차 출국금지 연장은 계속된다. 통일부 관계자는 ‘이 분이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의 신분으로 돼 있기 때문에 엄정하게 국내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김련희는 천신만고 끝, 7년 만에 자신의 여권을 되찾지만(대한민국 여권을 발급받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다. 내용상으로 그녀는 여전히 남한에 억류된 채 살아 간다. '그림자꽃'은 남북한 문제, 분단의 오랜 역사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던진다. 독재정부가 됐든, 권위주의 정부가 됐든, 심지어 민주정부가 됐든 남북 문제는 쉽사리 풀리지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고 민간 교류를 확대하고 등등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척 사실은 양측 모두, 특히 남한 측이, 심각한 관료주의의 덫에 걸려 있음을 보여 준다. 기득권을 위해 자행되는 탈법과 불법을 모두 묵인하면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문제, 곧 ‘인간이 먼저’인 문제에 대해서는 늘 엄정/공정/중립이라는 법의 잣대를 들이 댄다. 남이나 북이나, 분단의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의 삶이 피곤하고, 구차하고, 남루해지는 이유다.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돌아가고 싶은 사람, 혹은 돌아 가야 할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자유롭게 놔둬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가장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기본의 행태 아닌가, 라는 질문을 이 다큐는 시종일관 담아 내고 있다. 어쩌면 이 다큐도 김련희가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동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김련희는 정말 안하는 일 없이 해 내며 살아 간다. 일상의 노동 틈틈이 UN인권위 사무실 앞에서 기자회견도 하고 남한 측 사회운동가, 액티비스트들과의 만남도 자주 가지며, 같이 남한에 들어온 ‘(감)빵동기’들도 만나 방법을 의논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기거하는 ‘쉼터’같은 곳에서 같이 살기도 한다. 장기수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가슴 쿵’하게 만든다. “여기 온지 얼마됐어요?” “61년에 왔으니까 뭐…” “감방에서는 얼마 살았어요?” “27년인가…88년에 나왔으니까.” 이제는 완벽하게 서울 말씨를 쓰는 이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지켜 보면서 김련희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 노인처럼 자신 역시 앞으로 오랜 세월 영어(囹圄) 아닌 영어의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 죽고 둘만 남은 비전향 노인들은 그런 김련희를 늘 걱정하고 아껴 준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매우 웅변적이다. 이들의 삶에 해법을 찾아 내는 것이 그 어떤 남북합의문이나 선언보다 가치가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범인(凡人)의 눈으로 봤을 때 다큐 '그림자 꽃'은 실로 놀랄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무려 7년을 찍은 영화다. 김련희가 남한으로 들어 와서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 추적해 왔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푸티지(footage)가 거의 없다. ‘생짜로’ 다 직접 찍은 분량들이다. 심지어 더 놀라운 것은 김련희가 ㈜한국 베트남 대사관에 ‘주거침입’을 한 이후 감독 이승준의 카메라가 북한으로 직접 간다는 것이다. 북한에 가서 김련희의 딸 리연금도 만나고 김책공업전문대학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도 만난다. '그림자꽃'은 그렇게, 약 105분의 영화를 찍기 위해 7년의 공을 들인 작품이다. 허울뿐인 남북한 통일 논의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치환시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노력 쯤이야, 하는 생각이 읽혀진다. 김련희도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7년 넘게 기다려 왔는데 뭘요…" 남북한도 어쩌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 가는 걸 70년 가까이 기다려 온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다 보니 남북한이 같이 살려면 결국 따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깊이 느끼게 된다. 남북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그렇게 됐다. 김련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남한에서 쓰는 노후 보장이란 말이나 평생행복주택 같은 말이다. 왜 노후를 걱정하며 내 집 마련이 뭐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해줘야 하는 일 아니냐고 그녀는 말한다. 도로통행요금을 내는 것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멀쩡한 도로를 이용하는데 왜 돈을 내냐고 그녀는 의아해 한다. 오랜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았던 사람은 오랜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방식은 받아 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건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쪽 남한에는 극악한 반공주의자들이 넘쳐나는 판국이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라도 양측은 쉽게 합쳐지기가 힘들다. 영화에서도 남한 내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이 벌이는 사생결단의 반북(反北) 행동들이 열거된다. 보기가 참으로 불편하다. 민망하고 불쾌하다. 리처드 기어, 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의 '자칼'이나 한석규 하정우 주연의 '베를린'같은 첩보영화에서 정보국 요원은 붙잡은 상대편 첩자를 이런 식으로 놓아 준다. “나 저기 있는 화장실에 좀 갔다 올께. 한 10분 걸릴 거야. 알았지? 한 10분 걸릴 거라구.” 그는 그렇게 상대의 도주를 묵인한다. 우리 정부도 김련희 같은 여성에게 이러면 안될까. “잠깐 북에 갔다 오세요. 잠깐이에요. 우리는 당신에게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알았죠?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 식으로 돌려 보내면 안될까. 영화든, 현실이든 상상력이 필요한 법이다. 세상은 상상력이 바꾼다. 이건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의 얘기다.
합의 하에 아내인 니키(세피데 모아피)와 헤어져 살고 있는(그래봤자 길 건너 아버지 집, 몇백 미터 차이에 불과하지만) 데이빗(클레인 크로포드)은 아내에게 섹스 파트너가 생긴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불길이 인다. 데릭이라는 남자인데(크리스 코이) 아마도 니키는 자신들의 별거를 좀 더 ‘실천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데이빗은 예전에 자신의 것이었던 침대에 이들이 벌거벗고 잠들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새벽에 과거 자신의 침실로 몰래 기어들어가 여자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데이빗은 결국 니키와 데릭을 죽일 것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는 결국 치정 살인극이라는 얘기일까. 그렇게 단순하고 치졸한 얘기일까.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를 보고 있으면 세상엔 여전히 젊고 신선한, 새롭고 낯선 영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늘 새로운 것,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고 그것들의 총합을 꿈꿔야 한다면 이 영화만 한 것이 없다. 이야기는 예측과 달리 완전히 ‘엉뚱한 산’으로 내달리며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사와 같은 양념을 전혀 뿌리지 않는다. 독보적이랄 만큼 특이한 이야기 설정과 스토리 텔링, 미장센, 캐릭터라이징을 통해 영화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감(感)을 구축해 낸다.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영화이지만 이런 얘기야말로 거꾸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데이빗은 일종의 일용 노동자다. 배경은 유타 주의 어느 근교 마을로 보인다.(니키는 다운타운 법률 사무소에서 시급이나 인턴, 비정규 사무직 일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데이빗은 마을에서 이런저런 허드렛 노동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데 사람들 모두 그(와 그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걸 보면 꽤나 오래 살아 온 관계임을 짐작하게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데이빗이 학교를 가지 않으려는 중학생 큰딸을 억지로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자 마을 남자 한 명이 이런 식으로 말을 붙인다. “그쪽도 집안에 파묻고 싶은 중학생 애가 있는 모양인데 내 뒷 마당이 아주 넓어요. 얼마든지 쓰세요.” 자신에게 하루에 100달러씩 열흘간의 일감을 의뢰하는 친근한 이웃 할머니와의 대화는 더욱 다정하다. 데이빗이 묻는다. “아주머니는 결혼생활이 어떠셨어요?”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 남편과는 잘살았지. 물론 사랑했지. 근데 결혼은 사랑이 아냐. 존중이지. 서로를 존중하는 거야.” 집까지 태워 주겠다는 데이빗에게 손사래를 치며 여자는 유머를 덧붙인다. “집까지 걸어서 갈 거야. 도로 왼쪽 길로 갈 테니 나중에 그쪽 도랑을 잘 살피면서 가 줘. 내가 가다가 쓰러져서 거기 처박혀 죽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에 불과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영화는 외양에서 내면으로 급격한 기울기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제 데이빗의 마음 속 풍광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마누라 니키에 대한 마음이 사랑인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어떤 저울에 달아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한다. 결혼이 사랑이 아니고 존중이라는, 해탈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쩌면 데이빗의 고민은 조금 ‘심플’해질 것이다.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데이빗은 젊다. 거기까지는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다. 니키와 데이빗 두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고 거의 바로 딸을 낳았으며(그러고 말았어야 했는데 몰몬의 전통적인 다산 관습 탓인지) 터울이 꽤 나는 남자아이 셋을 줄줄이 낳았다. 아이가 모두 넷이다. 양육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그건 현재도 그렇다) 그 과정이 둘 사이를 해치거나, 해칠 뻔 했을 것이다. 근데 그보다 둘이 별거를 택한 데에는 꽤나 용감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서로 오랜 결혼생활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 워낙 어린 나이에 결합했던 사이이기 때문에 다른 관계를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합의하에 서로 각자 연애도 해 보자, 쉽게 말해 좀 다르게 살아 보자고 결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둘의 사랑이 더 단단해질 수도 있지 않느냐, 뭐 그런 얘긴데, ‘그 딴건’ 사실 모두들 다 알다시피 번지르르한 수사(修辭)에 불과할 뿐이다. 데이빗과 니키의 일상은 합의 별거 이후 크게 흔들린다. 데이빗은 거의 매일 니키와 그녀의 남자를 죽여 버릴 생각에 스스로 몸을 떤다. 영화는 아주 다른 결말을 향해 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데이빗은 착한 남자이고, 자신의 마음 속 욕망처럼 모든 일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풀어낼 인간은 못된다. 그는 나약하고 착한 사람인데 어쩌면 삶의 해법이란 게 이런 스타일의 사람이 찾아낼 확률이 높다. 영화 속 데이빗도 결국 그걸 해낸다. 정작 폭력은 그가 당하지만. 하지만 그때서야 영화의 제목이 갖는 순전한 의미가 깨달음처럼 다가선다. 결국 세상의 남녀에게 남는 건 결혼과 가족이라는 것, 사랑은 죽는다는 것이다. 두 연인은 시간과 세월, 자식과 풍파를 겪으며 그렇게 죽는 것이다. 진짜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데이빗과 니키도 결국 죽음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셈이다. 근데 그건 결국 행복한 일일까. 그게 좋은 일일까. 그게 궁극의 답일까. 이건 결국 세상의 연인들이 스스로 답할 일이다. 사운드 트랙의 사용이 아주 독특하다.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다. 해머를 두드리는 소리 같은 것, 뭔가 삐꺽거리는 소음, 차 소리, 부딪히는 소리 등등으로 이뤄져 있다. 남자 데이빗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기제(機制)이다. OST만으로도 영화가 특이함을 넘어 오리진(origin)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댄스영화제와 아메리칸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상을 탔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이다.
이게 나라인가. 나라가 나가가 되려면 나라다운 기본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가 의사다워야 하며 교수가 교수답고 목사가 목사다워야 한다. 기자가 정론곡필을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검사나 판사가 깡패나 건달 짓을 하면 안된다. 정치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도 하기 싫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다.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 부인이자 오랜 경력의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인상비평 하나만 믿고 공개적으로 상대 당 유력 대권 후보를 사이코패스로 진단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실수였다고 얼버무린다. 이건 외과의가 환자의 왼쪽 폐를 적출해야 하는데 오른쪽을 잘라내고 나서는 앗 착각했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환자가 죽고 나서도 단순 실수였다고 얘기하는 식이다. 이게 의사인가. 저자 거리의 약장수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에서는 의학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1, 2’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쳐다보지도 않거나 심지어 비난을 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한국사회 어디에 저런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판타지를 녹이는 TV 드라마라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의학드라마 ‘뉴 암스테르담’의 인기도 치솟지 못하고 멈춘 이유다. 사실과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의사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멀쩡한 사람을 생각과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정신병자로 모는 것, 그게 인술인가. 이게 의사인가. 교수가 된다는 여성이 논문은 엉망이면서도 온갖 학력을 위조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거나 그걸 경력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도 선생이 선생답지 못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에게 논문을 통과시켜 주고 과목을 내준 교수 사회가 있다는 것이 더 악질적이다. 조국 교수 딸에 대해서는 온갖 조리돌림을 하더니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학생 사회도 더 이상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게 학교인가. 이게 정상적인 대학인가. 기자들은 더 이상 사실을 좇는 존재들이 아니다. 정의 같은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오로지 (특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쓰레기) 단독 기사, 그에 따른 조회수에만 매달린다. 기사들 면면이 천박하기 그지없고 기자들 면면이 저급하기 이를 데 없다. 취재원과 짜고, 없는 범죄 사실을 만들어 특정인을 정치사회적으로 매장하려 한다. 그게 들통나자 법리 다툼을 벌여, 사실은 있으나 그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해괴한 논리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이번엔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다시 무고죄로 고발한다. 이게 기자인가. 이게 언론인가. 검사라는 사람들, 대법관이라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들이 과거 사법고시에 응시하고 합격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오로지 검사복과 법복을 벗은 후 50억이나 100억, 더 나아가 수천 억을 한 번에 벌려는 일확천금의 욕망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게 검사인가. 이게 판사인가. 집안에 검판사가 있는 것이 그렇게나 자랑인가. 사실은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목사라는 자가 종교로 세뇌시킨 후 모자간에 근친상간을 시켰다는 기사를 보고 있으니 인간이 스스로 개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두환을 찬양하고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 사과를 주면서 그게 사과의 뜻이었다고 하는 인간도 스스로가 개만도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폭탄주를 마시고 만취하지 않는 한 그런 사진을 자신의 SNS 계정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가 국가를 대표하고 운영할 수 있겠는가.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독일 플로리란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작가미상’은 히틀러 시대의 광기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인간의 의식과 정신세계를 파괴했는 가를 보여 준다. 영화에서 의사 제반트(세바스티안 코치)는 멀쩡한 여성을 정신병이라 진단해 결국 수용소로 보내 죽게 만든다. 강 모라는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이 영화 ‘작가미상’의 영화적 일독을 권한다. 그녀의 남편이라는 대선 후보도 같이 보면 좋겠다. 좀 공부를 해라.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무식할 수 있는 가. 그게 어디 될 일인가. 뭐 물론 누구의 말 대로 전두환처럼 전문가들을 곳곳에, 고루고루 잘 쓰면 되긴 하겠다. 근데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세상이 파시즘을 향해 가고 있다. 사회 일부에서 파시스트들이 판치고 있다. 정녕 히틀러와 피노체트와 같은 인물을 정치 지도자로 내세울 것인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를 허용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젊은 세대들에게 그 심각성을 알리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듄’은 예상하거나 준비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아라키스/아트레이데스/하코넨/프레멘/스파이스/베네 게시리트 등 생소하고 외우기도 힘든 이름들이 계속되는데다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끝을 향해 달려가는지 러닝 타임 155분이 다 돼 가도록 도저히 짐작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 원작소설이 지닌 방대함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문명은 그것이 문학이 됐든 음악, 미술, 사진 혹은 그 무엇이 됐든 거의 대부분이 1960년대에 이루어지고 완성됐음을 이 소설은 다신 한번 웅변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60년대가 최고조였던 듯이 보인다. 이 영화를 따라가기 힘들게 하는 요소 가운데 또 하나는 등장인물,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의 면면 때문이기도 하다. 티모시 샬라메와 레베카 퍼거슨을 중심으로 오스카 아이작/조슈 브롤린/제이슨 모모아/스텔란 스카스카드/하비에르 바르뎀/장첸, 심지어 샬롯 램플링까지 배우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어떤 이는 많은 분량에 또 어떤 배우는 작은 역으로 나왔다가 사라진다. 예컨대 프레멘의 지도자 격 인물로 비중은 크지만 출연 씬은 그다지 많지 않은, 비교적 작은 역에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대배우가 초반에 잠깐 나왔다 사라진다.(물론 영화 후반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등등이 영화의 스케일이 엄청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의 얘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영화를 리뷰로 정리하기도 쉽지 않다. 앞의 얘기들은 어쩌면 그 변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알기 쉽게 스토리를 풀어 보면 이렇게 된다. 우주의 행성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주요 세력이 大귀족연합이고 귀족들은 각각 행성을 지배하고 있는바, 양대 가문이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넨이다. 각각의 지도자는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과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인데, 어쩌면 이 둘은 우주의 선과 악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공작의 정부(情婦) 레이디 제시카가 속한 기이한 여성 집단 베네 게시리트族의 행태가 뒤얽히고 그것이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신비롭게 만든다. 어쨌든 이야기의 중심은 우주에서 가장 쓸모없이 보이는 사막행성 아라키스이다. 아라키스는 매우, 그것도 매우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서만 유일하게 스파이스라는 물질이 채굴되기 때문이다. 스파이스는 (대마초나 아편 같은) 일종의 각성제이자 정신 지배물질(소설에서는 기본적으로 향신료처럼 묘사된다.)이다.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고 예지능력을 강화시켜 준다. 스파이스를 잘 활용하면 인간은 정신을 통해 물질을 지배하고, 의식 속에서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미래를 내다보고 현재를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런 자를 ‘퀴사스 해더락’이라 부르며(영화에서는 끝부분에 잠깐 언급된다.) 영화 속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그런 그를, 우주를 구원할 메시아쯤으로 받아들이고 기다린다. 영화는 주인공인 폴 왕자(티모시 살라메), 곧 아트레이데스의 레토 공작과 레이디 제시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그런 인물일지 모른다는 것을 줄곧 암시한다. 베네 게시리트 출신인 레이디 제시카는 아들 폴에게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능력을 훈련시키는데 그중 하나가 ‘보이스’다. 목소리로 상대의 심리를 제압해 그의 행동을 통제하는 일종의 염력술이다. 이 ‘보이스’ 기술은 나중에 모자를 살려내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듄’의 복잡한 스토리는 하나로 귀결된다. 아라키스 행성의 스파이스 채굴을 둘러싸고 간교한 황제가 아트레이데스와 하코넨 간에 전쟁을 벌이게 만들어 이들을 분할 통치(divide and rule)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트레이데스는 거의 궤멸된다. 그리고 그것이 황제의 목표였다. 아트레이데스의 세력이 너무 커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 폴은 어머니인 레이디와 함께 아라키스의 유목인이자 원주민인 프레멘과 손을 잡고 대항 반군을 키우게 된다. 그건 아버지 레토 공작의 계획이자 염원이기도 했다. ‘듄’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방대한 SF 서사는 아무리 그것이 갖는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게 넓다 해도 그 이야기의 깊이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굴착해 내면 전체의 얼개가 비슷하게나마 인지되고 인식된다. ‘듄’은 세 가지쯤의 현실적 상황을 오버랩 시킨다. 그건 일단 프랭크 허버트가 이 원작을 세상에 내놓은 1965년을 상정시키면 된다. 당시 세계는 오일 폴리틱스(oil politics)의 정쟁으로 나아가던 시기였으며 급기야 1973년에 이르러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갈등의 격화로 아랍권 전체가 관여된 4차 중동전쟁이 발생하고 그로 인한 1차 오일 쇼크가 터지던 시기였다. 영화 ‘듄’의 생명물질인 스파이스는 아마도 오일 경제학의 세상에서 연유된 상상력일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듄’의 분위기는 석유전쟁의 전조로 불안해하던 세상의 느낌을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라키스 행성의 원주민인 프레멘들이 베두인족(유목 생활을 하는 아랍민족)처럼 묘사돼 있는 것, 그들의 종교(처럼 보이는 것)가 예수 그리스도나 알라를 암시하는 메시아론처럼 그려지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프레멘들의 어법은 거의 성경 구절에서 가져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문화양식, 그에 대한 상상력도 상당부분 섞여 있는데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주치의가 유에(장첸)라는 이름의 중국인(처럼 보이는 인물)으로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폴의 엄마 레이디 제시카가 속한 여성집단 베네 게시리트는 상당히 무협지적 요소를 띤다. 강호의 세상에도 9대 문파가 있고 유일한 여성파인 아미파가 있는데, 탄지신공(彈指神功)으로 유명한 이 여성 고수들은 무림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와 역할을 지니는 데다 종종 남자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베네 게시리트는 아미의 서구적 표현처럼 느껴진다. 이건 다소 과도한 ‘접붙이기’로 느껴지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가 꽤나 아시아적 느낌을 준다는 얘기이다. ‘듄’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얘기이다. 레토 공작은 아들 폴에게 말한다. “무릇 위대한 자는 지도자가 되려는 자가 아니라 부름을 받는 자이다.” 이건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앞세우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영화 속에서 스파이스를 지배하는 자가 전 우주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지금의 세상에서 일부 강국들이 석유나 군사력, 고도의 첩보능력을 앞세워 세계를 통치하려는 모양새와 닮아 있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10191년인데 이것도 서기(A.D.)가 아니다. 우주력이 적용되는데 실제로는 26000년이다. 지금은 2021년. 2만4000년 후의 세상을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 소설이든 영화든 ‘듄’은 결국 그렇게 먼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는 척, 사실은 지금, 당장의 세상을 얘기하려 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듄’에는 로봇이 등장하지 않는다. 인공지능보다는 인간 스스로가 거의 그런 수준으로까지 도달했는데 그건 고도의 정신력을 키우고 훈련해 냈기 때문이다.(소설에서는 마치 1800년대 산업혁명기의 러다이트 운동 같은 것이 일어나 로봇을 전량 파기한 것처럼 묘사된다.) 정신이 물질과 세상을 통제하고 지배하되 여성이 그걸(안 그런 척) 주도해 내는 세상. ‘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관이다. 이게 핵심이다. 온갖 추잡한 스캔들이 난무하는 한국의 사회정치 현실에서 ‘듄’은 ‘심오한 각성제’와 같은 느낌을 준다. 결국 정신이 이긴다. 물질이 아니라. 결국 도덕과 정의가 이긴다. 땅 투기 부자와 비뚤어진 권력욕이 아니라. ‘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점이다.
이번 주 영화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스트넛 맨’을 고른 것은 순전히 부산영화제때문이다. 영화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난 열흘간 신작들을 챙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장 개봉하지 않을 영화제 출품작들을 소개해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까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자랑하는 넷플릭스 작품 중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다. 일종의 덴드다. 덴마크 드라마. 이번 것은 6부작이다. 체스트넛은 밤이다. 가을철에 후두둑 떨어지는 밤송이의 그 밤. 왜 제목이 체스트넛 맨일까. 이 영화의 연쇄살인범이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그 옆에 밤으로 만든 못난이 인형을 표식으로 놓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얘기는 의외로 많다. 미국에는 쿠키를 이용한 진저맨이 유명하다. 아 캔디맨도 있다. 어린 시절 놀던 인형 만들기, 그 인형을 만들면서 불렀던 노래=동요를 살인 모티프로 자꾸 이용하는 이유는 다 그 당시 당했던 정신적, 육체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예컨대 노르웨이 작가 요 뇌스뵈의 인기 소설 ‘스노우 맨’의 연쇄살인범도 폭력적인 유부남과 사귀던 엄마가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일부러 얼음 물에 빠져 자살했기 때문이다. 경찰이었던 엄마의 불륜남은 물에 빠져 들어가 죽어가는 여자를 수수방관, 오히려 자살을 방조한다. 이 아이는 커서 아이를 유산하려 하거나, 유산했던 여인들만을 골라 살인을 저지른다. 남자에 대한 분노를 엉뚱하게 과거 자신의 엄마型 여인에게로 돌린 셈이다. 자신을 버린 것처럼 아이를 소홀하게 챙기는 여자들. ‘더 체스트넛 맨’을 보고 있으면 몇가지 단상이 든다. 일단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불리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철학이 다를 수 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너무 춥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리 많이 살지 않는다. 인구밀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고립돼 있고 소통이 잘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라는 단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자들 혹은 여자들이 아이를 때리고 학대하며 심지어 강간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쩌면 주변에 이를 감시할 사람들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가정이라는 공간에 절대적 지배자가 실질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들은 사람들의 일상이 기본적으로 꽤나 음습할 수 밖에 없고 거기에 범죄심리가 많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공간적 조건을 지닐 수밖에 없다. 덴마크, 스웨덴 등 북구 지역은 과거 2차 대전을 전후 해, 나치에 부역한 역사가 많고 그 개인사, 가정사들이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것이 살인극 등 사회범죄로 이어질 때가 많다…기 보다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다. 스티크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바로 그랬다. 앞서 언급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는 더욱 더 그렇다. 요 네스뵈의 작품 속 해리 흘레는 별 해괴한 잔혹살인마를 좇아 늘 천신만고 끝에 녹초가 된다.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스노우 맨’ 얘기다. ‘더 체스트넛 맨’의 첫 장면은 1987년이다. 외딴 지역에 홀로 살아 가는 농가에서 끔찍한 살인이 발생한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남매 중의 누군가가 도끼나 식칼로 난자 당했다. 아이 둘만 살아 남았는데 이 아이들의 방에서는 체스트넛 인형들이 많이 널려져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이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누가 농가의 부부를 도륙했으며 아이 마저 한명을 도끼로 때려 죽였을까. 이 집안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두 아이. 두 아이 모두 입양아이다. 덴마크 코펜하겐 언론은 연일 사회복지부 장관 로사 하르퉁(이반 도르네르)의 근황을 뉴스를 내보내는 중이다. 1년 전 그녀는 자신의 딸 크리스티네를 잃어 버렸다. 경찰은 유괴사건으로 보고 전력을 다해 추적했으나 결국은 아이를 찾지 못했다. 다만 크리스티네를 죽이고 유기했다고 자백한 정신이상자를 검거했을 뿐이다. 장관의 딸 아이 실종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된다. 크리스티네는 살해당한 것으로 정리된다. 로사 장관은 1년 휴직 기간을 거쳐 다시 업무에 복귀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일단 장관직을 사퇴했을 것이다. 북구 나라는 이걸 기다려 준다.) 로사의 장관직 복귀가 언론의 주요 관심사일 때 그에 준하는 사건이 하나 둘 씩 벌어지기 시작한다. 손목이 잘리거나 발목이 잘린 여인들의 시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모두들 아이들이 있는 엄마들이다. 아이들이 잠깐 놀이에 한눈을 판 사이에 엄마들은 마당 숲으로 끌려 들어 가거나 헛간으로 끌려가 살해 당한다. 두 눈은 도려냈고 어떤 여자는 손목, 어떤 여자는 발목을 잘라 내되 대개 여자가 살아 있을 때 절단을 함으로써 극심한 고통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 둘이 나선다. 베테랑 형사 나이아 툴린(다니차 추르치치)과 무슨 이유에서인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좌천돼 옮겨 온 유로 폴(유로 경찰)인 마크 해스(미켈 보 필스고르)가 그들이다. 이 둘은 시체 옆에서 체스트넛 인형이 늘 발견되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다. 문제는 이 체스트넛 인형에서 1년 전에 실종, 사망된 것으로 정리된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형사 둘은 연쇄살인 사건이 로사 장관과 연관이 있음을 눈치채고 그녀의 주변을 캐기 시작한다. 로사 장관은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녀의 과거는 무엇인가. 로사의 남편은 딸의 유괴사건과 전혀 무관한가. 혹시 이 둘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부부의 육아는 정상적이었는가. 뭐니뭐니해도 크리스티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다면 왜 연락이 없는 것인가. 살해당하는 여성들의 연관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다들 애 엄마라는 점? 근데 그게 뭐? 그리고 왜 팔다리는 잘라 가는 가. 무슨 전리품인가. 가장 중요한 것. 체스트 넛 인형을 두고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얘기할 수는 없겠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이 영화에는 이른바 사회복지가 잘돼 있다는 북구 나라에서조차도 아이들 양육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적 갈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살해된 엄마들은 아이 양육에 일부러 그랬든 어쩔 수 없었든 소홀했었던 여자들이다. 다들 직장이 있거나 너무 젊어서 애보다는 자신이 더 귀한 존재인 여자들이다. 이럴 때 애들은 방치되기 일쑤다. 로사 장관도 과중한 업무 때문에 남편과 방과 후의 애를 데리러 가는 문제가 엇갈렸다. 그때 애가 사라졌다. 사건을 좇는 툴린 형사도 허구헌날 쏟아지는 강력범죄에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너무 어렵다. 툴린은 그래서, 지능범죄수사대로 옮기기를 희망한다. ‘더 체스트넛 맨’은 결국 여성 주체의 사회역사적 복원, 여성성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기까지 기득권 남성 사회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려 한다. 여자들은 애부터 건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건 범죄자의 주장처럼 느껴진다. 근데 그건 자신이 어릴 때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던 정신적 충격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결론 부분으로 치닫을 때는 역설적으로 진부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남녀평등이 잘 돼있다는 북구에서조차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구태의연한 논쟁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못하면 남자가 하면 된다. 가정과 육아는 남녀가 함께 하는 일이다. 이 문제가 덴마크에서 불거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사회의 시대정서도 퇴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다. 그것 역시 덴마크 사회가 위험 신호를 내보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 실상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니까. 이래저래 저들이나 우리들이나 기득권 층(그것이 자본가가 됐든 우파 정치인이 됐든 아니면 남자가 됐든)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피력한다. 사회는 늘 싸움과 정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쇠벤 스바이스트루프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형)드라마로 만들었다. 두개 중 하나를 보거나 읽으면 된다. 둘 다까지는 필요없는 일이다.
자, 007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임스 본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이제 너무 늙었고 허점투성이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너무 많이 휘둘린다. 영국 첩보조직 MI6로서는, 그 수장 M으로서는, 눈 딱 감고 폐기처분해야 할 요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모양이 빠지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영화 내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는 묘하게도 영화 외적인 것과 연결된다. 영화사 유니버셜은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와 계약 관계가 끝나 간다. 크레이그는 한국 나이 55세. 007의 액션 연기를 하기에 쉬운 나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섹시하지가 않다. 007 캐릭터의 주요 항목 중 하나가 섹시함인데, 다니엘 크레이그에게는 더 이상 본드 걸과의 베드신이 별로가 됐다. 역할 교체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젊고 야망적인 배우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를 어떻게 모양 빠지지 않게 내보낼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 출연의 마지막 007 영화 ‘노 타임 투 다이’를 두고 젊은 세대들 간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대체적으로 지루하고(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43분이다) 빌런(악당)들의 죽음이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뤄지며 액션도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입소문이 꽤 많아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번 007 영화는 분명 실패작일 거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틀렸다. 이번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나름 걸작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지난 후 곰곰이 복기해 보면 볼수록 감독인 케리 조지 후쿠나가의 스토리 텔링 능력, 곧 007이 어떻게 임무를 마감해야 하는지, 그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캐릭터에 대한 공감 능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후쿠나가는 미국 최고의 걸작 드라마 ‘트루 디텍티브’ 시즌1의 감독이었다. 그 기대치에 대해 한 점 모자람이 없다. 돌이켜 보면 나이 먹은 세대의 관객들이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혹평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이 영화가 갖는 슬픈 기조, 멜로의 감성 때문인 듯싶다. 이번 007은 슬프다. 그 점이 많은 기성세대들의 마음을 기울게 할 것이다. 텍스트 구조상으로는 케리 조지 후쿠나가가,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온 007 버전의 모든 작품을 동원하고 그 이야기의 종결 구조를 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노 타임 투 다이’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전작들인 ‘카지노 로얄’, ‘스카이 폴’, ‘스펙터’를 모두 합치되 줄이고, 포함하되 생략한다. 앞선 세 작품에 리스펙트를 바치되 그걸 뛰어넘는다. 누가 감히 이번 007을 전작에 비해 모자라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고 있는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행태다. 이번 007 영화의 특징은 연속성과 영속성이다. ‘카지노 로얄’과 ‘스카이 폴’, ‘스펙터’에 이르기까지 더블오세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잊은 사람은 이번 이야기를 언뜻 이해하기 쉽지가 않다. 본드가 왜 그러는지,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 곧 말로리M(랄프 파인즈)이 왜 저런 일을 벌였는지(과연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머니페니는 본드를 왜 돕는지(본드와 머니페니 사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녀가 예전에 본드를 쏜 적이 있다는 반어적 대사를 이해할 수 없다), Q 역시 왜 본드를 무작정 지원하는지 알 수 없다. 이야기의 씨줄 날줄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 빌런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블로펠드(크리스토퍼 왈츠)가 왜 본드에게 ‘쿠쿠’ 소리를 내며 놀리는지 그 내심을 이해할 수가 없다.(그건 사실 열등감이다) 모든 음모의 시작은 블로펠드가 이끌었던 스펙터 조직에서 비롯됐었다. 본드가 현재 사랑하는 여인 마들렌(레아 세이두)의 아버지는 MI6와 스펙터의 더블 에이전트, 곧 이중첩자였다. 블로펠드는 본드에게 마들렌은 스펙터의 딸이라는 이상야릇한 소리를 한다. 스펙터 조직이 블로펠드에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는 모양이고, 그 과정이 마들렌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그건 영화가 끝날 쯤 돼서야 전모가 드러난다. 눈치 빠른 관객은 영화 오프닝에서 그걸 알아챌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사와 후사가 갖는 이음새를 알아채는 데 있어 전편에 대한 기억의 소환 없이는 불가능한 작품이 이번 007이다. 그 연결점을 알면 영화가 꽤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CIA 요원 펠릭스(제프리 라이트)는 007이 거의 유일하게 신뢰하는 동료 첩보원이다. 근데 왜 그러는지는 ‘카지노 로얄’에 나온다. 펠릭스는 본드의 슬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이다. 그 슬픔의 기저에는 배스퍼(에바 그린)가 있다. 이번 007 영화의 초반 장면은 본드의 슬픔이 꽤나 컸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제임스는 배스퍼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한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 오히려 배스퍼가 본드를 배신하지 않았었던가. 배신과 사랑의 이중주, 그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장면의 본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악의 집단 스펙터에 하나 혹은 둘씩 자신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본드는 마들렌에게 얘기한다. 당신은 내게 가장 큰 선물을 줬다고. 그것은 무엇일까. 결국은 사랑이다. 007도 사랑을 한다. 사랑을 했다. 그는 마들렌을 사랑하지만 그 이전에는 배스퍼를 사랑했다. 배스퍼의 사랑을 가슴에 묻고 마들렌과의 생을 새로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007은 결코 울지 않지만 그런 그를 보게 되는 우리는, 그의 가슴 아픈 퇴장을 바라보는 우리는 눈물이 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말로리 M의 얘기가 꽤나 사람을 서정적으로 만든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007 영화가, 샘 멘더스가 연출한 이후 이번 후쿠나가가 연출하기까지 줄기차게 보여 주고자 하는 생의 철학의 메시지이다. M이 이런 말을 할 때 본드의 사람들은 다 함께 있다. 머니페니와 Q, 또 다른 조력자 태너(로리 키니어) 그리고 노미라는 이름의 여성(라샤나 린치). 그들은 왜 본드없이 따로 모이게 됐을까. 이번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허투루 봐서는 안 될 작품이다. 영화의 내면을 놓치면 안 될 일이다. 그렇게 하면 이번 007 영화가 가지는 연속성과 영속성, 이 시리즈물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심지어, 어떤 노세대 관객들은 극장 문을 나서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슬프기 때문이다. 이제 바야흐로 제임스 본드의 시대가 실질적으로 종언을 고했기 때문인데 그건 곧 노장 세대의 퇴장을 얘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007 영화를 두고 혹평하거나 비난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007을 미워할 수는 없다. 007은 사랑받아야 할 존재다. 그것도 영원히. 특히 제임스 본드라면 더욱더.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보기 위해 전작인 ‘카지노 로얄’부터 ‘스카이 폴’과 ‘스펙터’를 다시 뒤져 보는 일은 다소 귀찮을 수 있겠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항변도 들린다. 허구헌날 싸우는 정치판 뉴스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선택하시기들 바란다. 적어도 007 제임스 본드는 세상을 구하려고 한다. 그게 어디인가.
경기신문 9월 '보도평가위원회' 회의가 정부의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서면 의견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대체해 진행됐다. 보도평가위원회 위원들은 의견서를 통해 9월 한 달 경기신문의 '촉법소년', '위드코로나' 등 기획 보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한 경기신문 의뢰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주목하면서 대선 국면을 앞두고 있는 지금, 정치 이슈에서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보도를 할 것을 권고했다. 아래는 보도평가위원들의 의견서 내용이다. △ 박조원 위원장(한양대학교 교수) = 여야 모두 대통령 선거 후보자를 가리기 위한 당내 경선이 한창이다. 각 당은 경선 과정에 당원뿐만 아니라 국민의 의사도 반영하는 국민경선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당원이 아니더라도 각 당의 후보 결정에 국민이 참여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뉴스는 일반 시민이 각 후보자가 대통령이 되어 펼칠 정책에 대해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즈음 쏟아지는 각 당의 경선에 대한 보도는 후보자들의 정책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고 흥미만을 자극하는 순위 위주의 여론 조사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경마식 보도에 치우치고 있어서 적잖이 걱정된다. 경기신문의 경선 보도를 보면 경기신문도 이 점에서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선 후보자들의 정책에 초점을 맞추는 기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국민의 후보자들의 정책에 대한 판단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차분하게 후보자들이 제시하는 공약이나 정책에 대한 심층적 분석과 비판을 함으로써 국민이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좀 더 애써주기를 당부한다. △ 홍숙영 부위원장(한세대학교 교수) = 9월 8일 수요일 1면 “하남 시청 맞은편 건물 불법 증축시, 26년 동안 위법행위 몰랐을까?” 제하의 기사는 하남시가 26년간 중심상권의 불법건축물 위법 행위에 2015년 강제이행금 150만원만 부과한 사건을 고발했다. 특히 하남시가 이 건물에 대해 최근 6년간 계고장 발부조차 안 해 제보자를 포함한 일부 시민들이 뒷배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관련 내용을 취재하였으나 뒷배 관련 취재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의혹만 제기했다. 그동안 왜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특혜를 준 범위는 어디까지인지에 관한 상세한 취재가 필요하다. 9월 8일 수요일 2면 “홍준표, 경기도 남북… ‘분도’ 아닌 기초광역 ‘통합’이 답” 제하의 기사는 홍준표 의원이 7일 수원시 국민의힘 경기도당에서 주요 당직자 간담회를 열어 2024년 개헌, 행정체제 단계 축소 경기도 기초단체 7~8개 도시로 통합, 하늘길 전국 4개 광역으로 분산, 이재명 지사 ‘기본소득’ 강하게 견제했다는 소식 등을 전했다. 그러나 현장 분위기, 질의응답, 참석자들의 의견 등은 전하지 않고 홍준표 의원의 메시지를 정리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보도자료를 보면 알 수 있는 내용보다는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스케치 형식으로 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9월 8일 수요일 9면 “전통토속음식 ‘젓국갈비’ 옛 맛 보전 고집” 제하의 기사는 강화도 전통음식인 ‘젓국갈비’의 유래와 인근 관광지인 용흥궁을 소개한 기사로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젓국갈비를 판매하는 음식점인 A식당 한 곳을 선정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젓국갈비는 A식당만의 특허가 아니라 강화도 전통음식이며 강화지역에 잘 알려진 식당들이 많이 있다. 음식관련 기사는 전문기자나 미식가, 요리전문가, 미식전문기관 등의 추천을 받아 객관적으로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잘 알려진 음식점 여러 개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 사정희 위원(화성시 민주시민교육센터 팀장) = 일주일에 1번씩 영화를 소개하는 [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은 독자로 하여금 그 스토리에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영화를 관람하지 않아도 나와 우리를 성찰하게 하며, 영화를 꼭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오동진 칼럼]은 문제적 인사들의 행태나 부조리한 사회현상들을 영화나 드라마 내용 또는 도서에 빗대어 재미있게 써내려가고 있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 것 같은 상황과 내용도 매우 흥미진진하고 쉽게 읽힌다. 그래서 [오동진 칼럼]과 [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휴식과도 같은 코너이다. 특정 후보에 대한 노골적 편파 보도가 눈에 띈다. “강득구 의원 ‘대장동 의혹’ 관련 이재명 음해성 정치공작 밝혀야”(2021.09.23.), “SNS 달군 경기도민의 이재명 평가… 희망과 용기 주는 정치인”(2021.09.23.), “출구 못찾는 ‘대장동 내전’…‘野에 부화뇌동’ ‘불안한 후보’”(2021.09.23.), “추·김·박 ‘대장동 의혹’에 ‘이재명 부정·비리 의심 안 해’”(2021.09.23.), “더불어민주당 용인시 광역 및 기초의원 16인, 이재명 경기도지사 지지선언”(2021.09.23.) 등의 기사는 민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후보에 대한 친화적인 내용의 기사로 경기신문이 인터넷 9월 23일에 기재한 기사만 5건이 된다. 이에 반해 같은 날 민주당의 경쟁후보인 이낙연 후보에 대한 기사는 “이낙연 ‘민간 개발이익 최대 50% 환수… 화천대유 반복되지 않도록’”(2021.09.23.) 단 한 건만 보도됨으로써 보도 횟수에서도 편파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편파보도는 민주당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언론의 올바른 자세라 하기 어려워 보인다. △ 여면구 위원(대한민국산업현장 교수) = 정치 기사의 편향 개선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겠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지역신문의 어려움은 분명 있겠지만 특정 정치인에 관한 편향적 기사를 보도하는 것이 다양한 지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참 언론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민과 노력을 통해 경기신문이 보다 객관적 기사로 권력에 대한 견제 등 언론의 사명을 다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지역을 대표하는 정론지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1년 9월 15일자 5면 “2045년 수도권 인구 중 청소년 11%뿐” 기사는 국가 미래 관점에서 볼 때 의미가 있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단발성 기사보다는 ‘출산절벽의 문제점과 해법’을 다루는 기획성 시리즈 기사로 다루면 어떨까 한다. 2021년 9월 13일자 2면 “사채 수준 고금리 채권자 ‘국민연금’에게 경기도민이 봉인가?” 기사와 9면 국민연금공단 북수원지사장의 기고 “코로나 방역과 청렴한 국민연금” 기사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같은 날짜의 기사로 다뤄 이상했다. 9면 기고 기사는 날짜를 달리해서 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2021년 9월 16일자 1면 “올해 건강보험율 1.89% 인상··· 최근 5년간 가장 낮아” 기사는 가계·기업 부담 덜었다는 내용의 기관 홍보성 기사로 보였다. 이런 기사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하기 때문에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지 말고 언론적 시각의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 임선일 위원(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 ‘촉법소년’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꽤 많은 양의 기사가 검색된다. 그만큼 촉법소년들에 관련된 사건 사고가 많았다는 뜻이다. 검색된 기사 내용을 보면 강력 범죄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만 14세 미만인 형사미성년자(촉법소년)들이 저지른 범죄라고는 믿기 힘든 내용들이 대다수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획보도]“촉법소년 범죄는 해마다 증가... 경미한 처벌이 원인?”기사는 촉법소년의 범죄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 기사였다. 사회적으로도 촉법소년의 처벌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시대 요구에 맞는 기획보도라는 생각이 든다. 해당 기사들은 촉법소년 범죄 증가의 원인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제언을 담고 있어 독자들에게 문제의 다양한 해결방안을 같이 생각하게 하는 기사였다. 또 [위드 코로나]“소상공인 ‘숨통’ 트는 방역체계 개편… 소비 진작으로 이어지길”이란 기사도 눈에 띄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는 소상공인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는 기사였다. 구체적인 통계수치 등을 제시하여 소상공인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고, 위드 코로나를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들어 볼 수 있는 기사였다. 위드 코로나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만큼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담은 보도가 이어졌으면 한다. COVER STORY ‘People’의 경우 화질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클릭하여 화면을 보면 글자가 균일하게 보이지 않고 번지거나 깨져 보인다. 이는 전체 화면에서뿐만 아니라 확대 시에도 글자의 선명도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구독자들을 위하여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 최윤정 위원(한국정서교육개발원 원장) = 9월 23일, 24일 양일 보도된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기사는 가정과 사회의 역할을 지적하며 범죄예방의 근본적 한계가 드러났고 법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지만, “갈수록 범죄 ‘잔혹’··· 반성 모르는 ‘영리한 꼬마 범법자’”란 제목은 내용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 가족들의 참담함을 살피지 못했으며, 10세 이상 14세 미만 대상의 심리사회적 발달에 대한 내용이 함께 다루어졌다면 대상을 처벌하고 교육하는 것에 대한 우리 모두의 책임에 대한 제시가 더 잘 보였을 것이라고 본다. 분야별·생애주기별 정책의 효과성과 사회적 기능에 대한 검토가 기획기사로 다루어진다면 국민의 선거공약에 대한 관심 및 정치참여가 늘어가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 최인숙 위원(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 연속 두 달간 여론조사 보도형식에 대해 지적했다. 하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금은 경선시즌인데 그 경선에 주목해 여론조사를 심층분석해 주는 것이 좋다. 그런데 대선시즌처럼 진보/보수 후보에 대한 경마식 보도가 주가 되고 있다. 9월 13일 보도된 1면 여론조사 기사를 보면 “이재명 후보는 34.6%로 윤석열 전 총장(34.3%)과의 가상대결에서 0.3%p 앞섰다. 앞선 2차 조사에서 이 후보는 34.3%, 윤 전 총장은 37%로, 오차범위내 접전이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가 0.3%p 앞섰을 때에는 0.3%p로 ‘앞섰다’고 보도하고, 윤 전 총장이 37%로 2.7% 앞섰을 때에는 ‘오차범위내 접전’이라고 보도한다. 누가봐도 이는 여당 후보 편에 서서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여론조사 보도를 좀 더 객관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기사에는 숫자 이외에는 알려주는 정보가 없다. 여론조사는 순위만을 알려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가 후보들의 어떤 점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 내용도 알려주어야 한다. 9월 24일 보도 역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2면 “與野 당내 대선주자 2강 ‘희비’… 오차범위 안팎 대혼전” 기사 역시 자극적인 타이틀을 뽑아 처음부터 끝까지 누가 앞서고 누가 뒤서는지 그 보도만 주구장창 하고 있다. 이런 보도는 신문의 질을 떨어뜨린다. △ 최광범 위원(한국언론진흥재단 전문위원) = 경기신문이 알앤써치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를 지난 8월 30일부터 매주 월요일 보도하고 있다. 지난 9월 6일자 조사에서는 국민의힘 홍준표 후보가 윤석열 후보를 앞서는 조사가 최초로 나왔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이 결과를 대서특필했다. 당일 경기신문은 “이재명 오름세 vs 윤석열 내림세, 홍준표 원희룡 후보 대약진”이란 제목을 달고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3면에 배치한 “홍준표, 대선 여론조사 사상 첫 야권지지도 1위 등극” 기사를 1면 기사와 바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고발사주 의혹으로 하강국면을 맞은 윤석열 후보와 2,30대 남성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소위 홍준표 후보가 공언한 골든크로스가 일어날지, 일어난다면 언제일지 초미의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경기신문 조사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그 콘텐츠 활용을 극대화 했어야 했다. 정작 자사 단독 콘텐츠가 3면에 도표나 사진 하나 없이 드라이하게 보도된 것은 못내 아쉬웠다. 앞으로 여론조사 보도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몇 가지 당부하고 싶다. 우선, 역대 어느 대선보다 변수가 많다. 여야 후보들간의 경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당내 후보 경선도 볼거리가 많다. 오차범위 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조사결과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자제해 주길 바란다. 보통 1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에서 표본오차는 ±3.1%p다. 6.2% 차이는 순위를 매기지 말라는 소리다. 조사결과를 보도할 때도 알앤서치 조사는 스트레이트 기사로 처리하고, 해설기사는 다른 기관의 조사내용도 활용했으면 한다. 최근 조사에서 확연히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ARS조사’인가 ‘면접원에 의한 전화면접조사’인가에 따라 지지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요즘 독자들은 여론조사도 언론보도도 못믿겠다고 한다. 경기신문만이라도 모범적인 여론조사 보도를 해주었으면 한다. 한 예로 추석연휴 기간에 보도됐던 KBS의 한국리서치조사와 데일리안의 여론조사공정㈜조사는 같은 날 조사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야후보가 오차범위 밖에서 각각 다른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는 것으로 나왔다. 뉴스 소비자들의 반응은 ‘누가 맞는 거야?’ 라고 한다. 여론조사불신, 언론불신, 정치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일 한 면을 할애하는 스포츠 지면의 독자 흡인력이 떨어진다. 야구나 축구 등은 전날 지면 마감후에 경기가 종료돼 반영하기 힘들다. 따라서 속보보다는 열성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방식의 기사가 생산됐으면 좋겠다. 스포츠팬들의 요구사항을 수렴하는 채널을 만들었으면 한다. 지난 주 용인 소재 석성산 산행을 하면서 유기견 때문에 놀랐다. 등산객 한 분이 목줄도 없는 개를 쓰다듬고 있어, 목줄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유기견이라고 했다. 등산 때마다 음식을 줬더니 산행 때마다 자신을 따른다고 했다. 등산객은 이 유기견이 임신까지 했다며 걱정했다. 지난 7월에는 용인과 광주 경계에 있는 태화산 등산을 하면서 염소를 방목해 정상에 염소 배설물 냄새와 날파리 때문에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두 사례에서 보듯 경기도내 시민들이 찾는 등산로에 안전이나 불쾌감을 유발하는 사례가 없는지 탐사취재를 할 필요성이 있다. [ 정리 = 노경신 기자 ]
자신 스스로를 덤애스(dum-ass), 곧 ‘촌뜨기 무지렁이’라 부르는 빌(맷 데이먼)은 새로 만난, 그리고 가까스로 가까워지게 된 버지니(카밀 코탄)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다. 그는 이국땅 낯선 곳,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노동 일을 하며 살아간다. 막노동판이다. 평생 그가 해왔던 일이다. 조금 더 나은 일이었다는 것이 석유 채굴 노동 정도였다.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했던 일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스틸워터라는 고장. 영화 ‘스틸워터’는 오클라호마 스틸워터 출신 노동자 빌이 프랑스에서 살인용의자로 투옥돼 살아가는 딸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이다…라기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하며 그래서 (모두의 인생처럼) 지루한 이야기다. ‘스틸워터’는 파격적인 충격의 드라마가 아니다. 조용한 울림과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이다. 극장 문을 나설 때 주인공 빌의 마지막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그렇지. 그렇게 되겠지라고 속으로 되뇌이게 만든다. 빌은 버지니가 홀로 키우는 딸 아이가 숙제를 하지 않자 자신도 어릴 때 공부하면 질색을 했다며 그래서 결국 땅 파는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러다 너도 나처럼 땅이나 파먹고 살게 될 거라고, 그는 어린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얘기 아닌 얘기를 한다. 빌은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고 할 때도 그래서 아예, 디깃!(dig it!)이라는 표현을 쓴다. ‘(땅 파서)밥 먹어’라는 뜻이겠다. 아무튼 빌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다. 아이의 엄마이자 여자 버지니는 지식인이다. 연극배우다. 자신이 평생 말도 붙여 볼 엄두를 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녀와 차츰 사랑에 빠진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된다. 딸 아이의 소중함을 배우게 된다. 사실 빌이 여기에 와있는 것은 자신의 딸 앨리슨(애비게일 브레슬린) 때문이다. 앨리슨은 살인죄로 마르세유에서 5년째 복역 중이다. 자신의 아랍계 룸메이트를 살해했다는 죄목이다. 앨리슨이 레즈비언이고 연인을 질투 끝에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앨리슨은 다른 아랍계 남자가 자신의 애인을 칼로 찔렀다고 항변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아빠 빌은 그녀의 무고를 입증하려 애쓴다. 문제는 마르세유에서 유학 생활 끝에 이런 사고를 낸(당한) 앨리슨은 오히려 아빠가 무식하고 믿지 못할 인간이어서 일을 맡길만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평생을 딸 아이와 의절하다시피 하며 살아 온 빌은 마르세유에 딸을 면회하러 왔다가 프랑스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의 아이에게 진정한 부성(父性)을 느낀다. 대체 부성이자 의사(擬似) 부성일 수 있다. 하지만 빌은 생애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친딸 앨리슨을 둘러싼 범죄 행각이 그의 최초이자 최후의 행복한 일상의 발목을 잡는다. 인생 참, 쉽고 아름답게 풀리라는 법이 없는 법이다. 세상과 인생의 진실은 한 가지가 아니다. 두 가지이다. 아니 늘 여러 가지이다. 진실은 진실이 아닐 수가 있다.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 그건 어쩌면 실존적 선택의 문제이다. 그래서 삶은 복잡하고 다단하다. 진실이 여러 개라는 것은 어쩌면 모르는 게 낫다. 그걸 아는 순간 세상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이 ‘그 모든 것’의 진실을 알게 된 후 고향에 맞닥뜨려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석방된 딸 앨리슨이 여기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하자 빌은 “너무 많이 변했어. 내 눈엔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 진실을 목도한 자, 바깥 풍경이 같을 수가 없다. 내 안이 변했기 때문이다. 모든 세상사는 어쩌면 유물적 존재의 관점이 아니라 유심의 관점, 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야 내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영화 ‘스틸워터’가 주는 기이한 교훈이자 삶의 방책이다. ‘스틸워터’를 쓰고, 만든 토마스 맥카시 감독은 다소 기이한 인물이다. 원래는 배우 출신이다. ‘미트 페어런츠3’같은 영화에 나왔다. 가족용 어드벤처 영화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은 대체로 널을 뛴다. 가장 획기적으로 보이는 것은 ‘스포트라이트’이다. 보스턴 글로브지 내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를 다룬 내용이다. 탐사팀 스포트라이트는 미국 내 가톨릭 교구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 폭로했다. 이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기보다는 스포트라이트 팀 자체에 포커스를 둔, 그래서 매우 드라이하게 스토리를 전개시킨 것이 특징인 작품이었다. 또 그래서인지 다소 非할리우드 문법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2016년에 나왔을 때 그해 아카데미 각본상, 작품상을 탔다. 영국 아카데미,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등을 휩쓸었다. 거의 전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탔다. 그만큼 내용과 전개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셈이다. 이번 신작 ‘스틸워터’는 바로 그 ‘스포트라이트’의 뒤를 잇는 작품이다. 무겁고 착 가라앉아있다. 그만큼 차분하고 냉랭하다. 흥분하지 않는다. 2시간여의 러닝타임 동안 이상한 느낌으로 사람을 동결(凍結)시킨다. 현실의 비현실성이자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너무 놀라워서 그저 영화 얘기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지고 너무 극적임에도 현실에서는 실제 저런 일이 벌어진다는 자각 아닌 자각을 하게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영화는 갑자기 불현듯 삶의 진실을 파고들게 만든다. 그걸 깨닫는 순간, 주인공 빌의 마지막 대사처럼 주위의 사물은 이제 예전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맷 데이먼의 연기가 한 마디로 ‘끝내준다’. 지적인 이미지의 맷 데이먼은 이번엔 막노동꾼으로 변신하기 위해 살을 찌우고 걷는 모양새를 바꾸고 말투를 바꾸고 등등, 그냥 아예 자신을 바꿨다. 연기자란 이런 것이라는 점을 역력히 증명해 낸다. 이 영화가 실제 인물인 아만다 녹스 사건을 극화한 만큼 현실과 드라마를 분리해 내고 그 간극을 캐릭터로 채워 내야 했을 것이다. 온전히 연기자에게 요구하는 몫이 적지 않았던 드라마이다. 배우가 갖는 질량, 그 깊이가 남다르지 않으면 영화의 기획과 촬영 자체가 진행되지 않았을 공산이 큰 작품이다. 맷 데이먼은 내년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다. 세상의 진실이 여러가지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만큼은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포기하더라도 본인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과 사회는 다 잊는다 해도 사람의 내면은 진실탐사의 의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영화 ‘스틸워터’가 토마스 맥카시의 전작인 ‘스포트라이트’의 또 다른 연작처럼 보이는 이유다. 이건 또 다른 탐사보도 작품이다. 우리가 우리 내면을 배반한 것은 무엇인가. 배반의 실체는 무엇인가. 남을 속여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될 일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속이기 위해 자신부터 속인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스스로부터 알지 못하게 만든다. 요즘의 세상사에 대해, 위선과 거짓의 인간들에 대해 이 영화는 우회(迂廻)적으로 오히려 직시(直視)하게 만든다. 좋은 영화는 사회와 사람을 취조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함께 동반(同伴)하려 한다. 이런 영화 요즘, 참으로 흔치가 않다.